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6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K리그 올스타와 유벤투스 FC의 친선경기에서 벤치에 앉아 있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오른쪽). [동아DB]
세계 유수 빅클럽, 경기 준비는 조기축구 수준
이윽고 유벤투스 선수단이 입국하기로 한 시간이 다가왔다. 인천국제공항 현장은 이미 팬들로 바글바글한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런데 후속 이야기는 요원했다. 예정대로 도착하지 않은 탓. 결국 예정된 정오보다 3시간 가까이 지나서야 입국장 문이 열렸다. 싱가포르, 중국 등지를 돌고 온 유벤투스 선수단은 초췌해 보였고, 팬 사인회 후 경기장으로 가는 숨 막히는 일정에 돌입했다.이는 연달아 쓰러지는 도미노의 서막이었다. 행사를 주최한 로빈 장 ‘더 페스타’ 대표에 따르면 호날두는 컨디션 관리 차원에서 사인회에 불참했다. 경기에 집중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연 정도는 점점 심해졌다. 당초 경기 시작 1시간 반 전인 오후 6시 30분에는 마포구 상암동에 다다르기로 했던 이들이 서울 용산구 소재 그랜드하얏트서울 호텔에서 나선 건 오후 6시를 넘어서였다. 유벤투스 선수단은 짧은 시간에도 한국을 제대로 체험했다. 금요일 밤 교통체증이 어떤지 몸소 겪었다.
버스 3대로 나눠 이동한 전원이 하차한 건 경기 시작 시간이 지난 오후 8시 14분. 시작 휘슬이 울린 건 예정보다 1시간 가까이 지난 뒤였다. 아무리 하찮은 경기라도 몸을 10분밖에 풀지 않는 경우는 없다. 세계적인 구단이 아마추어축구 선수단보다 못한 대우를 받을 줄이야. 갈수록 가관이었다. 뭔가 조급해 보이던 유벤투스는 하프타임을 10분도 채 보내지 않은 채 후반전을 준비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밝혀졌다. 기자석에서는 “유벤투스 출국 시각이 새벽 1~2시쯤”이라는 말이 돌았다. 비행시간을 맞추고자 경기를 단축하는 어이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운집한 6만5000여 명 팬이 참고 또 참은 건 호날두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호날두를 볼 수만 있다면!’ 80~90% 습도에 기온까지 30도를 넘나든 이날 서울월드컵경기장은 거대 찜질방이었는데,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호날두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후반 들어서도 기약이 없었다. ‘설마 안 나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엄습했고, 20분여를 남겨두고선 팬들이 직접 “호날두”를 연호했다. 그럼에도 호날두는 마지막까지 몸도 풀지 않은 채 굳은 표정으로 빠져나갔다. 이에 실망한 일부는 라이벌 ‘리오넬 메시’를 찾기까지 했다.
이 당혹스럽고도 어처구니없는 일이 불과 몇 시간 동안 모두 벌어졌다. 12년 만에 방한한 호날두를 목 빠져라 기다린 이들로선 믿기지 않을 하루였다. 이번 일이 한국 축구에 미친 타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적어도 빅클럽 초청이라는 이벤트가 앞으로 쉬이 이뤄지기 어려울 듯하다.
세계 최고 팀이 선사한 최고의 무례
K리그 올스타와의 친선경기에 근육 문제를 이유로 결장한 유벤투스 FC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7월 27일 이탈리아로 돌아간 뒤 러닝머신에서 운동하고 있는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려 한국 팬들을 기만했다는 논란을 빚고 있다. [호날두 인스타그램 캡처]
시선이 향한 건 호날두의 출전 시간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9년 전 일을 똑똑히 기억하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당시 FC 바르셀로나는 세계 최고로 발돋움해가는 메시와 함께 방한했다. 메시의 몸 상태를 염려한 주제프 과르디올라 당시 감독이 하루 전 출전 불가를 시사했고,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들끓었다. 15분간 출전해 2골을 몰아친 메시의 강렬한 퍼포먼스로 어느 정도 매듭지어졌지만, 그 짧은 시간에 취소 표가 줄지어 나오곤 했다. 이번 호날두 ‘노쇼’ 사태로 재평가되긴 했어도, 바르셀로나 투어 역시 그리 호평받은 행사는 아니었다.
이에 장 대표가 직접 입을 열었다. 진흙탕 싸움이 돼버린 현재 더 페스타 측은 억울하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표명했다. 어떤 사안은 유벤투스 쪽에, 또 어떤 사안은 한국프로축구연맹 쪽에 떠넘기는 모양새이기도 하다. 단, 장 대표가 방한 일주일 전 한 언론사와 인터뷰에서 “계약서상 호날두가 최소 45분간 출전하기로 보장받았다”고 밝힌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이번 사태를 불러일으킨 가장 큰 포인트다.
이 모든 것의 발단은 ‘무리한 추진’이었다. 유벤투스 측은 7월 27일 경기가 K리그2의 일정으로 불가하다는 답을 받자, 26일 당일 행사라도 강행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아무리 세계적인 구단이라도 수익모델은 확실히 이용한다. 8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정규 시즌, 그리고 6월 말까지 선수단 휴가. 이들은 7월 2~3주간 프리시즌 투어를 명목으로 수금에 나선다. 아시아, 북미, 호주 등지를 돌며 거액을 가져간다. 유벤투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푼이라도 더 벌고자 12시간도 채 안 되는 살인 스케줄을 자처했다.
최악인 점은 방문지에 대한 기본 예의가 부족했다는 것. 위약금은 피치 못할 사정을 보상하기 위한 조항이다. 하지만 유벤투스는 지불할 여력이 있으면 입맛대로 계약을 파기할 수 있는 수단으로 쓰겠다고 나선 셈이다. 한국을 얼마나 무시하는지를 보여준 단적인 예였다. 전·후반과 하프타임을 각각 40분과 10분으로 줄이자는 일방적 주장, 또 차량 이동 시 경찰 에스코트 등을 요구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계약으로 약속한 부분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마당에, 주최 측에서 제대로 된 요구를 담아냈을 리 없다.
여기에 구단 위에 군림해 제멋대로인 슈퍼스타라는 작자까지. 호날두는 이날 끓는 기름 같은 관객들의 분통에 불을 댕겼다. 혹여나 부상을 우려해 출전을 피했다면 하다못해 벤치에서 터널까지 이동하는 동선 중 팬들에게 제스처라도 취할 수 있었다. 또 짤막한 인터뷰로 팬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로 복귀한 뒤 “Nice to back home(집에 돌아와 좋다)”이라고 쓴 개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그저 공감 능력 결여를 인증하는 꼴밖에 안 됐다. 평소 언행으로 쌓아온 선한 이미지도 허울이었다. 결국엔 ‘내 기분이 먼저’. 책임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일종의 모독이었다.
가장 큰 피해자는 관중
경기 시작 10분을 앞두고 주최 측은 유벤투스 FC의 사정으로 경기 시작이 지연되고 있음을 서울월드컵경기장 전광판과 방송을 통해 알렸다. [동아DB]
관중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일찌감치 자리를 뜨는 팬들이 적잖았고 “호날두가 왜 안 나오냐”며 우는 아이 팬들까지 보였다. 이탈리아는 물론 전 세계 매체가 이번 일을 보도하며 사태의 심각성을 전하고 있다. 물론 유벤투스 내부적으로도 한국에서의 물의를 심각하게 여길지는 의문이다. 구단 차원에서 장 대표에게 사과 메시지를 전해왔다지만 그조차도 사실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적어도 기자회견장에서 “정 호날두가 보고 싶다면 이탈리아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드리겠다”던 마우리치오 사리 감독의 발언은 나와선 안 됐다. 공손한 농담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어디 너스레나 떨 상황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