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세대는 세계 축구 강호를 상대해도 결코 주눅이 들지 않는다. 환호하는 이청용(왼쪽)과 이승렬.
2002년 월드컵 세대교체 터닝 포인트
4년 주기로 열리는 월드컵을 보면 향후 4년간 세계 축구의 전술적 흐름이 나타난다. 대륙과 국가를 불문하고 축구계의 세대교체도 월드컵에 맞춰(혹은 목표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2002년 한일월드컵이 계기였다. 지금처럼 33세 최고참 홍명보부터 21세 막내 박지성(당시 교토)까지 완벽한 틀을 이루고 있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은 인맥과 학맥, 지연에 따른 대표팀 선발을 막고, 자연스러운 세대교체를 이뤄냈다.
세대교체 결과 한국대표팀은 젊어졌다. 2010 남아공월드컵 최종 엔트리 23명을 기준으로 89년생은 기성용(셀틱), 이승렬(FC서울), 김보경(오이타) 3명이고, ‘+1(세)’로 범위를 넓히면 88년생 이청용(볼튼)까지 포함해 4명이나 된다. 엔트리 선정을 앞두고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해 유망주는 반드시 월드컵 본선에 데리고 가겠다”고 천명한 허정무 국가대표팀 감독의 최종 선택은 이승렬과 김보경이었다. 지난해 겨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명문 클럽 블랙번 로버스의 러브콜을 받았던 미드필더 구자철(제주)은 마지막 관문을 넘지 못하고 끝내 제외됐지만 아쉬움도 잠시,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대표팀에 선발돼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이들은 선배들과 출발부터 달랐다. “매일 빵과 우유를 줬기 때문에 축구를 시작했다”던 34세 안정환과 “축구가 운동 중에서 가장 좋아 택했다”고 입을 모으는 G세대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다. 이렇듯 이들 사이의 10년이 넘는 세월은 강산을 한 번 바꿨을 뿐 아니라 축구에 대한 인식까지 달라지게 했다.
“정말 놀랍죠. 우린 벌벌 떨었는데, 당최 이 녀석들은 두려움이 없으니까요.”
월드컵 개막을 앞둔 허정무호(號)가 파주 NFC에 소집됐을 때, 선수들의 훈련 장면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조영증 대한축구협회 기술국장은 이렇게 말했다. 월드컵 대표팀이 출범할 때부터 선수단을 인솔하고 있는 축구 원로 노흥섭 단장도 “요즘 애들은 항상 자신감과 의욕에 차 있다”고 맞장구쳤다.
그랬다. 이들은 선배 세대와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제아무리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0위권에 드는 내로라하는 강호를 상대한다고 해도 예전처럼 부딪히기도 전에 움츠러들거나 기가 죽는 경우는 없다. 홍명보 감독과 함께 올림픽대표팀을 이끄는 서정원 코치도 “후배들의 당당함이 부럽다”고 말한다. 단순한 세대차이 이상의 뭔가가 느껴진다는 의미다. 한국 축구계에서 ‘당돌한 아이’를 언급하면 톡톡 튀는 행동과 거침없는 발언으로 악명(?) 높았던 이천수(전 전남)가 뽑히지만 요즘의 G세대 선수들 역시 다를 바 없다. 물론, 누구와 견줘도 부족함 없는 실력으로 무장한 당당함과 자신감으로 대변되는 긍정적 측면이 크다.
이들은 과정은 조금씩 달랐어도 ‘글로벌’이란 공통분모로 묶인다. 호주(존 폴 칼리지)에서 축구 겸 어학연수를 했던 기성용, 중학교 중퇴를 감수하고 K리그 FC서울에 입단했다가 지난해 여름 볼튼에 둥지를 틀어 EPL에 성공리에 안착한 이청용, 걸출한 선배들을 뚫고 프로에서 농익은 활약을 펼친 이승렬, 지난해 20세 이하 청소년월드컵을 통해 이름을 알린 뒤 일본으로 떠난 김보경 등이 그렇다.
최소 10년간 한국 축구는 긍정적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그리스와 조별리그 1차전(2-0 한국 승)을 마친 뒤 현지 취재진과 인터뷰를 한 이청용은 “마치 연습경기를 치르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비록 “낮 경기를 치렀기 때문”이란 이유는 뺐지만 “다리가 후들후들거렸다” “어떻게 90분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눈앞이 캄캄했다” 등 선배 세대가 통상 해왔던 얘기가 전혀 없었던 점을 생각하면 대단히 고무적인 현상이다.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곧 성적으로 드러난다. 아니, 이미 결과로 입증되고 있다.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 여부는 나이지리아와 조별리그 3차전이 끝나야 알 수 있겠지만 허정무호는 앞선 그리스, 아르헨티나 2차례 경기를 통해 잠재력과 성장 가능성을 확인시켰다. 지금까지만 놓고 봐도 충분히 갈채를 받을 만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지만 축구란 ‘상대와 나를 알고’ ‘실력을 갖춰야’ 용감해질 수 있는 종목이다. ‘할 수 없다’던 인식을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 작성을 이루며 ‘할 수 있다’로 바꿨을 때부터 가진 긍정의 마인드는 2006 독일월드컵 1승1무1패 선전으로 한층 발전했고, 이번에도 한 단계 성장했다.
G세대는 앞으로 최소 10년간은 한국 축구를 책임질 것으로 보인다. 이름값 높은 상대 선수들을 두고 과감한 드리블과 영리한 플레이로 개인기 돌파를 시도하고 슛을 때리는 장면에서 희망을 엿볼 수 있다. 멈칫하는 경우도 없다. 물론 졌다고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지도 않는다. 이들에게 축구란 ‘즐거움’과 함께 부·명예까지 주는 일종의 직업일 뿐,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린 일본에게 지면 현해탄에 몸을 던져야 하는 줄 알았다”는 선배들의 사고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물론 이들이 혼자서 큰 것은 아니다. 중간 세대의 역할도 컸다. 과거 일방적인 지시 속에서 이뤄졌던 대표팀 내 엄격하고 엄정한 틀은 허 감독이 선임한 ‘캡틴’ 박지성에 의해 깨졌다. G세대라는 명칭보다는 X세대, Y세대가 좀 더 어울리는 박지성이지만 일방통행식 강제성과 수직성을 버린 그의 수평적 리더십은 후배들이 ‘믿고 따라올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박지성이 오래 해외생활을 한 까닭에 ‘깨어 있다’는 점도 큰 도움이 됐다.
후배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면 이를 언제든 받아들일 준비가 된 선배들의 포용력과 그에 따른 화합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한국 축구의 무형적 자산이다. “대표팀이 모이면 형들하고 ‘마트 털기(게임 등을 통한 일종의 내기)’를 자주 한다”는 이승렬의 한마디가 근래 대표팀의 분위기를 증명한다. 한국 축구의 밝은 내일을 예감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