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4일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는 “1977년 재일교포 유학생 김정사 간첩 조작의혹 사건은 수사기관이 수사 과정에서 피의자에게 불법 구금과 고문, 폭행, 협박을 해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고 발표했다. 1974년 공안기관에 쫓기는 대학생에게 현금 7500원을 건넸다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외국인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징역 20년을 선고받은 일본인 기자 다치가와 마사키 씨가 올 1월 무죄로 밝혀지는 등 최근 조작된 간첩사건의 진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하지만 재일교포 김정사(55) 씨 간첩 조작사건에 대한 진실화해위의 발표는 권고사항일 뿐 법적 구속력이 없다. 권고를 받은 수사기관은 아무 연락이 없는 상황. 그래서 김씨는 4월 말 국가를 상대로 법적 소송을 내기 위해 한국을 찾을 예정이다. 33년 전 김씨에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77년부터 2년간 옥살이를 한 뒤 일본에 돌아가 쭉 살고 있는 그와 4차례 전화 인터뷰를 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등교하려다 끌려가 고문과 허위자백
1977년 4월 21일 오전 8시. 서울 관악구 신림동 등교 준비를 하던 재일교포 유학생 김정사(당시 22세) 씨의 하숙집에 낯선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무서운 얼굴로 “네가 김정사냐? 너 유성삼 알지?”라고 물었다. 유성삼 씨는 같은 유학생으로 가끔 어울리던 친구. 얼떨결에 “그렇다”고 대답하자 한 사람이 씩 웃으며 물었다.
“빨갱이 새끼, 이북에 몇 번이나 다녀왔냐?”
재일교포 2세인 김씨는 1977년 일본 명문 와세다 대학에 합격했지만, 조선인으로서 정체성을 찾고자 이를 포기하고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해 두 달째 다니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이유도 모른 채 국군보안사령부(이하 보안사)에 끌려갔다. 도착 후에야 유씨가 불온서신 전달 혐의로 검거됐고, 유씨의 집에서 김씨가 빌려준 책 ‘김지하의 법정 투쟁기’가 발각돼 덩달아 간첩으로 몰린 사실을 알았다.
어두컴컴한 보안사 조사실에서 고문이 이어졌다. 군홧발에 밟히고 뺨을 맞는 것은 기본이고 물고문, 전기고문은 예사였다. 한번은 조사관들이 “너 엘리베이터 타볼래?”라며 비밀스러운 방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는 4개의 쇠로만 연결된 엘리베이터 모양의 문이 있었다.
“여기가 어떤 곳인 줄 알아? 너 같은 북괴 간첩들이 고문받다 죽으면 한강까지 연결된 이 문으로 버리지. 그럼 넌 한강에서 신원불명의 시체로 발견되는 거야.”
계속되는 가혹한 고문에 김씨는 몸과 마음이 무너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함께 잡혀온 서울대 법대 출신 친구가 고문에 못 이겨 “김정사는 일본에서 투입한 간첩이다”라고 거짓 자백을 했다. 점점 몰리는 상황, 결국 김씨는 전기고문을 당한 후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그들이 가져온 허위진술서를 베껴 쓰고 서명했다.
“나는 반국가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이하 한민통)로부터 대남공작을 하라는 지령을 받아 남한에 잠입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김정사 개인이 아니라 한민통이었다. 한민통은 박정희 정권의 눈엣가시였다. 이는 1973년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 재야인사들과 함께 만든 단체로, 유신정권을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당시 보안사는 우익 일본교포 단체인 민단이 반정권 운동을 하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해 탄압의 근거로 삼으려 애썼다. 보안사가 1978년 발간한‘대공 30년사’란 책에 김정사 간첩사건에 대해 “앞으로는 한민통에서 공공연하게 침투 활동하는 것을 합법적으로 색출하고 처단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적었다.
하지만 김씨는 한민통이 연 강연회에 몇 차례 참여했을 뿐 한민통 소속도 아니었다. 단지 시인 김지하 씨를 존경하고 당시 독재체제에 불만이 있던 학생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사법부는“한민통은 북괴 및 재일조선인총연합회의 지령에 의거, 구성됐고 그 자금지원을 받아 목적 수행을 위해 활동하는 반국가단체로 김정사는 한민통의 지령을 받고 잠입한 것”이라고 판시했다. 1977년 김씨는 간첩 혐의로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징역 10년을 받았고 대법원에서는 원심 확정판결이 내려졌다. 그는 사상범들이 주로 수감된 광주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다 1979년 8·15 특사로 형 집행정지를 받아 석방됐다.
진실화해위 “강압 수사로 조작 개연성”
이후 김씨는 서울 친척집에 머물며 두문불출했다. 학교로부터 복학 제안을 받았으나 “한국에 살기 무섭다”며 거절했다. 그해 12월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 토목사업을 했다. 현재 직원 20여 명의 내실 있는 중견 회사로 성장해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생긴 왼쪽 다리 장애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같은 재일교포와 결혼해 아이도 낳았다. 현재 자녀들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 그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아이들이 나처럼 고민하기보단 넓은 세상에서 살길 바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늘 분노가 있었다. 간첩으로 몰렸던 억울함, 한국에 갈 때 품었던 꿈을 이루지 못한 안타까움, 재일교포 3세로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희망. 그는“반드시 의혹을 풀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김씨가 간첩으로 몰리자 더 큰 고초를 겪은 것은 일본의 한민통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80년 한민통 의장에 취임하기 위해 도쿄를 방문했다 납치당해 죽기 일보 직전 구출됐고, 1981년에는 이를 빌미로 반국가단체의 수괴 혐의로 사형판결을 받았다. 이 단체의 간부들은 2003년 노무현 정부가 돼서야 한국으로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지만 ‘반국가단체’라는 낙인은 여전했다. 그마저도 2008년 이명박 정부에서는 이들에 대한 여권 발행을 중단한 상태.
또한 한민통이 이적단체로 규정돼 그 세력이 민단을 이탈하면서 민단의 보수화가 심해졌다. 그 결과 민단과 재일조선인연맹(이하 조련)의 간극이 더 벌어져 화해가 어려워진 측면도 있다. 이 사건을 담당한 진실화해위 김모 조사관은 “김정사 사건 이후 재일 한국인단체가 많이 해체됐고, 어려움을 겪었다. 정당한 비판을 하는 단체들을 무력화하려는 박정희 정권의 조작이었다”고 밝혔다.
2006년 과거사를 정리하기 위한 각종 위원회가 조사 개시를 했다. 김씨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과거사위), 진실화해위 등에 간첩 조작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을 요청했다. 김 조사관은“외국에서 정보를 얻는 게 힘들어서인지 일본 거주 신청자는 5명에 그쳤다. 그중 한 명이 김정사 씨였다. 그는 조사 과정 내내 적극적으로 진술을 하며 진실 규명에 앞장섰다”고 밝혔다. 2007년 11월 과거사위는 김씨가 “일부 북한에 대한 고무 찬양은 있었으나 간첩행위는 없었다”며 “재일교포 관련 간첩사건 4건 중 김씨 사건을 포함한 3건은 강압 수사로 조작됐거나 조작됐을 개연성이 높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어 2010년 진실화해위에서도 같은 맥락의 결론을 내렸다.
쫓겨나듯 떠났던 고향을 20년 만에 돌아오는 김씨. 왼쪽 다리를 절뚝이지만 진실을 향한 그의 발걸음은 당당하기만 하다.
하지만 재일교포 김정사(55) 씨 간첩 조작사건에 대한 진실화해위의 발표는 권고사항일 뿐 법적 구속력이 없다. 권고를 받은 수사기관은 아무 연락이 없는 상황. 그래서 김씨는 4월 말 국가를 상대로 법적 소송을 내기 위해 한국을 찾을 예정이다. 33년 전 김씨에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77년부터 2년간 옥살이를 한 뒤 일본에 돌아가 쭉 살고 있는 그와 4차례 전화 인터뷰를 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등교하려다 끌려가 고문과 허위자백
1977년 4월 21일 오전 8시. 서울 관악구 신림동 등교 준비를 하던 재일교포 유학생 김정사(당시 22세) 씨의 하숙집에 낯선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무서운 얼굴로 “네가 김정사냐? 너 유성삼 알지?”라고 물었다. 유성삼 씨는 같은 유학생으로 가끔 어울리던 친구. 얼떨결에 “그렇다”고 대답하자 한 사람이 씩 웃으며 물었다.
“빨갱이 새끼, 이북에 몇 번이나 다녀왔냐?”
재일교포 2세인 김씨는 1977년 일본 명문 와세다 대학에 합격했지만, 조선인으로서 정체성을 찾고자 이를 포기하고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해 두 달째 다니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이유도 모른 채 국군보안사령부(이하 보안사)에 끌려갔다. 도착 후에야 유씨가 불온서신 전달 혐의로 검거됐고, 유씨의 집에서 김씨가 빌려준 책 ‘김지하의 법정 투쟁기’가 발각돼 덩달아 간첩으로 몰린 사실을 알았다.
어두컴컴한 보안사 조사실에서 고문이 이어졌다. 군홧발에 밟히고 뺨을 맞는 것은 기본이고 물고문, 전기고문은 예사였다. 한번은 조사관들이 “너 엘리베이터 타볼래?”라며 비밀스러운 방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는 4개의 쇠로만 연결된 엘리베이터 모양의 문이 있었다.
“여기가 어떤 곳인 줄 알아? 너 같은 북괴 간첩들이 고문받다 죽으면 한강까지 연결된 이 문으로 버리지. 그럼 넌 한강에서 신원불명의 시체로 발견되는 거야.”
계속되는 가혹한 고문에 김씨는 몸과 마음이 무너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함께 잡혀온 서울대 법대 출신 친구가 고문에 못 이겨 “김정사는 일본에서 투입한 간첩이다”라고 거짓 자백을 했다. 점점 몰리는 상황, 결국 김씨는 전기고문을 당한 후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그들이 가져온 허위진술서를 베껴 쓰고 서명했다.
“나는 반국가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이하 한민통)로부터 대남공작을 하라는 지령을 받아 남한에 잠입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김정사 개인이 아니라 한민통이었다. 한민통은 박정희 정권의 눈엣가시였다. 이는 1973년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 재야인사들과 함께 만든 단체로, 유신정권을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당시 보안사는 우익 일본교포 단체인 민단이 반정권 운동을 하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해 탄압의 근거로 삼으려 애썼다. 보안사가 1978년 발간한‘대공 30년사’란 책에 김정사 간첩사건에 대해 “앞으로는 한민통에서 공공연하게 침투 활동하는 것을 합법적으로 색출하고 처단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적었다.
하지만 김씨는 한민통이 연 강연회에 몇 차례 참여했을 뿐 한민통 소속도 아니었다. 단지 시인 김지하 씨를 존경하고 당시 독재체제에 불만이 있던 학생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사법부는“한민통은 북괴 및 재일조선인총연합회의 지령에 의거, 구성됐고 그 자금지원을 받아 목적 수행을 위해 활동하는 반국가단체로 김정사는 한민통의 지령을 받고 잠입한 것”이라고 판시했다. 1977년 김씨는 간첩 혐의로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징역 10년을 받았고 대법원에서는 원심 확정판결이 내려졌다. 그는 사상범들이 주로 수감된 광주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다 1979년 8·15 특사로 형 집행정지를 받아 석방됐다.
진실화해위 “강압 수사로 조작 개연성”
김정사 씨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날 기사. 이 억울함을 벗기까지 30여 년이 걸렸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늘 분노가 있었다. 간첩으로 몰렸던 억울함, 한국에 갈 때 품었던 꿈을 이루지 못한 안타까움, 재일교포 3세로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희망. 그는“반드시 의혹을 풀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김씨가 간첩으로 몰리자 더 큰 고초를 겪은 것은 일본의 한민통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80년 한민통 의장에 취임하기 위해 도쿄를 방문했다 납치당해 죽기 일보 직전 구출됐고, 1981년에는 이를 빌미로 반국가단체의 수괴 혐의로 사형판결을 받았다. 이 단체의 간부들은 2003년 노무현 정부가 돼서야 한국으로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지만 ‘반국가단체’라는 낙인은 여전했다. 그마저도 2008년 이명박 정부에서는 이들에 대한 여권 발행을 중단한 상태.
또한 한민통이 이적단체로 규정돼 그 세력이 민단을 이탈하면서 민단의 보수화가 심해졌다. 그 결과 민단과 재일조선인연맹(이하 조련)의 간극이 더 벌어져 화해가 어려워진 측면도 있다. 이 사건을 담당한 진실화해위 김모 조사관은 “김정사 사건 이후 재일 한국인단체가 많이 해체됐고, 어려움을 겪었다. 정당한 비판을 하는 단체들을 무력화하려는 박정희 정권의 조작이었다”고 밝혔다.
2006년 과거사를 정리하기 위한 각종 위원회가 조사 개시를 했다. 김씨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과거사위), 진실화해위 등에 간첩 조작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을 요청했다. 김 조사관은“외국에서 정보를 얻는 게 힘들어서인지 일본 거주 신청자는 5명에 그쳤다. 그중 한 명이 김정사 씨였다. 그는 조사 과정 내내 적극적으로 진술을 하며 진실 규명에 앞장섰다”고 밝혔다. 2007년 11월 과거사위는 김씨가 “일부 북한에 대한 고무 찬양은 있었으나 간첩행위는 없었다”며 “재일교포 관련 간첩사건 4건 중 김씨 사건을 포함한 3건은 강압 수사로 조작됐거나 조작됐을 개연성이 높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어 2010년 진실화해위에서도 같은 맥락의 결론을 내렸다.
쫓겨나듯 떠났던 고향을 20년 만에 돌아오는 김씨. 왼쪽 다리를 절뚝이지만 진실을 향한 그의 발걸음은 당당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