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상 과학 부문은 AI(인공지능)가 휩쓸었다. 노벨물리학상은 컴퓨터가 인간 뇌처럼 학습할 수 있도록 인공신경망을 개발한 AI 선구자들에게 수여됐으며, 노벨화학상 역시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AI 도구를 개발한 이들에게 돌아갔다. 이번 수상은 과학 분야에서 AI 연구의 혁신을 인정한 결과이지만, 그동안 기초과학에 초점이 맞춰졌던 노벨상을 AI 연구자들이 휩쓴 것은 이례적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올해 노벨물리학상과 노벨화학상은 AI(인공지능) 분야 연구자들에게 수여됐다. [이종림 제공]
AI 선구자들이 물리학상을 수상한 이변
10월 8일(현지 시간) 올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로 제프리 힌턴 캐나다 토론토대 컴퓨터과학과 명예교수와 존 홉필드 미국 프린스턴대 분자생물학과 명예교수가 선정됐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는 “인공신경망을 이용해 기계 학습을 가능하게 한 발견과 발명에 대한 공로로 상을 수여한다”고 밝혔다. AI가 챗GPT는 물론 천문학, 의학, 입자물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기까지 이들의 영향은 지대했다. AI 기술은 대부분 인공신경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AI 대부로 불리는 연구자들이 물리학상을 수상하는 이변이 당황스럽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조너선 프리처드 영국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천체물리학자는 자신의 X(옛 트위터) 계정을 통해 “머신러닝과 인공신경망을 좋아하지만, 이것이 물리학적 발견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며 “노벨상이 AI 과대광고에 휩쓸린 것”이라고 평가했다. 수상자인 힌턴 교수조차 기자회견을 통해 “물리학에 존경심을 갖고 있지만, 대학 1학년 때 복잡한 수학을 더는 할 수 없어 물리학을 포기한 터라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는 게 매우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과학자 대부분은 AI 연구의 물리학상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이들의 연구는 물리학, 수학, 화학, 컴퓨터과학, 신경과학 등을 하나로 모은 학제 간 연구라는 점에서다. ‘기계가 학습하는 이유(Why Machines Learn)’의 저자인 아닐 아난타스와미는 네이처닷컴을 통해 “홉필드의 네트워크와 힌턴의 볼츠만 머신은 모두 물리학을 바탕으로 한다”며 “순수한 의미에서 이론 물리학은 아니지만 에너지 같은 물리학의 기술과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인공신경망의 개념은 본래 생물물리학, 통계물리학, 계산물리학 등 세 가지 학문에 걸쳐 있다. 머신러닝의 기초는 통계물리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인공신경망은 뇌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고자 하는 생물물리학에서 시작됐다. 뉴런과 시냅스를 통해 전기적 신호를 전달하는 뇌의 방식을 본떠 인공신경망도 정보를 처리하고 학습하는 시스템으로 발전했다.
단백질 구조 밝히는 AI ‘알파폴드’
1940년대부터 과학자들은 뇌의 뉴런과 시냅스 네트워크를 설명하는 수학 모델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뉴런 사이의 새로운 연결을 만들고 이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동작하는 네트워크를 구성하면 패턴을 인식하는 인공신경망을 만들 수 있다는 추론이 나왔다. 홉필드 교수는 여기에 ‘연관 기억’이라는 개념을 더해 패턴을 기억하는 ‘홉필드 네트워크’를 개발했다. 이 네트워크는 패턴을 저장한 뒤 저장된 패턴을 기억해낼 수 있다. 여기에는 물리학에서 원자가 작은 자석처럼 행동하는 ‘스핀’이라는 개념이 적용됐다. 홉필드 네트워크에 흐릿하거나 불완전한 이미지를 입력하면 네트워크는 단계별로 에너지를 최소화해 저장된 것 중 가장 유사한 이미지를 찾아준다. 홉필드 네트워크가 패턴 매칭만 가능한 데 비해, 힌턴 교수는 새로운 정보를 생성하는 ‘볼츠만 머신’을 개발해 오늘날 수많은 생성형 AI의 씨앗을 뿌렸다. 그는 1984년 19세기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의 이름을 딴 볼츠만 머신을 만들었다. 이 모델은 볼츠만이 개척한 통계물리학의 에너지 역학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머신러닝이라는 개념을 이끌어냈다. 힌턴 교수는 초기 볼츠만 머신을 개선해 좀 더 간소화된 ‘제한 볼츠만 머신’을 개발했고, 역전파(Backpropagation)와 합성곱 신경망(Convolutional Neural Network·CNN) 같은 영향력 있는 알고리즘을 발표했다. 2000년대 힌턴 교수와 그의 동료들은 볼츠만 머신을 사용해 다층 신경망을 사전 훈련한 뒤 추가적인 알고리즘으로 가중치를 미세 조정하는 방식을 개발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층 네트워크는 이후 딥 네트워크로 불리게 됐고, 딥 러닝 혁명의 포문을 열었다.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데이비드 베이커, 데미스 허사비스, 존 점퍼(왼쪽부터). [BBVA 재단 제공]
노벨화학상 또한 AI를 활용한 과학자들이 수상했다.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 최고경영자(CEO)와 존 점퍼 수석연구원은 AI를 사용해 단백질 구조를 예측한 공로로 수상자로 선정됐다. 데이비드 베이커 미국 워싱턴대 생화학과 교수는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새로운 단백질을 발명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허사비스 CEO는 노벨화학상 수상 직후 구글 딥마인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알파폴드가 AI가 과학적 발견을 가속화하는 놀라운 잠재력을 가진 첫 번째 증거가 되기를 바란다”고 소감을 전했다. 그가 설립한 딥마인드는 알파고를 개발해 2016년 이세돌 9단과 세기의 바둑 대전을 펼친 것으로 화제를 모았다. 딥마인드의 목표는 인간 뇌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인공 일반 지능을 만드는 것이다. 그 목표를 달성하고 특정 과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기술 중 하나로 개발된 것이 바로 알파폴드다.
우리 몸에서 만들어지는 단백질은 아미노산 20종이 복잡한 사슬로 연결된 접힘 구조로 이뤄져 있다. 이 3차원 구조는 단백질 기능의 비밀을 품고 있어 약물 개발과 질병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알파폴드는 연구자들이 버튼 하나만 누르면 단백질 구조를 분석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혁명적 도구로 불린다. 알파폴드는 2018년 2년마다 열리는 ‘단백질 구조 예측의 비판적 평가(Critical Assessment of Protein Structure Prediction·CASP)’ 대회에서 우승하며 그 성능을 인정받았다. 노벨화학상 공동 수상자인 점퍼 연구원이 연구에 합류한 뒤 AI 모델을 근본적으로 개혁한 ‘알파폴드2’ 개발을 주도했다. 알파폴드2가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로 훈련받은 결과 지금까지 2억 개의 단백질 구조를 예측할 수 있게 됐으며, 단백질을 구성하는 분자 단위인 아미노산을 이용해 복잡한 구조를 예측하는 50년 된 문제를 해결했다. 알파폴드2는 지금까지 190개국에서 200만 명 넘는 사람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구글 딥마인드는 단백질과 상호작용하는 다른 분자를 모델링할 수 있는 ‘알파폴드3’를 공개했다. 베이커 교수 또한 로제타(Rosetta)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해 새로운 종류의 단백질을 만들고, 알파폴드에서 영감을 받아 AI ‘로제타폴드’를 개발한 바 있다. 알파폴드는 의학, 생명공학, 유전체학 연구에 매우 유용한 ‘게임 체인저’로 불리지만, 이를 통한 연구는 끝이 아닌 시작을 의미한다. 단백질 구조를 매핑하고 조정하는 실험 연구와 기타 접근 방식을 보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AI는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생물학 연구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결과를 가져왔다.
과학에서 AI는 연구의 ‘끝이 아닌 시작’
노벨상은 1901년 처음 수여된 이래 사회에 대한 연구 영향을 강조했다. 순수과학뿐 아니라, 레이저와 PCR(중합효소 연쇄 반응) 같은 실용적인 발명은 물론, 엔지니어링 프로젝트에도 상을 수여한 바 있다. AI 연구에 초점을 맞춘 올해 노벨상 수상 결과 또한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매우 예외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과학 부문을 AI가 휩쓸었다고 해서 노벨상 자체에 큰 변화가 생길 가능성은 적지만, 과학자들은 과학 전반에 걸쳐 AI라는 새로운 기술의 역량에 더 많은 신뢰성을 부여할 것이라고 말한다. 후이민 자오 미국 일리노이대 화학 및 생물분자공학과 의장은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일요판 ‘옵서버’를 통해 “물리학과 화학 분야에서 AI 연구가 연이어 노벨상을 수상함으로써 더 많은 과학자가 AI 활용에 영감을 받을 것”이라며 “과학적 발견을 위한 AI의 잠재력을 깨닫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유튜브와 포털에서 각각 ‘매거진동아’와 ‘투벤저스’를 검색해 팔로잉하시면 기사 외에도 동영상 등 다채로운 투자 정보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