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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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투기 살리기 ‘당근’이 필요해”

한국 파이터들 지난해 부진의 늪 … 생업과 운동 병행에 경기력 추락

  • 김대환 XTM 종합격투기 해설위원 fightingbear@hanmail.net

    입력2009-01-13 15: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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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투기 살리기 ‘당근’이 필요해”

    2008년 한국 파이터로는 거의 유일하게 선전을 거듭한UFC 한국 최초 격투가 김동현(아래).

    1993년 4월 K-1 대회가 일본 후지TV에서 방영되자 일본의 수많은 방송 전문가들은 의문을 제기했다.

    “격투기가 지상파 방송에? 설마….”

    “그래 봤자 심야방송이니 오래가진 못할 거야.”

    이후 프라이드 대회가 생겨났을 때도 반응은 대동소이했다. 방송 관계자들은 프라이드의 도산 시점에 대한 예측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 한창 흥행 불씨를 지피던 UFC(Ultimate Fighting Champion-ship)를 지켜본 존 매케인(당시 애리조나주 상원의원)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외쳤다. “Human cockfighting(인간 닭싸움)!” 오랜 복싱 팬이던 그의 눈에 비친 UFC는 잔인한 피의 잔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그러한 시각을 공유한 정치인들의 압박 때문에 격투기는 미국 전역에서 오랜 동안 암흑기를 겪었다.



    최홍만·윤동식·데니스 강 줄줄이 쓴잔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 초창기 정치인들의 반발이나 방송 관계자들의 의문을 비웃기라도 하듯 격투기는 전 세계 팬들이 열광하는 화끈한 스포츠로 자리매김했다. 북미, 아시아, 유럽, 오세아니아 등 전 세계 곳곳에서 격투기에 열광하는 팬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격투기 붐을 이끌고 있는 두 축은 미국과 일본이다. K-1과 프라이드로 유명한 일본이 전통의 강호라면, UFC로 대표되는 미국은 스포츠 왕국답게 이미 격투 스포츠의 중심을 차지한 새로운 맹주다. 미국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야구에서처럼, 미국과 일본의 격투기 무대에서도 어느덧 적지 않은 수의 한국 파이터들이 활약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 파이터들은 어떻게 싸웠을까.

    한국 파이터들의 2008년 성적은 무너진 주가처럼 급하락세였다. 최홍만의 부진이 가장 눈에 띈다. 군 입대와 훈련소 퇴소, 뇌종양 제거 수술 등 복잡한 개인사를 잔뜩 치른 최홍만은 재기전부터 패배를 기록하며 예전 같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연말 K-1 다이너마이트 무대에서도 종합격투기로 무대를 바꿔 도전했지만 결국 ‘하이킥의 달인’ 미르코 크로캅의 벽을 넘지 못하고 1라운드 TKO로 무너졌다.

    최홍만뿐 아니라 K-1 헤비급 무대에 나선 한국 파이터들도 대부분 초토화됐다. ‘원조 골리앗’ 김영현과 ‘태권보이’ 박용수가 아시아 GP 무대에서 나란히 탈락했고, 김경석과 송민호 등 오프닝 경기에 나섰던 선수들도 모두 패했다.

    “격투기 살리기 ‘당근’이 필요해”

    뇌종양 제거 수술 이후 연패의 늪에 빠진 최홍만.

    베이징올림픽이 한창이던 2008년 8월, 하와이에서 열린 미국 GP 무대에서 놀라운 기량을 선보이며 준우승을 차지한 ‘늦깎이 파이터’ 랜디 김의 투지 넘치는 경기가 유일한 선방으로 꼽힌다.

    70kg 이하 미들급 입식타격 파이터들이 자웅을 겨루는 K-1 맥스(MAX) 무대에서도 한국 선수들의 부진은 이어졌다.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 예선을 가볍게 제패하며 야심차게 세계의 문을 두드렸던 ‘치우천황’ 임치빈이 일본의 신예 기도 야스히로에게 1라운드 40초 만에 KO로 무너지는 모습은 큰 충격이었다. 복싱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반납하고 야심차게 K-1 제패를 선언했던 지인진 역시 데뷔전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경기 내용은 기대에 한참 못 미친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그라운드 기술이 허용되는 종합격투기 무대에서도 한국 파이터들은 줄줄이 무너졌다. 프라이드를 주름잡던 ‘슈퍼 코리안’ 데니스 강과 국민 파이터로 자리잡은 ‘암바 대마왕’ 윤동식은 모두 드림(DREAM : K-1의 새로운 종합격투기 브랜드)의 초대 미들급 챔피언 게가드 무사시에게 무릎을 꿇었다.

    한국인 최초의 프라이드 파이터로 이름을 날리던 최무배는 센고쿠(일본의 새로운 종합격투기 브랜드) 첫 무대에서 고배를 마셨다. 격투 황제 에밀리아넨코 표도르의 팀에서 전지훈련까지 소화한 이태현은 네덜란드의 강자 알리스타 오브레임에게 허무하게 KO로 무너진 뒤 결국 씨름무대 복귀를 선언했다. 정부경 김대원 방승환 이광희 권아솔 등의 신예들도 경험의 차이를 실감하며 패장 신세로 한국에 돌아왔다.

    전반적인 부진 속에서도 승전보를 전한 선수는 K-1 드림의 추성훈과 UFC에 진출한 김동현이다. 이 둘은 각각 2연승을 기록하며 2008년 한국 파이터의 자존심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추성훈은 상대의 기량이 수준 이하였다는 평가를, 김동현은 맷 브라운 전에서의 고전 때문에 레벨업이 절실하다는 비판을 들었다.

    이 같은 한국 파이터들의 부진 이유를 놓고 팬들 사이에서는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근성 부족, 기술 결여, 경험 차이, 숙련된 지도자의 부재 등 다양한 견해가 쏟아져나오고 있는 것. 하지만 어찌 보면 이것들은 모두 부수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아직 제대로 된 시장이 형성되지 않아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격투산업 종사자들에게 돈이라는 ‘당근’이 전혀 돌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이 격투 스포츠의 강대국으로 군림하는 이유는 바로 독자적인 수익모델이 확립돼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소위 ‘돈 내고 방송 보는’ PPV 시스템이란 금광이 존재한다. 팬들은 UFC가 방송되는 토요일 밤이면 친구 집에 맥주를 사들고 모여 PPV 생중계를 즐긴다. PPV 한 개가 팔릴 때마다 44.95달러(HDTV는 49.95달러)의 돈이 UFC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올해 팔려나간 PPV만 해도 무려 500만 개, 여기에 해외 방송 판권과 입장 수익금까지 감안하면 총수익은 어마어마하다.

    일본은 이런 PPV 시스템은 미약하지만 지상파 방송에서 격투기를 쉽게 볼 수 있다는 강점을 지닌다. K-1을 예로 들면, K-1 월드 GP 시리즈는 후지TV에서, K-1 맥스와 드림은 TBS에서 방영된다. 우리나라로 치면 MBC와 SBS에서 격투기가 방영되고 ‘무한도전’ 같은 프로그램에 파이터들이 등장하는 셈이다. 이런 지상파 방영은 자연히 막대한 방영권료와 스폰서 지원으로 이어진다.

    “격투기 살리기 ‘당근’이 필요해”

    2007년과 지난해 초 승승장구하던 윤동식(좌측)은 지난해 6월 드림4 미들급 그랑프리에서 게가드 무사시에 패해 상승세에 제동이 걸렸다. K-1과 계약이 끝난 추성훈(우측)은 현재 다른 단체로의 이적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이런 돈이 격투산업 곳곳에 흘러 들어가 든든한 토양이 됨으로써 파이터들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돕는다. 운동만 잘하면 생활이 안정되고, 자국에서 1등이 되면 부자가 될 수 있는 구조가 이미 미국과 일본에서는 뿌리내렸다는 얘기다.

    외국의 격투기 팬들은 세계의 메이저 격투대회를 케이블TV에서 공짜로 시청할 수 있는 한국을 천국이라 부른다지만, 격투산업 종사자들에게 한국은 지옥에 가깝다.

    불법 다운로드 때문에 영화관도 안 가는 판에 PPV는 어불성설이고, 지상파 입성 역시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렇다고 관중석이 꽉 차는 것도 아니다. 팬들 대다수가 ‘공짜로’ TV를 통해 K-1이나 프라이드를 보며 흥미를 갖기 시작했기 때문에 입장권 구매 등 어떤 부분에서도 지갑을 열려 하지 않는다. 인기는 많지만 정작 국내 시장에 돈이 쏟아지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공짜팬 많은 한국은 지옥

    국내 파이터들의 여건은 말이 아니다. 기량을 논하기 이전에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파이터와 코치들이 생업에 쫓겨 매일 2시간 집중 훈련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타고난 신체조건에 든든한 트레이너와 스폰서를 갖추고 하루에 7~8시간 훈련하며 다양한 무대에서 싸워온 외국 파이터들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굳이 한국 파이터들의 연패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아무리 K-1이나 UFC에서 활약하는 해외파라 해도 한국 파이터들은 대부분 이러한 어려움을 안고 있다. 로컬 챔피언만 돼도 지역을 대표하는 회사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미국이나, 스폰서를 자처하며 때마다 격려금을 전달하고 일부러 관련 선수의 상품을 구입하는 격투기 팬이 존재하는 일본은 아예 다른 세상 얘기다.

    하지만 한국 파이터들은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만 바라듯 시장이 형성되기만을 무작정 기다릴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종목 특성상 선수 생명이 길지 않아 잘못하면 아무런 소득 없이 애꿎은 젊음만 흘려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국 파이터들의 잠재력이 시장 상황과는 별개로 상당히 높다는 사실이다. 일본 격투산업 관계자들은 “한국 파이터들은 기술의 세밀함은 좀 떨어지지만, 정신력이 좋고 기본적인 레슬링과 타격 베이스가 뛰어나다”고 입을 모은다. 레슬링 유도 복싱 등 투기 종목에 유난히 강한 전통 위에 좀더 풍부한 종합격투기 경험이 더해진다면 어느 순간 세계 수준에 성큼 다가설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져볼 만하다.

    “격투기 살리기 ‘당근’이 필요해”

    한국 파이터의 선두주자인 데니스 강(가운데)과 김동현(오른쪽)이 각각 1월과 2월 UFC에 출전해 2009년 개막을 알린다.

    이미 한국 파이터들은 숨 돌릴 틈도 없이 2008년의 부진을 털고 올해의 레이스에 돌입했다. 스타트의 주인공은 ‘부산 중전차’ 최무배. 센고쿠에서 13전 전승의 신예 강자 데이브 허먼과 사투 끝에 역전 TKO승을 거뒀다. 뚝심에선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대한 사나이 특유의 투지를 보여준 경기였다.

    최무배의 상승세를 이어받을 사람은 데니스 강과 김동현이다. 이 둘은 각각 1월17일, 2월1일에 열리는 UFC 93, 94대회에 출전한다. 스피릿 MC와 프라이드, K-1을 거쳐 UFC에 새 둥지를 튼 데니스 강이 과연 명성을 이어갈 수 있을지, 최초의 한국인 UFC 파이터인 김동현이 가장 두꺼운 선수층으로 유명한 웰터급의 베테랑 카로 파리시안을 어떻게 상대할지 팬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K-1에선 3월 요코하마 대회 출전이 확정된 최홍만에게 시선이 집중된다. 비록 연패의 늪에 빠져 있긴 하지만 그의 무시무시한 체격과 괴력은 여전히 상대 선수에게 큰 부담이다. 올해에는 종합격투가로서의 활동도 본격적으로 병행하겠다고 밝힌 그의 2009년 행보를 미리 점쳐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K-1 맥스에서는 ‘인텔리 파이터’ 이수환이 2009년의 기대주로 꼽힌다. 월드 맥스 무대에서 승리한 경험을 가진 유일한 한국 파이터인 그는 뛰어난 신체조건과 남다른 근성으로 K-1 관계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해 11월 전일본킥복싱대회에 출전해 K-1 베테랑 오자키 게이지를 꺾으며 상승세를 뽐냈던 이수환은 올해가 자신의 해라며 기세등등하다.

    피땀 흘리며 훈련하는 기대주 여럿

    이 밖에 멍석만 깔리면 뛸 준비가 된 새 얼굴도 여럿 있다. 지난해 센고쿠 대회에서 유도 금메달리스트 출신의 강호 파웰 나스툴라를 TKO로 물리치며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무서운 신인’ 양동이, ‘더 칸’ 대회에서 한때 K-1을 호령하던 동구권의 강자 알렉세이 이그나쇼프와 치열한 승부를 펼쳤던 한국 입식타격 헤비급의 기대주 유양래, 세계 최강 표도르, 그의 동생 알렉산더와 한솥밥을 먹으며 날로 기량이 상승하고 있는 종합격투기 헤비급 강자 이상수 등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모두 ‘포스트 최홍만·추성훈’을 꿈꾸고 있다.

    올해 한국의 격투기 시장이 급성장하거나 한국인 K-1 혹은 UFC 챔피언이 나올 확률은 아주 낮다. 하지만 한국 파이터들은 프로축구 리그가 아예 존재하지 않던 시절 독일 분데스리가를 ‘접수’한 차범근이나 메이저리거의 꿈을 이루고 최고의 스타로 자리매김한 박찬호의 신화를 격투계에서도 재현해 보이겠다는 각오로 오늘도 피땀 흘리며 훈련에 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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