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54kg에 출전한 북한의 강영균 선수
북한 유도의 간판스타 계순희가 남한 선수와의 대결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답한 말이다. ‘속닥속닥하다’는 ‘도토리 키재기’라는 뜻. 부산아시아경기대회 개막과 함께 각 종목에서 만날 남북 선수들의 대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북한이 이번 대회에 사상 최대 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한 만큼 어느 대회보다 빈번한 남북대결이 예상된다.
스포츠에서의 남북대결은 ‘총칼 없는 전쟁’으로 간주돼왔지만, 이번 대회는 과거와 달리 ‘대결’보다는 ‘화합의 축제’라는 의미가 더 크다. 하지만 운동선수들에게 양보는 있을 수 없는 일. 특히 한국과 북한의 ‘메달밭’이 겹쳐 선수들의 ‘우정 대결’은 남북한 선수단의 전체 성적에도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한국 레슬링은 고전형이 강합네다.” 북한 레슬링 국제심판 김광수씨는 한국 레슬링에 대한 평가를 해달라는 질문에 ‘고전형’이 강하다고 답변했다. 자유형과 달리 상체만 공격할 수 있는 그레코로만형을 북한에선 고전형이라고 부른다. 1998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리스트로 북한레슬링 자유형의 ‘대들보’이던 진주동과 리영삼이 출전하지 않은 북한은 한국이 강세를 보여온 고전형에서 금메달을 노리고 있다. 북한 김영택 레슬링 총감독(한국의 감독직에 해당)은 “강영균(그레코로만형 55kg)에게 금메달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계순희 vs 이은희’ 유도 남북대결 빅 매치
강영균은 세계정상권 레슬러지만 당대 최고수였던 ‘레슬링 영웅’ 심권호(주택공사 코치)와 같은 체급에서 선수생활을 한 죄(?)로 ‘최고봉’을 한 번도 차지하지 못했다. 98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은메달)와 2000년 시드니올림픽(동메달)에서 심권호에게 뼈아픈 패배를 당해 금메달 획득에 실패한 것. 그렇다면 심권호가 빠진 이번 대회에서 강영균이 쉽게 무주공산을 차지할 수 있을까. 답은 ‘글쎄요’다. ‘심권호 콤플렉스’에 시달린 강영균이 맞설 상대는 바로 그 심권호를 누르고 대표선수로 선발된 정지현. 강영균이 승리한다면 심권호에 대한 ‘간접 설욕전’이 될 수 있을 듯하다. 강영균은 “무조건 이겨야지요. 금메달을 따갔습네다”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탁구는 전 종목 석권을 노리는 난공불락의 중국을 한국과 북한이 협공하는 형세. 남북한 모두 ‘만리장성’을 넘으려면 남북대결에서 먼저 승리해야 한다. 특히 여자탁구 복식은 남북이 모두 금메달을 노리고 있어 물러설 수 없는 접전이 예상된다. 한국은 류지혜-김무교조, 북한은 김현희-김향미조가 왕난-고얀조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9월24일 남북팀은 5월 중국 오픈 이후 4개월 만에 울산 동천체육관에서 만나 이야기꽃을 피웠지만, 서로가 보는 앞에서는 기술적인 훈련을 자제하는 등 전력 노출을 꺼렸다. 현정화 코치는 “북한 선수들을 오랜만에 만나 반갑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이 되기도 한다”며 “객관적인 전력상 열세인 탓에 최선을 다한다는 각오로 임하겠다”고 말했다.
“당연히 금메달이디요.” 선수촌 내 웨이트트레이닝장에서 ‘힘운동’(웨이트트레이닝)과 ‘한증’(샤워)을 하고 나온 북한 체조선수들은 한결같이 “우승이 목표”라고 말했다. 북한에서 가장 금메달에 접근한 선수는 ‘제2의 배길수’로 불리는 안마의 김현일. 김현일 외에 평행봉에서 메달을 노리는 정우철 정광엽 김정용 등이 다크호스다. 김정용은 “남북 선수들이 사이 좋게 개인전 금메달을 나눠 갖고, 단체전에선 북한이 금메달을 딸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맞서는 한국은 링의 김동화와 평행봉의 양태영, 철봉의 양태석 등이 유망주.
9월29일 부산 금정체육관에서 열린 북한 대 아랍에미리트 연합 농구경기에서의 북한 리명훈 선수의 경기 모습
전통적으로 북한의 강세 종목인 사격에서도 남과 북이 금메달을 놓고 다툼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한국의 강세 종목인 권총과 스키트에서 금메달을 목표로 하고 있다. 북한의 간판스타인 박남수 김정수는 물론이고 전력이 알려지지 않은 신예선수들도 모두 경계 대상. 한동규 북한 사격협회 서기장은 “경기 직전까지 선수들의 집중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데 모든 힘을 쏟고 있다”며 메달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북한은 내심 사격에서 2개 이상의 금메달을 노리고 있다.
구기종목 중에선 농구와 축구에서의 남북대결이 관심을 끈다. 농구 축구 모두 예선 성적에 따라 남북대결 성사 여부가 결정된다. 농구에선 리명훈(2m35)과 서장훈(2m7)의 대결이 ‘백미’가 될 듯. 국내 선수 중 키가 가장 큰 서장훈이 다윗이 돼 골리앗 리명훈과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하는 셈이다. 서장훈은 “작은 키를 기량으로 극복하겠다”고 말했다. 스피드와 기술에선 리명훈에 뒤질 게 하나도 없다는 것. 축구는 한국의 전력이 단연 우세하지만, 공은 둥글고 스포츠의 매력은 이변에 있다. 이 밖에 북한의 강세인 여자축구와 풀리그로 우승팀을 가리는 여자핸드볼 소프트볼 등에서도 남북대결은 메달을 따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