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연 씨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 50여 통의 복사본. 230여 장의 편지에는 성 접대로 인한 고통이 적혀 있다.
“감독, PD, 기획사 사장, 일간지 신문사 사장, 인터넷 신문사 사장, 금융회사 변태들, 대기업 사장 간부들, 외주제작사 PD들두 모두 다 저주받게 할거구. 더 이상 당하진 않을 거야. 지금 자연이 죽어가고 있어. 울 언니, 울 오빠 생각해서라도. 폭파됐으면 좋겠다.”
“김 사장은 일간지 언론사 한두 곳은 기본적으로 연줄 확실하게 걸어놔야 한다는 식이고. IT업체 대표, 전자신문 그 새끼들두 변태 미친 정신 이상자야. 내가 알고 있는 신인들 글구 연예지망생들을 다섯 명이 넘게… 나 어떻게 해야 할까.”
2009년 3월 7일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고(故) 장자연 씨의 사건(이하 장자연 사건)이 2년 만에 다시 세상을 들끓게 했다. 장씨 자살 2주기 하루 전인 3월 6일 SBS가 자필 편지로 추정되는 편지 50여 통(230여 장)을 공개한 뒤, 성 접대를 받은 사람의 리스트(장자연 리스트)가 존재하는지와 성 접대가 사실이었는지가 관심의 초점이 된 것.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인 전모(31) 씨가 장씨에게서 받았다고 주장하는 편지에는 장씨가 소속사 대표 김모(42) 씨에게 100차례 넘게 끌려다니며 31명에게 성 접대를 했다는 내용, 소속사와의 부당한 계약으로 고통스럽다는 내용 등이 기록돼 있다. 장씨가 성 접대한 대상은 김모 씨와 친분이 깊은 이들로 한 일간지 고위 간부, 방송사 PD, IT 관련 신문 간부, 금융계 관계자 등이라고 밝혔지만 정확한 이름과 접대 시점은 나와 있지 않다.
전씨는 이 편지에 대해 “장씨가 2008년부터 자살하기 직전인 2009년 3월까지 작성해 나에게 직접 준 것이다. 나한테 수차례 복수를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주장하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장씨의 자필 편지가 공개되자 경찰과 검찰이 이를 알면서 의도적으로 외면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이 편지가 장씨가 쓴 게 사실이라면, 장자연 사건에 대한 수사 재개가 불가피하다는 게 정치권과 검·경 수뇌부의 분위기다. 이와 관련해 3월 9일 경기도 분당경찰서는 전씨가 수감된 광주교도소에 대한 압수수색에 나서, 전씨 사물함에서 장씨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 원본 23장과 편지봉투 20장, 장씨와 관련한 신문스크랩 사본 70장을 확보하고 편지 원본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에 감정 의뢰한 상태.
경찰, 초기부터 편지 존재 파악
‘주간동아’가 입수한 전씨의 경찰 고소 서류, 그리고 장씨를 폭행·협박한 혐의로 기소된 전 소속사 대표 김모 씨와 매니저팀장 유모 씨의 공소장, 법원 공판 조서, 공판 진행 기록 등에 따르면, 일단 전씨는 장씨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를 2009년 8월 김씨와 유씨의 공판이 시작된 후 2010년 2월, 3월, 10월 3차례 탄원서와 함께 법원(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형사3단독)에 제출했다. 엄밀히 말하면 장씨의 편지가 공개된 것은 이번 보도가 처음이 아니라는 뜻.
각종 기록에 따르면 경찰은 장자연 사건을 수사하던 초기, 이미 이 편지뭉치의 존재를 알고 전씨에게 제출을 요구했으나 전씨가 “경찰을 믿을 수 없다”며 거절한 것으로 밝혀졌다. 전씨는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관련 경찰을 고소하기도 했으며 2번째 탄원서를 제출한 직후인, 즉 편지를 재판부에 낸 이후인 4월 9일과 5월 26일 재판부에 공판 기록 열람 및 복사 신청까지 했다. 원래 기록 열람 등은 피고나 피고 변호인, 피해자나 그 가족, 변호인 외에는 신청이 제한된다. 결국 전씨는 수사 초기부터 장씨 가족과 지근거리에서 공판에 적극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전씨는 왜 재판부에만 공개했던 장씨의 편지를 이 시점에 언론사에 흘렸을까. ‘주간동아’ 취재 결과, 이미 전씨와 전씨를 돕는 그룹들은 지난해 말부터 이 편지를 공개할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말은 바로 장자연 사건에 대한 1심 재판의 판결이 있던 시점. 3차례에 이르는 전씨의 탄원서와 장씨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를 제출했지만 재판부는 지난해 11월 18일 “성 상납은 없었다”며 김씨와 유씨에게 폭행 등의 공소 사실만을 적용해 각각 징역 1년과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60시간을 판결했다. 이미 재판부는 장씨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를 받고도 이를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음은 물론 참작도 하지 않았다.
전씨가 편지 공개와 이의 이슈화를 미리 계획했다는 증거는 또 있다. 최근 SBS가 장씨 편지를 공개하기 한 달 전인 지난 2월 초 법조 담당기자 사이에는 장자연 사건이 다시 한 번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지난 2월 초 한 법조 담당기자가 회사에 낸 정보 보고 내용이다.
1심 재판부선 증거 인정 안 해
‘故 장자연 씨 지인 전 아무개라는 사람이 최근 민주당에 장씨에게서 받은 편지를 보냈다고 함. 전씨가 민주당에 보낸 편지 내용은 경찰의 장씨 수사 당시 언론에 공개된 내용 외에 다른 비하인드 스토리가 많이 담겨 있다고 함. 이에 민주당은 C일보와 장씨 ‘잠자리 폭로’로 현재 소송을 벌이고 있는 이00 의원에게 이 제보를 맡기고, 곧 국회에서 편지를 공개할 것으로 알려져 파장이 예상됨.’
실제 민주당의 이 의원은 방송 보도 후 장씨의 편지를 입수했다면서 이를 근거로 검찰과 경찰의 재수사를 촉구하며 여당에 압력을 넣고 있다. 야권과 시민사회단체로부터 첫 수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이 같은 파문을 불렀다는 비판을 받은 검찰과 경찰은 수세에 몰려 재수사하겠다는 약속을 남발하는 실정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깔려 있다. 이번에 외부로 공개된 편지가 실제 장씨가 쓴 것이어야 하고 그것이 정황적인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1심 재판부는 전씨에게서 이 편지를 받고도 이를 증거로 인정하지 않은 바 있다. 참작조차 하지 않았다. 과연 이 편지는 장씨가 직접 쓴 것이 맞을까? 또 이 편지는 사건 수사와 재판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까? 이와 관련한 각종 의문점을 정리해봤다.
고 장자연 씨의 편지 원본을 찾기 위해 전씨가 수감된 광주교도소를 압수수색하고 나오는 경찰 차량.
SBS는 보도를 통해 사설감정기관의 전문가에게 필적 감정을 의뢰했고, 장씨가 쓴 편지가 맞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필적 감정을 어떤 원본과 대조해 진행했는지는 뚜렷하게 알리지 않고 있다. 전 소속사 대표 김씨의 변호인인 법무법인 율촌의 고영신 변호사는 “감정 결과 필체가 3~4개로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대한문서 감정원 김미경 원장은 “보통 원본이 없을 경우 사본으로 필적 감정을 한다. 하지만 위조 모방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 결과를 100% 확신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필체가 일치하더라도 압흔을 확인하지 않으면 동일인의 글씨라고 100%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감정 전문가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릴 수 있다.
의문 2 전씨는 중범죄자에 정신질환자?
전씨는 전과 10범으로 고등학교를 중퇴했고 1999년 2월 특수강도강간 혐의로 수원중부경찰서에 구속돼 4년형을 선고받은 뒤 만기 출소했다. 그는 2003년 출소 3개월 만에 다시 특수강도강간 혐의로 구속돼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다. 2011년 5월 출소 예정이었으나 교도소에서 교도관을 폭행해 2012년 8월까지 복역해야 한다. 장씨가 성 접대 등으로 고통받는 가운데 강간 혐의를 받고 있는 전씨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그러기 어렵다”며 “오히려 전씨가 어린 시절 장자연을 알고 지내다, 장자연의 자살 소식을 듣고 허구로 만들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더구나 전씨는 2006년부터 정신질환으로 약물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09년 경찰 조사에서 자신을 홍콩 재벌의 아들이라고 했다가 유명한 오락실 사장의 아들이라고 하는 등 신뢰성이 낮은 말을 했다.
의문 3 교도소로 배달된 장씨의 편지는 없었다?
전씨의 구치소를 압수수색해 전씨 편지 원본을 확보한 분당경찰서는 3월 10일 “압수한 봉투 가운데 3장에는 편지 소인이 찍히는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다”며 위조 가능성을 제기한 상태다. 또한 전씨가 복역 중인 광주교도소에서 2003년부터 최근까지 전씨의 우편물 수발 내역 2400여 건을 확인해본 결과 장씨나, 편지에 장씨 가명으로 등장한 ‘설화’로부터 수신된 편지는 없었다. 전씨는 “장씨가 전과자인 전씨와 편지 왕래를 하는 것이 자신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해 우편이 아닌 지인을 통한 인편으로 주고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더욱이 수십 통씩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인데 장씨가 전씨를 면회한 기록이 없는 점도 의아하다.
의문 4 신문기사 보고 조작?
경찰의 교도소 압수수색 후 전씨가 장씨와 관련된 신문기사를 스크랩해 편지에 인용했을 가능성에도 무게가 실린다. 신문 스크랩 사본 70여 장에는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은 흔적이 있다. 이 교수는 “복역자 가운데 편집적인 피해망상이 있는 이의 경우,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고 분석했다. 또 3월 10일 경찰은 편지 원본 20여 장에서 편지를 위조한 것으로 보이는 증거가 다수 발견됐다고 밝혔다. 우체국 소인이 잘려진 편지봉투와 함께 전씨가 편지를 외부로부터 받은 것처럼 조작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경찰은 장자연 사건에 대한 논란이 가열되자 57명 규모의 대응반을 편성하며 적극적인 수사의지를 내보이고 있다. 여기에는 장자연 사건을 이미 수사한 바 있는 이명균 강원도 삼척경찰서장(전 경기청 강력계장)도 포함됐다. 또 경찰은 본청 소속 프로파일러들을 합류시켜 편지를 쓴 장씨와 전씨의 심리상태, 관계 등을 집중 분석할 것이라 밝혔다. 하지만 각종 시민단체와 누리꾼은 이번 편지의 진위와 상관없이 검찰과 경찰은 의혹을 적극적으로 풀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사건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김씨와 유씨를 기소한 적 있는 검찰은 일단 편지의 증거 효력에 대해선 유보적이거나 회의적이다. 검찰 관계자는 “피해자가 부존재한 상태에서 편지 쓴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내용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흐름까지 확장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