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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觀

배꼽 잡는 코미디부터 숭고한 휴먼스토리까지

명절 극장가에서 느끼는 喜怒哀懼愛惡欲

배꼽 잡는 코미디부터 숭고한 휴먼스토리까지

인간의 정서를 두고 오욕칠정, 희로애락이라는 표현을 쓴다. 다섯 가지 욕망과 일곱 가지 감정이란 뜻이다. 재물을 원하고, 명예를 탐하고, 먹고 싶고, 자고 싶고, 성적인 대상을 그리워하는 것. 이 다섯 가지 욕망은 우리 삶을 고단하게도, 때로는 살 만하게도 만든다. 이러한 욕망과 함께 얻게 되고 남기게 되는 그림자들. 기쁘고, 노하고, 슬프고, 두려움을 느끼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또한 욕망하는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의 감정은 우리가 살아 있음으로써 갖는 생의 부산물이기도 하다.

‘민족 대명절’ 추석도 그렇다. 겉으로 보면 기쁘고 즐거운 것임에 틀림없다. 한 해 농사 수확물로 넉넉한 식사를 마련하는 자리. 떨어져 있던 가족이 모여 얼굴을 맞대고 체온을 나누는 때가 바로 추석이니 말이다. 하지만 추석 연휴엔 친족끼리 화투를 치다 살인사건이 벌어지기도 하고, 귀향길 교통체증에 낯선 사람과 언성을 높여 싸우기도 하며, 심지어 사고가 나기도 한다. 명절이라 해도 사람 인생은 오욕칠정, 희로애락을 벗어날 수 없는 셈이다. 2015년 가을, 추석을 염두에 둔 작품들이 하나둘 극장가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추석 연휴를 맞아 개봉하는 영화를 오욕칠정으로 풀어본다.

喜樂(기쁨과 즐거움)/ 김정훈 감독의 ‘탐정 : 더 비기닝’

연휴를 연휴답게 보내는 기본은 많이 웃는 게 아닐까 싶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처럼 ‘웃는 게 즐거운 것 아닐까’ 생각한다면 오랜만에 만나는 한국 코미디 영화 ‘탐정 : 더 비기닝’을 추천한다. 영화는 현실 직업은 만화대여점 사장이지만 꿈만큼은 프로페셔널한 범죄 프로파일러인 남자, 대만의 삶에서 시작한다. 대만은 지질하고 불쌍한, 고개 숙인 남편의 전형이다. 반찬값이라도 벌겠다고 맞벌이를 선택한 아내를 위해 늘 아기띠를 허리에 매고 있다. 애교와 마사지도 필살기로 갖추고 있다. 아내 눈을 속이고 탐정놀이에 나서는 만년 철부지 소년 역을 배우 권상우가 맡아 오랜만에 철없는 코믹 연기를 선보인다.

‘탐정 : 더 비기닝’은 설 연휴 개봉해 관객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던 영화 ‘조선명탐정’ 시리즈와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배우 두 명이 호흡을 맞추는 버디물이라는 것이 그렇고, 살인사건 같은 심각한 범죄를 해결해가는 수사극을 뼈대로 삼고 있다는 점도 그렇다. 차별성과 강점은 대만과 노 형사(성동일 분) 캐릭터에 있다. 책에서 배운 추리기법으로 사건에 접근하는 대만은 ‘눈치꾸러기 아버지’로서 웃음을 선사하고, 후배에게 밀리는 베테랑 노 형사는 의외의 빈 구석으로 폭소를 자아낸다.



돌도 안 된 아기를 품에 안고 살인사건 현장에 가는 것, 사실 웃음은 이 엉뚱한 상황 설정에서 이미 시작되는 면이 있다. 일상의 소소한 부분을 웃음 기폭제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탐정 : 더 비기닝’은 생활밀착형 코미디라고도 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스트레스가 잔뜩 쌓인 아내와 함께 본다면 아내의 분풀이 시간이 될 만한 요소도 많다.

배꼽 잡는 코미디부터 숭고한 휴먼스토리까지
怒哀(분노와 슬픔)/ 이준익 감독의 ‘사도’

배꼽 잡는 코미디부터 숭고한 휴먼스토리까지
이번 추석 연휴 개봉 영화 중 가장 기대되는 작품이 있다면 바로 ‘사도’가 아닐까 싶다. 1762년(영조 38)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난 사도세자 이야기는 우리 모두 안다고 할 수 있다. 부모가 자식을 잃으면 속 썩는 내가 천리에 진동한다 하고 창자가 끊어진다고도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조선왕조 역사에서 믿을 수 없는 비극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직접 아들의 목숨을 빼앗은 것, 그것도 사약을 먹이거나 참수한 게 아니라 뒤주에 가둬 천천히 목숨이 끊어지도록 한 것이다. 바로 그 사건이 영화 ‘사도’의 줄거리다.

흥미로운 건 모두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도 ‘사도’가 여전히 관심을 끈다는 점이다. 이는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패륜적 사건이 주는 원천적 충격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송강호, 유아인, 이준익이 만들어내는 시너지에 대한 궁금증이기도 할 것이다. 영조 역을 맡은 배우 송강호는 이 작품에서 영화 ‘변호인’을 통해 확인한 연기력의 절정을 한 번 더 경신하는 놀라움을 보여준다. 사도 역의 유아인은 영화 ‘베테랑’의 조태오가 남긴 잔상이 채 지워지기도 전 완전히 다른 캐릭터로의 변신을 선보인다. 두 사람이 자아내는 팽팽한 긴장감만으로도 ‘사도’는 무척이나 흥미롭다.

아들을 죽이고 싶을 만큼 노한 아버지, 남편을 잃고 어쩌면 아들까지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혜경궁 홍씨(문근영 분),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해야만 했던 세손(정조)의 모습이 복잡한 인간 심경을 담은 채 다이내믹한 드라마로 펼쳐진다. 기쁨과 즐거움이 스며들 틈 없이 영화에는 분노와 슬픔, 두려움과 안타까움만 넘실거린다. 그 에너지가 관객에게도 여지없이 몰아칠 듯싶다.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삶을 말할 수 있는 수작 ‘사도’에 기대가 모아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喜哀(기쁨과 눈물)/ 천성일 감독의 ‘서부전선’

영화 ‘서부전선’은 6·25전쟁 휴전 직전 아이러니한 상황에 빠진 두 ‘쫄병’ 이야기를 다룬다. 6·25전쟁을 소재로 삼기는 했지만, 영화 ‘국제시장’이나 ‘태극기 휘날리며’처럼 진지한 태도는 아니다. 그 시절 일어났을 법한 유머러스한 사건을 꺼내 인간성의 온도를 확인케 하는 작품에 가깝다.

만삭 아내를 둔 남복(설경구 분)은 평범한 농사꾼으로 살다 전쟁터로 끌려와 복무 중이다. 탱크조종법을 책으로만 배운 북한군 영광(여진구 분)도 자원 아닌 자원병이 돼 전쟁에 휩쓸린다. 문제는 이 평범한 두 병사가 남북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중요한 문서를 맡게 됐다는 것. 남복은 문서를 잃어버리면 총살당할 것이라는 말에 얼이 빠져 전전긍긍하고, 영광은 탱크를 사수하지 못하면 역시 총살한다는 말에 정신이 나간다. ‘평범 이하’ 인물들이 비밀문서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는 이유는 단 하나.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가족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전장에서 중요도를 따지면 무기만도 못한 ‘쫄병’이지만, 그들도 각자 가족과 사연을 지닌 ‘인간’임을 강조하는 이 작품은, 6·25전쟁이란 비참한 역사를 휴먼코미디로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슬픔과 고통을 기쁨과 눈물로 재구성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배꼽 잡는 코미디부터 숭고한 휴먼스토리까지
懼欲(두려움과 욕망)/ 웨스 볼 감독의 ‘메이즈 러너 : 스코치 트라이얼’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메이즈 러너’ 1편은 지난해 개봉돼 300만 명 가까운 관객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이유도 모른 채 미로에 갇혀 생존과 탈출을 고민해야 했던 젊은이들 모습이 우리나라 동세대들에게 전폭적 공감을 얻어냈다. 게다가 민호(이기홍 분)라고 불리는 한국인 캐릭터가 꽤 비중이 있는 데다 멋지기까지 한 점도 국내 흥행의 요인이 됐다.

‘메이즈 러너 : 스코치 트라이얼’은 이 영화의 속편이자 전체 3부작 중 가운데 편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글레이드’라고 부르는 인공 미로를 벗어나자마자 청년들 앞에는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황폐한 도시가 펼쳐진다. ‘스코치’라 부르는 이 도시에는 백신조차 없는 ‘플레어 바이러스’가 창궐 중. 바이러스에 감염된 생물체 모두가 주인공들을 뒤쫓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여전히 모른 채 미로를 벗어난 청년들은 무조건 뛰면서 해결책을 찾아나간다. 이 긴박감은 “여기가 전쟁터면 바깥은 지옥이야”라고 말하는 드라마 ‘미생’ 속 미생들의 호소와 닮아 있고, 대학에 입학했지만 자유는커녕 더 큰 압박에 시달려야 하는 우리네 젊은이들의 당혹감과도 닮아 있다. 웨스 볼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메이즈 러너’ 1편 글레이드가 고등학교라면 2편 스코치는 대학과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메이즈러너 : 스코치 트라이얼’은 10, 20대 초반 관객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영화가 될 듯싶다. “직장은 구했니” “결혼은 할 거니” “수능 준비는 잘 되니” 같은 추석용 압박 멘트가 부담스러운 젊은이들 사이에서 공감 지수가 높을 작품이다. 영화 ‘다이버전트’ ‘헝거게임’처럼 키덜트를 타깃으로 한 문학 원작 영화 가운데 한국 상황과 가장 잘 맞아떨어지고, 한편으로는 상징성이 강해 현실을 잊고 다른 세계와 접속하기에 적합한 작품이기도 하다.

배꼽 잡는 코미디부터 숭고한 휴먼스토리까지
喜懼(쾌감과 두려움)/ 발타자르 코루마쿠르 감독의 ‘에베레스트’

인간의 시각, 관점을 벗어나 보면 인간이란 하릴없이 작은 피조물에 불과할지 모른다. 특히 자연 앞의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자연은 강인하며 공평하고도 잔혹하다. 영화 ‘에베레스트’는 총, 전쟁, 살인, 범죄 같은 자극적 요소가 전혀 없는데도 찌릿한 원초적 공포를 체험케 한다. 에베레스트가 가진 대자연의 위엄이 관객으로서의 인간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영화의 소재는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려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상업적 등반대 앞에 닥친 재난이다. 극한 상황에 직면한 주인공들 모습을 통해 인간 능력과 인간성의 한계를 생각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에 감동을 느끼게도 한다. 이 영화는 많은 부분을 실제 에베레스트에서 촬영했다. 모든 장면이 해발고도 5000m 이상에서 촬영된 것이기도 하다. 아이맥스 화면 위로 펼쳐지는 웅대한 자연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쾌감을 선사하며, 산과 마주한 인간의 발걸음은 수많은 이야기보다 깊은 사유의 기회를 준다. 영화 감상 이상의 대리체험을 가능케 하는, 현대 영상기술에 감사함을 느끼게 만드는 작품이다.

배꼽 잡는 코미디부터 숭고한 휴먼스토리까지




주간동아 2015.09.21 1006호 (p124~126)

  • 강유정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noxka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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