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후보 합동연설회에서 지지를 호소하는 손학규 후보.
하나 세상일이 어디 그런가. 간단하지 않고,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과거에 매달려 그것만 보고 선택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나온 개념이 피오리나(Morris P. Fiorina)의 ‘회고적 투표(retrospective voting)’다. 회고적 투표는 지금까지 해온 사람에 대한 평가로부터 후임자를 고르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2003년부터 집권해 임기가 끝나가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2008년부터 일할 사람을 뽑는 2007년 대선에 끼친 영향이 그것이다.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보자. 2008년부터 5년 동안 집권할 사람을 판단할 때는 무엇보다 그가 어떻게 앞으로 5년을 이끌어갈지를 따져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면 그 사람이 미래에 어떻게 할 것인지는 무엇으로 판별할 것인가. 어떤 인물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흔히 그가 제시하는 정책이나 비전을 거론하지만 모두가 합의하는 선호나 준거가 없으니 정책이나 비전의 적실성을 정확히 계량하기는 불가능하다. 또 정책이나 비전을 통해 확연하게 차별화하는 것도 쉽지 않다. 좋다고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다 끌어다 붙이는 게 관행이니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결국 그 사람의 행적, 특히 살아온 길(이력)과 지금까지 해온 바(언행·업적)에 비춰 촌탁(忖度·남의 마음을 미루어서 헤아림)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어느 날 갑자기 달라지지 않는 것이 사람이다. 게다가 그가 선거를 앞두고 달라졌다고 하면 그건 더 믿기 어렵다. ‘선거 스턴트(electoral stunt)’이기 때문이다. 정책의 재정적·실용적 가능성을 따지는 것을 매니페스토(manifesto)라고 하는데, 이 매니페스토가 사람에게도 필요하다.
당권 도전? 재보궐 선거 출마?
이런 설명을 앞세운 것은 분석대상이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재·보궐 선거 이후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부상했다는 것이 그에 대한 최근의 세평이다. 지난 대선에서 드러난 그대로, 최대 승부처인 수도권에 나름대로 기반이 있다는 것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여야의 대권주자 중 누구도 수도권을 기반으로 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인물구도 또한 손 전 지사를 돋보이게 하는 좋은 배경이다.
최근 손 전 지사가 야권연대의 필요성을 언급했는데, 그러고 보면 5월 정계 복귀설이 뜬소문만은 아닌 듯하다. 6·2지방선거를 앞둔 데다 7~8월로 예상되는 민주당 전당대회까지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특히 전당대회는 민주당 잠룡들에게 중대한 분수령이다. 대망을 꿈꾸는 손 전 지사로서도 그냥 넘길 수 없을 만큼 ‘이권’이 크게 걸린 사안이다. 원외 핸디캡이 있는 데다 정세균 대표나 정동영 의원보다 기반이 약한 터라 공천권 등을 행사하는 대표직이 절실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방선거 지원을 통해 자연스럽게 복귀하고, 그 다음 당권에 도전하거나 재·보궐 선거에 출마하는 행보를 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핵심 당직자의 말도 이런 전망을 뒷받침한다.
“5월 중순 (손 전 지사가) 본격 선거지원에 나설 것이다. 수도권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활약할 것이다.”
그렇다면 손 전 지사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손 전 지사의 가장 큰 숙제는 ‘한나라당 이력’이다. 이는 장점이면서 원죄도 되는 양날의 칼이다. 흔히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를 오가며 투표하는 부동층(swing voters)에게 손 전 지사의 한나라당 이력은 장점이다. 이들은 지난 10년의 ‘민주정부’에 실망해 과거 거부했던 한나라당 후보를 다시 선택했다. 이는 개혁이나 진보세력에 대한 불신이 쉽게 해소되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이들이 한나라당에 마음을 다시 주는 데 10년이 걸렸듯, 민주당 등에 다시 기대를 거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한나라당에 몸담았던 이력은 그를 ‘그나마 양해할 수 있는’ 인물로 비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근래 야당가(街)나 시민단체 등에서 확인되는 분위기도 청신호다. 야당과 시민단체 주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서 중 하나는 다음에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강렬한 열망이다. 현 정부의 독주와 강공이 계속되는 한 이런 정서는 강화될 것이다. 승리에 첫 번째 우선순위를 주면 정체성이나 동질감보다 되도록 많은 유권자를 끌어들이는 인물을 선택하게 만드는 동력도 커지게 마련이다. 2006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실질적으로 당을 떠나 있던 오세훈 전 의원을 후보로 선택한 것이 좋은 예다. 현재 야권 주자 중 잠재적 득표기반에서 보자면 손 전 지사가 우위에 있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야권에서 집권에 대한 열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에게 유리한 정서적 지형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한나라당에 몸담았던 이력이 결정적 약점이 될 수도 있다. 우선 그의 한나라당 경력은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아예 투표하지 않았던 기권층에겐 꺼림칙하고, 마땅찮은 부분이다. 그들은 대개 한나라당은 거부하고 민주당에겐 실망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다시 투표장으로 나가게 동기를 부여하려면 한나라당이 아닌 동시에 ‘10년 민주정부’의 한계에서 벗어난 인물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들이 손 전 지사를 선택하는 것은 뭔가 부자연스럽다 하겠다. 물론 어떤 계기가 주어진다면 사정은 달라질 수 있다. 토머스 페인은 ‘상식론’에서 “시간이 이성보다 생각을 더 많이 바꾸게 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이력’은 양날의 칼
어쩌면 손 전 지사가 민생투어에 나선 것이나, 시골 농가에 칩거한 것도 다분히 이들을 의식한 것일지 모른다. 반성하는 모습을 통해, 훌훌 벗어던지는 모습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게 단순히 과거의 흔적 지우기는 아닐 것이다. 손 전 지사를 통한 승리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선뜻 내키지 않아 하는 심리적 장애를 가진 이들과의 불화를 없애는 것이 주목적이리라.
또 하나의 단점은 한나라당 이력이 손 전 지사의 정체성을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개혁이나 진보성향의 유권자에게 비친 손 전 지사는, 그간 보건복지부 장관이나 경기도지사를 지내면서 시대의 개혁과제로 거론된 것 가운데 정부 정책으로 과감히 채택한 것이 없는 인물이다. 설령 있다 해도 최소한 이들의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한나라당이 이회창 총재 시절 더욱 우경화될 때도, 그는 당내에서 조용했다. 또 한나라당 탈당 이후나 민주당 대표 시절에도 손 전 지사가 보여준 개혁성이나 진보성은 거의 없다. 특히 그가 대표시절 추천한 2명의 방통위원이 미디어법 정국 등에서 보여준 무기력은 그가 말하는 개혁이나 진보의 진정성이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계산된 행동이든 아니든 칩거의 효과는 이미 얻을 만큼 얻었다. 솔직히 말해 그것은 정치인으로 일탈된 행보다. 가수가 노래로 평가받듯 정치인은 정치로 승부해야 한다. 정치인은 정치를 통해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드러내야 한다. 정책을 제시하고, 인물을 내세우고, 누구의 편을 들 것인지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러나 손 전 지사는 그동안 칩거와 반성을 핑계로 정치를 피해왔다. 예컨대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애써 침묵하고 있다. 정황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도적인 회피의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손 전 지사의 대권주자 지지율은 낮다. 지난 3월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조사에선 2.8%에 불과했다. 그러나 국민의 가시권에 열심히 활동하는 주자 가운데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제외하면 그보다 앞선 사람 대부분이 3~6%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나쁜 수치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강력한 차기주자로 떠오른 적이 없다는 점에서 보면, 이젠 정면승부해야 할 때가 온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