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 때마다 노란색 꼬마전등이 도심의 야경을 장식해왔다. ‘피터 팬’ 동화에 나오는 마법 가루처럼 밤마다 황금색 작은 불빛들이 겨울나무와 빌딩 위에서 반짝였다. 그런데 이번 연말연시 서울 중심가의 고급 호텔과 백화점에서는 꼬마전등이 흰색으로 바뀌었다. 황금가루 대신 흰 눈이 내리는 듯하다. 소복이 쌓인 함박눈이기보다 칼바람에 흩날리는 싸라기눈 같은 느낌이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창백한 불빛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마음이 편치 않다. 가뜩이나 주가도, 원화가치도, 일자리도, 경제지표도 줄줄이 떨어지는 마당에 꼬마전등까지 불빛을 떨어뜨리고 있으니 도대체가 즐거운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지난 가을 친구들과의 저녁 모임에서 재테크가 화제에 올랐다. 한 친구의 일성(一聲)에 모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때는 다른 건 다 필요 없지. 자리 잘 지키는 게 최고 아닌가.”
진작부터 택시기사, 자영업자, 상인들은 “경기가 외환위기 때만 못하다”는 말을 해왔다. 가계소비 데이터들도 소비자들이 2008년 봄부터 경제가 심상치 않다고 느끼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2008년 2/4분기 소비자들은 당시 경제여건이 외환위기가 본격화하던 1997년 겨울과 유사하다고 느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미국의 5대 투자은행 가운데 하나인 베어스턴스사가 파산하는 사건이 있긴 했지만, 아직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기 전이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실물경제가 얼어붙기 전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당시 경제여건을 외환위기 초입 단계와 비슷하다고 인식했으니 놀라운 일이다.
외출형 소비 줄고 재택형 소비 증가
2008년 2/4분기 가계소비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먼저 가계소비는 전 분기 대비 0.16%나 감소했다. 지난 30년, 즉 1978년부터 현재까지 120개 분기 동안 가계소비가 감소한 분기는 13차례에 그친다. 그중 일시적인 감소는 단 두 번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모두 소비가 연속적으로 감소하던 기간이었다. 이는 2008년 2/4분기의 소비 감소가 연속적인 소비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연속적 소비 감소는 과거 30년간 세 차례 있었다. 2차 오일쇼크 직후인 1980년과 외환위기 와중이던 1997년 말~98년 초, 그리고 카드 사태로 신용불량자가 폭증한 2002년 겨울~2004년 봄이다. 세 번 모두 우리 경제가 홍역을 치르던 때였다. 그러므로 가계소비가 감소했다면 이는 우리 경제가 큰 어려움에 빠진다는 경고일 수 있다.
물론 2008년 3/4분기 가계소비는 전기 대비 0.07% 증가해 감소세가 지속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0.07%라는 증가율은 미미한 값이어서 안정적 증가라고 보긴 어렵다. 더욱이 지난 11월 산업생산은 1970년 통계 작성 이래 최대 폭으로 급감했고, 각종 소비지수도 큰 폭으로 떨어졌다. 이런 점으로 미뤄볼 때 2008년 4/4분기 가계소비도 플러스 증가로 나오긴 사실상 어렵지 않을까 싶다.
2008년 2/4분기 가계소비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한 가지는 소폭의 소비 감소와 함께 소비 패턴의 변화가 감지된다는 점이다. 지난해 4~6월 동안 해외소비를 비롯해 교통비, 오락, 문화, 의류·신발, 음식, 숙박 등 ‘집 밖’에서 쓰는 돈이 줄어들었다. 그 대신 통신, 식료품·음료품 등 주로 ‘집 안’에서 쓰는 지출은 늘었다. 즉 외출형 소비가 줄고 재택형 소비가 증가한 것이다. 외식하는 대신 집에서 밥을 해먹고, 공연 관람이나 패키지여행을 하는 대신 방 안에서 인터넷 서핑을 즐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소비자의 행동반경이 해외에서 국내로, 집 밖에서 집 안으로 축소된 것이다.
이런 소비 패턴과 가장 유사한 때는 지난 30년 중 1997년 겨울이었다. 우리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경기가 바야흐로 급전직하하던 그때, 가장 많이 줄어든 5대 지출항목과 2008년 2/4분기에 가장 많이 줄어든 5대 지출 항목은 정확히 일치한다. 또한 그때 가장 많이 늘어난 3대 소비 품목 가운데 두 가지가 2008년 2/4분기에도 가장 눈에 띄게 소비가 증가한 품목에 속한다. 이는 지난 봄에 이미 소비심리가 외환위기 초입 단계와 비슷하게 위축됐음을 의미한다.
소비심리 위축이란 곧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다. 일자리를 잃지 않을지, 벌이가 줄지 않을지, 목돈 필요한 일이 갑자기 생기지 않을지 등의 불안감이다. 이런 경우 공돈이 생기면 일단 저축해놓으려는 심리가 생긴다. 이는 불확실성과 맞닥뜨렸을 때 거의 본능적으로 나오는 인간의 심리 반응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예비적 동기’라고 부른다.
소비자들이 이런 불안감에 휩싸여 있을 경우 감세정책은 경기부양 효과를 내기 어렵다. 세금이 줄어든 만큼 저축을 더 하면 더 했지 소비를 늘리지는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감세정책으로는 경기부양 한계
1998년 당시에도 IMF 대표단이 우리 정부에 경기부양을 위한 감세를 요구한 적이 있다. 그들은 우리 정부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기세등등했지만, 감세보다는 재정 지출의 경기부양 효과가 더 빠르고 확실하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제시하자 감세 요구를 즉시 접었다.
이때 이슈는 ‘유류세 감세’였다. 그런데 지금 이슈는 유류세보다도 경기부양 효과가 적은 ‘소득세 감세’다. 더구나 지금의 소득세 감세는 한계소비 성향(소득 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소비 변동 정도)이 낮은 고소득자에게 세 부담 경감 효과가 집중되도록 설계돼 있다. 감세의 경기부양 효과가 더욱 작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1조4000억원 규모로 추정되는 소득세 감세안은 지난 12월 중순 국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그 시행 시기를 경기가 회복될 때까지 연기하는 것이 어떨까. 감세 시행 연기로 더 걷히게 된 세금을 서민층을 위한 재정 지출로 돌린다면 경기부양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또 부자를 바라보는 눈길이 조금이나마 부드러워질 테고 사회 통합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새해 첫 달에는 도심 야경을 장식하는 꼬마전구의 흰 불빛이 을씨년스러운 싸라기눈이 아닌 푸근한 함박눈으로 느껴졌으면 좋겠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창백한 불빛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마음이 편치 않다. 가뜩이나 주가도, 원화가치도, 일자리도, 경제지표도 줄줄이 떨어지는 마당에 꼬마전등까지 불빛을 떨어뜨리고 있으니 도대체가 즐거운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지난 가을 친구들과의 저녁 모임에서 재테크가 화제에 올랐다. 한 친구의 일성(一聲)에 모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때는 다른 건 다 필요 없지. 자리 잘 지키는 게 최고 아닌가.”
진작부터 택시기사, 자영업자, 상인들은 “경기가 외환위기 때만 못하다”는 말을 해왔다. 가계소비 데이터들도 소비자들이 2008년 봄부터 경제가 심상치 않다고 느끼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2008년 2/4분기 소비자들은 당시 경제여건이 외환위기가 본격화하던 1997년 겨울과 유사하다고 느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미국의 5대 투자은행 가운데 하나인 베어스턴스사가 파산하는 사건이 있긴 했지만, 아직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기 전이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실물경제가 얼어붙기 전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당시 경제여건을 외환위기 초입 단계와 비슷하다고 인식했으니 놀라운 일이다.
외출형 소비 줄고 재택형 소비 증가
2008년 2/4분기 가계소비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먼저 가계소비는 전 분기 대비 0.16%나 감소했다. 지난 30년, 즉 1978년부터 현재까지 120개 분기 동안 가계소비가 감소한 분기는 13차례에 그친다. 그중 일시적인 감소는 단 두 번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모두 소비가 연속적으로 감소하던 기간이었다. 이는 2008년 2/4분기의 소비 감소가 연속적인 소비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연속적 소비 감소는 과거 30년간 세 차례 있었다. 2차 오일쇼크 직후인 1980년과 외환위기 와중이던 1997년 말~98년 초, 그리고 카드 사태로 신용불량자가 폭증한 2002년 겨울~2004년 봄이다. 세 번 모두 우리 경제가 홍역을 치르던 때였다. 그러므로 가계소비가 감소했다면 이는 우리 경제가 큰 어려움에 빠진다는 경고일 수 있다.
물론 2008년 3/4분기 가계소비는 전기 대비 0.07% 증가해 감소세가 지속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0.07%라는 증가율은 미미한 값이어서 안정적 증가라고 보긴 어렵다. 더욱이 지난 11월 산업생산은 1970년 통계 작성 이래 최대 폭으로 급감했고, 각종 소비지수도 큰 폭으로 떨어졌다. 이런 점으로 미뤄볼 때 2008년 4/4분기 가계소비도 플러스 증가로 나오긴 사실상 어렵지 않을까 싶다.
2008년 2/4분기 가계소비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한 가지는 소폭의 소비 감소와 함께 소비 패턴의 변화가 감지된다는 점이다. 지난해 4~6월 동안 해외소비를 비롯해 교통비, 오락, 문화, 의류·신발, 음식, 숙박 등 ‘집 밖’에서 쓰는 돈이 줄어들었다. 그 대신 통신, 식료품·음료품 등 주로 ‘집 안’에서 쓰는 지출은 늘었다. 즉 외출형 소비가 줄고 재택형 소비가 증가한 것이다. 외식하는 대신 집에서 밥을 해먹고, 공연 관람이나 패키지여행을 하는 대신 방 안에서 인터넷 서핑을 즐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소비자의 행동반경이 해외에서 국내로, 집 밖에서 집 안으로 축소된 것이다.
이런 소비 패턴과 가장 유사한 때는 지난 30년 중 1997년 겨울이었다. 우리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경기가 바야흐로 급전직하하던 그때, 가장 많이 줄어든 5대 지출항목과 2008년 2/4분기에 가장 많이 줄어든 5대 지출 항목은 정확히 일치한다. 또한 그때 가장 많이 늘어난 3대 소비 품목 가운데 두 가지가 2008년 2/4분기에도 가장 눈에 띄게 소비가 증가한 품목에 속한다. 이는 지난 봄에 이미 소비심리가 외환위기 초입 단계와 비슷하게 위축됐음을 의미한다.
소비심리 위축이란 곧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다. 일자리를 잃지 않을지, 벌이가 줄지 않을지, 목돈 필요한 일이 갑자기 생기지 않을지 등의 불안감이다. 이런 경우 공돈이 생기면 일단 저축해놓으려는 심리가 생긴다. 이는 불확실성과 맞닥뜨렸을 때 거의 본능적으로 나오는 인간의 심리 반응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예비적 동기’라고 부른다.
소비자들이 이런 불안감에 휩싸여 있을 경우 감세정책은 경기부양 효과를 내기 어렵다. 세금이 줄어든 만큼 저축을 더 하면 더 했지 소비를 늘리지는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생활용품을 헐값에 내놓은 점포 앞에서 한 여성이 물건을 살피고 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강한 요즘, 소비자들은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는다.
1998년 당시에도 IMF 대표단이 우리 정부에 경기부양을 위한 감세를 요구한 적이 있다. 그들은 우리 정부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기세등등했지만, 감세보다는 재정 지출의 경기부양 효과가 더 빠르고 확실하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제시하자 감세 요구를 즉시 접었다.
이때 이슈는 ‘유류세 감세’였다. 그런데 지금 이슈는 유류세보다도 경기부양 효과가 적은 ‘소득세 감세’다. 더구나 지금의 소득세 감세는 한계소비 성향(소득 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소비 변동 정도)이 낮은 고소득자에게 세 부담 경감 효과가 집중되도록 설계돼 있다. 감세의 경기부양 효과가 더욱 작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1조4000억원 규모로 추정되는 소득세 감세안은 지난 12월 중순 국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그 시행 시기를 경기가 회복될 때까지 연기하는 것이 어떨까. 감세 시행 연기로 더 걷히게 된 세금을 서민층을 위한 재정 지출로 돌린다면 경기부양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또 부자를 바라보는 눈길이 조금이나마 부드러워질 테고 사회 통합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새해 첫 달에는 도심 야경을 장식하는 꼬마전구의 흰 불빛이 을씨년스러운 싸라기눈이 아닌 푸근한 함박눈으로 느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