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수렵보좌관’ 래리. [AP=뉴시스]
총리관저 한 귀퉁이에서 이를 심드렁하게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총리관저 수석수렵보좌관(Chief Mouser to the Cabinet Office)’이다. 제법 거창해 보이는 직함이지만 Mouser는 ‘쥐잡이’를 뜻한다. 총리관저를 지키는 수석쥐사냥꾼이라는 의미니, 올해 열두 살 된 수고양이 래리를 가리킨다.
다우닝가의 고양이들
6월 영국을 국빈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부부와 테리사 메이 당시 영국 총리 부부가 기념촬영하는 모습을 왼쪽 창문턱에 앉은 ‘수석수렵보좌관’ 래리가 바라보고 있다. [AP=뉴시스]
의외로 수렵보좌관의 역사는 오래됐다. 의회와 가까워 총리관저(10번지)와 재무장관관저(11번지·18세기까지 재무장관이 총리 역할을 맡음)가 위치한 다우닝가에서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헨리 8세 때 재무장관을 맡았던 토머스 울지 추기경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다 정부의 세금 지출과 연관돼 정부 문서에 공식 등장한 것은 1929년 6월이다. 당시 총리관저 예산을 담당한 재무부 관료 A. E. 밴햄이 쥐 퇴치를 위해 “하루 1페니의 푼돈으로 유능한 고양이를 계속 두기로 했다”고 언급한 기록이다. 이 비용은 1932년 1주일에 1실링 6페니가 됐고, 2011년 현재 1년에 100파운드까지 올랐다고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가 보도한 바 있다.
이렇게 총리관저를 거쳐간 고양이는 여럿이다. 가장 오래 봉사한 고양이는 1973~86년 13년간 에드워드 히스, 해럴드 윌슨, 제임스 캘러헌, 마거릿 대처 등 4명의 총리를 모신 윌버포스다. 하지만 수석수렵보좌관이라는 공식 직함이 부여된 고양이는 래리가 최초다.
2012~2014년 래리와 함께 수석수렵보좌관 업무를 수행한 프레야. [위키피디아]
하지만 래리를 쫓아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프레야와 함께 수석수렵보좌관 직책을 유지시켜주되 총리관저 방문객을 맞이하고, 보안상태를 점검하며, 고가구의 편안함을 테스트하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그러다 프레야가 2014년 9월 교통사고를 겪고 은퇴해 시골로 내려가면서 현재는 래리가 유일한 수석수렵보좌관이다.
존슨 총리는 여러모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연상케 한다고 해 ‘영국의 트럼프’로 불린다. 풀풀 날리는 금발머리에 수다스럽다는 점도 닮았지만,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인 브렉시트를 열렬히 지지하는 민족주의 성향이 뚜렷하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심지어 7월 25일 영국 하원에서 있었던 총리 취임연설에서 “2050년까지 영국을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장소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한 나라로 만들겠다”던 트럼프 대통령의 캐치프레이즈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백악관의 고양이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시절의 ‘퍼스트 캣’ 삭스. [클린턴 대통령 도서관]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시절의 ‘퍼스트 캣’ 인디아. [미국 백악관]
다행히 존슨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매정함’까지 따라 하긴 힘들 듯하다. 영국 총리관저에는 터줏대감 래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래리의 지위를 위협하는 위험신호가 포착되긴 했다. 존슨 총리 커플이 주거 공간이 더 넓은 다우닝가 11번지 재무장관관저 2층 아파트에서 생활할 것이고, 고양이 대신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이로 인해 개와 앙숙인 고양이 래리가 쫓겨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이 뉴스에 대해 31만여 명의 팔로어를 거느린 래리의 비공식 트위터 계정에는 ‘절대 반대(HELL NO)’라는 메시지가 떴다.
개는 주인을 따라 거처를 옮겨가는 것에 거부감이 적다. 반면 고양이는 ‘집사(주인)’보다 장소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그래서 집사가 바뀌더라도 자신이 살던 곳에서 터줏대감처럼 지내는 경우가 많다. 존슨 총리가 애완견을 들여 ‘찬밥 신세’가 되더라도 래리가 제 발로 걸어나갈 리 없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거기엔 국민들의 보는 눈도 있는데 인간 나이로 환산했을 때 환갑을 넘긴 래리를 설마 억지로 쫓아내겠느냐는 막연한 바람도 담긴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