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제품 거래가 활발한 도쿄의 한 프리마켓.
2009년 강타한 유행어 게키야스
이런 경제 상황을 반영이라도 하는 듯 2009년 내내 ‘게키야스(激安)’라는 표현이 크게 유행했다. 게키야스는 저렴한 물건이나 이를 판매하는 곳을 가리키는 말로, 우리말로 표현하면 ‘폭탄 세일’ 정도가 적당할 듯하다. 게키야스 여행, 게키야스 요리, 게키야스 쇼핑, 심지어 게키야스 제품만 소개하는 방송이 생길 정도로 게키야스 열풍이었다.
게키야스는 일본인의 소비 패턴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열도가 마치 저렴한 제품 찾기에 빠진 것처럼 매일 새로운 게키야스 제품을 선보였다. 게키야스 제품의 대표주자는 바로 청바지. 일본 중저가 캐주얼 브랜드인 ‘유니클로’가 990엔짜리 청바지를 내놓으며 청바지 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유니클로는 990엔 제품을 위해 저가 브랜드 ‘지유(G.U.)’를 새로 론칭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뒤를 이어 세븐·아이·홀딩스(セブン&アイ·ホ-ルディングス)의 슈퍼 체인 ‘더 프라이스(The Price)’가 유니클로보다 10엔 인하한 980엔 청바지를 선보였고, 최근 ‘돈키호테’라는 유통업체는 690엔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청바지를 판매하고 있다. 유니클로의 990엔 청바지는 지난해 100만 벌을 팔아치우며, 일본의 ‘닛케이 트렌드’가 선정한 ‘2009 베스트 상품 30’ 중 10위에 오를 만큼 게키야스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500엔 런치를 내놓은 명품거리 ‘긴자’에 자리한 유명 백화점, 200엔대의 저가 벤토(도시락)를 경쟁적으로 선보인 슈퍼업계, 실크 소재 양복을 단돈 9800엔에 내놓은 양복업계 등도 게키야스 열풍을 이끌었다. 한편 TBS는 파격적으로 수요일 저녁 간판 시간대에 일본 전역의 게키야스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인 ‘게키야스 버라이어티’를 선보였다. 이 프로는 물가가 비싸기로 소문난 도쿄 23구의 저렴한 월세가, 식료품비가 적게 드는 지역인 아다치에서 게키야스 슈퍼마켓이나 식당 등을 찾아내 알려준다.
게키야스 열풍은 중고제품 거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신제품보다 상대적으로 값싼 중고를 찾는 수요가 늘었기 때문. 중고제품은 흔히 ‘때 탄 물건’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일본은 기본적으로 일상에서 중고제품 사용 빈도가 높은 편이다. 필자의 경우 아이 침대나 장난감, 테이블, 옷장, 정리함 등 일본으로 이주한 이후 구입한 물건의 50∼60%가 중고제품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새것과 다름없는 중고를 저렴하게 어디서나 구입할 수 있기 때문.
일본에서는 물건을 구입하면 상자, 포장지, 설명서, 심지어 내용물을 보호하기 위한 스티로폼까지 그대로 보관하는 경우가 많다. 나중에 중고로 팔 때 조금이라도 비싼 가격을 받기 위해서다. 물론 제품을 깨끗이 사용하는 것은 기본. 이런 제품은 중고시장에서 제값을 받고 거래될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중고제품을 찾는 수요도 증가하게 만든다.
게키야스 열풍을 이끈 ‘유니클로’의 990엔짜리 청바지. 지난해 100만 벌을 팔아치웠다.
트레저 팩토리의 선전에는 시스템 측면의 도움도 있다. 출장 감정이 바로 그것이다. 어디든지 중고제품 감정 의뢰가 있으면 트레저 팩토리의 전문인력이 찾아가 감정한다. 이렇게 해서 산출한 가격을 토대로 거래가 성사되며 돈도 현장에서 바로 지급한다. 중고제품 출장감정을 도입하면서 트레저 팩토리는 좋은 중고제품을 구입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소비자에게 좋은 물건을 값싸게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유통채널을 확보했던 것.
품질보증도 트레저 팩토리 중고제품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는 데 한몫한다. 중고제품을 구입할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고장 여부일 것이다. 구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고장이 난다면 저렴하게 구입한 의미가 없기 때문. 제품 구입 시 해당 물건에 대한 품질보증제를 시행함으로써 트레저 팩토리의 이용률을 높일 수 있었다.
사람냄새 중고시장에서 보물찾기
프리마켓(flea market)에서도 중고제품 거래가 비교적 활발하다. 일본에서 벼룩시장을 뜻하는 프리마켓은 1974년 오사카에서 처음 열렸다. 197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자택의 차고에서 중고제품을 판매하던 것을 본뜬 것이다. 지금은 도쿄, 오사카 등 대도시뿐 아니라 일본 전역에서 프리마켓이 매주 열린다. 특히 도쿄는 프리마켓이 20∼30곳에서 열릴 정도. 철 지난 의류나 잡화, 개인 소장품 등이 거래 물건의 대부분이지만 때때로 비싼 골동품이나 보석이 거래되기도 한다.
필자는 주말이면 아내와 도쿄의 프리마켓에 간다. 특별히 무엇을 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사람 사는 냄새를 맡으며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프리마켓은 주말과 공휴일에만 열리며, 오전 9∼10시에 시작해 오후 3∼4시에 끝난다. 희소성 있는 물건은 대부분 내놓자마자 나가니 되도록 일찍 가는 것이 좋다. 또 마감시간이 다가오면, 가져온 물건을 ‘땡처리’하는 경우도 있다. 필자 부부는 강아지 인형을 모으는데, 프리마켓에서 ‘땡처리’로 구입한 강아지 인형이 30개나 된다.
일본을 방문해 프리마켓에 들른다면, 물품을 구입할 때 치수를 주의해야 한다. 일본 의류는 한국보다 작게 나온다. 평소 입었던 것보다 한 치수 큰 것을 골라야 한다. 또 CD 플레이어, 카세트, 게임기 등 전자제품을 살 때는 작동이 잘되는지 확인해야 한다. 과거 유명 브랜드 시계를 산 적이 있는데, 몇 개월 안 가 멈춰버렸다.
지갑이 얇아지면서 씀씀이도 많이 줄어든 일본 소비자들. 앞으로도 게키야스와 중고제품을 찾는 발길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