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험생들 사이에서 EBS 인터넷 수능 강의는 수능 시험 준비를 위한 필수 교재다. 학교에서 단체로 EBS 수능 방송을 시청하고 있는 학생들.
7월 들어 서울 강남의 주택가에 배포되고 있는 한 학원광고 전단지의 내용이다. 최근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등에는 EBS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 강의 진행자들이 출강한다는 광고가 부쩍 늘었다. 여름방학 맞이 특강 프로그램들이 잇따라 개설되면서부터다. EBS 강사라는 타이틀 옆엔 으레 ‘최고의 적중률’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이에 따라 EBS 강의가 일부 스타강사의 몸값 올리기나 특정 학원 홍보에 악용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004년 4월 EBS 인터넷 수능 강의를 시작할 당시 정부는 “각 분야 최고의 강사들이 EBS 강단에 선다. 이제는 누구나 인터넷과 TV를 통해 수준 높은 입시 강의를 들을 수 있고, 가정형편 탓에 교육의 기회에서 차별받는 학생은 없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 정부가 보증한 ‘최고의 강사’들이 고액의 강사료를 받고 학원 강단에 서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입시 시장에서 EBS 강사들의 인기는 끝없이 치솟고 있다. 서울 대치동의 한 학원이 배포한 전단에는 ‘EBS 수능 강사 쭛쭛쭛 등 4명의 강사가 2학기 대입 재수 종합반의 강사진에 포함됐다. 재수생들을 직접 밀착 관리해줄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강남의 또 다른 학원은 9명의 EBS 강사들이 ‘명품팀’ ‘드림팀’ 등을 구성했다는 내용의 전단을 강남 일대에 뿌렸다. 한 사설 온라인 입시 사이트에는 심지어 현직 교사인 한 EBS 강사의 ‘현 EBS 강사, 현 EBS 집필위원, 현 K여고 교사’라는 프로필이 올라와 있기도 하다.
정부가 보증한 ‘최고의 강사’
학원 강의만이 아니다. 국내 유명 사설입시 전문기관들이 학부모, 수험생, 교사 등을 대상으로 열고 있는 대입 설명회의 최대 스타도 EBS 인터넷 수능 방송 강사들이다. 6월 한 학원은 ‘EBS 수능 강의 쭛쭛학원 강사들의 모의 수능시험 분석과 수능 영역별 고득점 전략’이라는 타이틀로 입시설명회를 열었다. 이 학원 소속 EBS 수능 강사들이 돌아가면서 ‘2005 수능 출제 경향’을 강의한 이날 행사장에는 3000여명의 학부모와 수험생들이 몰려 스타강사의 설명에 귀 기울였다. 같은 날 입시설명회를 연 다른 대형 학원의 ‘입시전략 강사’도 학원 소속 EBS 강사들이었다.
최근 학습지 시장에서 높은 판매율을 기록하고 있는 책의 저자 가운데 상당수는 EBS 강사들이다.
한 수능 대비 문제지의 광고에는 ‘2005 수능 출제의 핵심을 쥐고 있는 EBS 출제위원’이 참여했다는 구절이 있다.
최근에는 EBS에서 강의하고 있는 현직 교사 들이 한 세트에 24만원씩 하는 고가의 수능 교재를 만들어 판매하다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이 출판사는 “EBS 전 강의를 학생이 소화하려면 잠을 안 자고 100일 동안 시청해야 한다. 우리 책은 EBS 수능 강사들이 직접 EBS 수능 강의를 요약한 것으로 공부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다”고 광고했다. ‘누구나 수강료에 대한 부담 없이 질 높은 강의를 듣게 하겠다’는 EBS 강의의 취지를 EBS 강사의 이름을 통해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이처럼 학원가와 학습지 시장에서 EBS 강사들이 주가를 높이고 있는 것은 정부가 수차례 EBS 방송과 수능을 연계하겠다고 공언했기 때문. 교육부는 EBS 강의를 시작하면서 “학교 교육을 기본으로 하고, EBS 수능 강의로 보완해 공부한다면 충분히 수능에 대비할 수 있게 문제를 출제하겠다”고 밝혔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도 6월 모의 수능에서 영역별로 55∼90%까지 EBS 수능 강의 내용을 반영해 문제를 출제한 후 “11월 수능에서도 이와 유사한 비율로 EBS 강의를 반영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교육부가 EBS 수능 교재 내용 외에 강의 도중 강사가 언급한 내용까지 수능에 출제하겠다고 밝힌 후 EBS 강사들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아무리 유능한 교사나 학원 강사라도 말 한마디 한마디가 수능시험의 텍스트가 되는 EBS 강사들의 경지는 뛰어넘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또 하나의 ‘신종 과외’ 비판 목소리
문제는 이처럼 강사들의 주가를 높여놓고도 교육부나 EBS 측이 후속 대책을 전혀 세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부가 EBS 강의를 통한 사교육비 경감대책을 발표할 때마다 세간의 관심은 EBS 강사들이 그 지명도를 학원이나 교재의 홍보수단으로 삼아 막대한 이권을 챙길 경우 대책은 있는가에 쏠렸다. 그런데도 EBS는 강사들과의 초기계약 체결 과정에서 “출연 사실을 자신이나 학원의 홍보에 이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지 못했다.
EBS 관계자는 “지난 3월 말 강사들과 계약을 체결하면서 ‘출연 사실을 자신이나 학원의 홍보에 이용하지 않겠다’는 계약조건을 넣으려고 했지만, 일부 강사들의 반발로 이를 관철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결국 교육부나 EBS는 강사들의 외부 활동이 늘어나도 그들의 도덕성에 호소할 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이 때문에 EBS 강의가 또 하나의 ‘고액 신종 과외’가 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에 대해 한 EBS 강사는 “지금처럼 EBS라는 타이틀 하나만 있으면 모든 기회가 열리는 상황에서 스스로 조심하라고 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강사들에게 지급되는 보수를 현실화하고, 대신 EBS 경력을 학원 홍보 등에 활용하는 것은 금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송원재 대변인은 “EBS 교육방송이 강의의 질 자체로 학원과 경쟁하지 않고 지금처럼 수능 출제를 약속하는 등 편법을 동원할 경우, 공교육은 무너지고 학원들은 점점 더 많은 이득을 벌어들이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며 “EBS 강의는 수준별 수업을 통해 학교 수업을 보완하는 본래의 취지대로 운영하고 공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