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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작가의 음담악담(音談樂談)

4월 5일은 식목일이 아니다, 홍대 앞에선…

1995년 커트 코베인 추모공연으로 시작된 홍대 앞 인디문화

4월 5일은 식목일이 아니다, 홍대 앞에선…

커트 코베인(오른쪽)과 그 가족 [위키피디아]

커트 코베인(오른쪽)과 그 가족 [위키피디아]

1994년 4월 2일. 건스 앤 로지스의 베이시스트 더프 맥케이건은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시애틀로 가는 비행기에 탔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이는 동료 뮤지션. 그 남자가 속한 밴드는 건스 앤 로지스와 여러 껄끄러운 인연으로 얽힌 사이였다. 건스 앤 로지스가 1980년대 후반을 대표했다면 이 밴드는 1990년대 초반을 상징했다. 두 밴드가 결정적으로 부딪친 건 1992년 MTV 시상식이었다. 문제의 밴드가 무대 위에서 대놓고 건스 앤 로지스를 능욕했던 것이다. 하지만 벌써 2년이나 지난 일. 맥케이건과 그 남자는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 남자는 약물 중독으로 LA 한 약물치료센터에 갇혀 있다 담장을 넘어 막 탈출한 상황이었다. 맥케이건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에 그 남자를 이해했다. 둘 다 시애틀 출신이고 거기서 음악을 시작했기에 아는 사람도 많이 겹쳤다. 시애틀로 가는 비행기에서 둘은 지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 남자는 맥케이건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라고만 했다. 가서 뭐 할 거냐는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맥케이건은 그 남자가 살아생전 만난 마지막 뮤지션이 됐다.


희미하게 사라지기보다 한순간 타버리다

시애틀로 돌아간 그 남자는 친구의 집으로 갔다. 친구는 자신의 여자친구와 함께 있었고, 그녀는 그 남자의 아내로부터 몇 차례나 전화를 받은 상황이었다. 그 남자가 자신의 거취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탓이었다. 즉 LA에서 그 남자는 행방불명 상태였다. 

그 남자는 아내가 머물고 있는 호텔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내는 남편을 제외하면 누구의 전화도 연결하지 말라고 호텔에 말해둔 참이었는데, 둘에게는 그럴 때를 대비해 세팅해둔 암호가 있었다. 하필, 약에 찌들어 있던 남자는 암호를 잊어먹었고 끝내 둘은 전화통화를 하지 못했다. 

4월 5일 화요일, 그 남자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리바이스 청바지와 갈색 코듀로이 코트를 껴입고 잠든 채였다. 오디오 쪽으로 가서 R.E.M.의 ‘Automatic For The People’을 걸었다. 그리고 담배에 불을 붙인 후 붉은 펜으로 종이에 가족, 즉 자신의 아내와 갓 태어난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편지에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미안해’였다. 



그리고 또 한 장의 편지는 세상에게 보내는 거였다. ‘(전략) 나는 읽을 때나 쓸 때도, 음악을 들을 때나 곡을 만들 때도, 너무나 오랫동안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중략)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나쁜 죄악은 내가 100% 즐거운 것처럼 꾸미고 가장함으로써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다. 가끔 나는 무대로 나가면서 마치 출근 카드를 찍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중략) 더는 열정이 없다. 그러니 기억해주기 바란다. 점차 희미하게 사라지기보다 한순간에 타버리는 것이 낫다는 것을.’


코베인이 떠나며 남긴 것들

그린데이(왼쪽) 블러 [AP=뉴시스]

그린데이(왼쪽) 블러 [AP=뉴시스]

그는 벽장 뒤편의 판자를 떼어냈다. 비밀 공간이 나왔다. 여기에는 엽총과 총알 상자, 그리고 담뱃갑이 들어 있었다. 총을 챙겨 들고 수건 두 장을 꺼냈다.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자신의 방에서 100달러어치 헤로인이 들어 있는 비닐봉지를 꺼내 들고 집 뒤편 헛간으로 갔다. 구석에 앉아 담배 다섯 대를 연달아 피우고 맥주 캔을 비웠다. 그리고 팔꿈치 바로 위에 헤로인을 주사했다. 동이 터 오르고 있었다. 

그는 예전에 이런 일기를 썼다. ‘현실에는 나를 삼켜버리는 산소와 결코 구멍으로 돌아가지 않는 살균 냄새, 그리고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공포가 있었다. 그것을 알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세상을 다루는 나만의 첫 번째 의식을 시작했다. 나는 울지 않았다.’ 그는 엽총을 자신의 입천장에 닿도록 넣었다. 방아쇠를 당겼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94년 4월 5일, 커트 코베인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코베인이 리더로 있던 얼터너티브 록밴드 너바나도 그렇게 사라진 후 세상은 급변했다. 시애틀 자택에 몰려든 추모객이 남긴 꽃이 시들기 전 음악산업은 빨리 이 스타의 공백을 채워야만 했다. 너바나와 펄잼, 사운드가든, 앨리스 인 체인스 등 이른바 ‘시애틀 4인방’이 점화한 얼터너티브 혁명의 뒤를 이은 건 펑크였다. 

그린데이가 혜성처럼 등장해 ‘Basket Case’를 히트시켰다. 너바나가 대변한 X세대의 공허함을 그들이 메웠다. 음악 관계자들은 뉴욕과 LA를 비롯한 미국 전역의 대도시를 누비며 코베인의 뒤를 이을 새로운 언더그라운드 유망주를 찾아나섰다. 1980년대 헤비메탈이 ‘백인 청년 남성’을 대변한 반면, 너바나를 비롯한 얼터너티브 운동은 반인종주의, 반남성우월주의, 반자본주의를 표방했다. 

록은 그래서 저변을 더욱 넓힐 수 있었고, 다시 한 번 청년문화의 중심에 섰다. 영국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너바나가 일으켜 세운 1990년대 깃발을 계승할 이들이 필요했다. 스웨이드, 블러, 그리고 오아시스 등 브릿팝의 시대가 열렸다. 좀 더 영국적이고, 좀 더 중성적이며, 좀 더 팝적인 록 밴드의 시대가 말이다.
 
그리고 여파는 태평양을 건넜다. 코베인이 죽고 1년 후, 홍대 앞 펑크 바 ‘드럭’에서는 즉흥적으로 추모공연이 열렸다. 드럭 ‘죽돌이’들이 의기투합해 열었던 공연이다. 이를 기점으로 드럭에선 정기적으로 공연이 열렸고, 소문을 듣고 크라잉넛 등이 합류하며 술집이던 드럭은 라이브 클럽이 됐다. 

홍대 앞 다른 음악 술집들에도 하나둘씩 밴드 무대가 생기기 시작했다. 1980년대 신촌, 이태원의 헤비메탈, 블루스 뮤지션과 달리 그들은 펑크, 얼터너티브 등 동시대 음악을 연주했고 새로운 동네의 새로운 음악에 새로운 젊은이들이 몰려왔다. 바야흐로 홍대 앞 인디 음악의 탄생이었다. 올해도 홍대 앞 라이브 클럽에서는 커트 코베인 추모공연이 열린다. 1994년 이후 25년 동안, 적어도 홍대 앞에서 4월 5일은 식목일이 아니었다.






주간동아 2019.04.05 1183호 (p72~73)

  •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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