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 업무 중점은 계급투쟁보다 경제건설에 두며 진리의 표준은 실천이다.”
1978년 12월15일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 중앙공작회의 마지막 날. ‘작은 거인’ 덩샤오핑(鄧小平)은 사상해방, 실사구시 방침을 발표한다. 사흘 뒤 11기 3중전회(12월18~22일)에서는 개혁개방이 핵심 의제가 된다.
문화대혁명이라는 ‘극좌의 오류’를 경험했음에도 마오쩌둥(毛澤東)의 위세가 여전하던 그때, 덩은 진리 검증 기준은 마오의 지시가 아니라 ‘실천’이라며 변화를 주장했고, 결국 29개 성(省·현재는 31개) 가운데 27개 성의 지지 선언을 이끌어낸다. 국내총생산(GDP) 2165억 달러, 1인당 GDP 224달러에 불과하던 한 가난한 나라의 역사적 노선 전환이었다. 그로부터 30년 뒤 중국은 GDP 3조2800억 달러, 1인당 GDP 2482달러, 외환보유액 세계 1위(1조9055억6000만 달러)로 경제성장의 대명사가 됐다.
그러나 모두가 중국의 경이적인 경제성장(30년간 연 9.8%)에 감탄할 때, 탈냉전과 세계화의 외풍(外風)을 슬기롭게 막아낸 중국의 대외정책을 눈여겨본 사람은 많지 않다. 안정적, 평화적 국제환경 조성이 경제성장의 필수조건임에도 말이다.
1970년대 소련의 위협이 가시화하면서 중국은 미국과 연대한다. 이른바 ‘연미항소(聯美抗蘇)’.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과 손잡은 것은 개혁개방의 토양을 제공했다.
1989년 6월 톈안먼사건 이후 중국에 대한 서방세계의 인식이 악화되자 덩은 ‘도광양회(韜光養晦)’를 강조한다. “냉정히 관찰하고, 현실 기반을 튼튼히 하며, 침착하게 대처하고, 기회를 기다리면서 앞장서는 일을 피하라(冷靜觀察 … 韜光養晦).” 대내외적으로 어려울 때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르라’는 당부였다.
덩의 뒤를 이은 장쩌민(江澤民)은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르면서’도 ‘할 바는 했다’. 이른바 유소작위(有所作爲). 종합 국력 신장이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나라와 동반자 관계를 강조하며 전방위 외교가 펼쳐졌다. 상하이협력기구(SCO)의 전신인 ‘상하이-5’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등에서 중국이 얼굴을 내민 때도 이즈음이다.
2000년대 들어 후진타오(胡錦濤)를 중심으로 한 제4세대 지도부는 ‘화평굴기(和平堀起)’를 내세운다. “강대국으로서 중국의 자부심을 표현하며 책임과 의무를 다하라!” 패권이 아닌 평화적으로 부상(peaceful rising)한다는 전략이었다. 대외관계 우선순위도 안보·군사 분야에서 경제·통상 분야로 빠르게 바뀌었다. 에너지를 찾아 지도부의 아프리카와 중동 방문이 이어졌고, 폭발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아시아 국가들과의 교역량도 급증했다. 2005년에는 ‘화해세계(和諧世界·조화세계)’라는 화두를 꺼내든다. 빈부격차 등 경제발전의 후유증을 최소화하고,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대립보다 조화로운 국가관계 형성(조화세계 건설)에 주력하겠다는 천명이었다.
이처럼 격변하는 세계질서 속에서도 유연하고 일관된 대외정책이 있었기에 경제성장도 가능했던 것이다.
모든 국가가 추구하는 대외정책의 목표가 국가 생존(survival)과 번영(prosperity) 그리고 영향력 확대(prestige)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어쩌면 중국의 사례는 100년 뒤 ‘국제관계의 교과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사상해방과 실사구시로 인민들의 이념 과잉을 막고 ‘실천’으로 오늘날의 중국을 만든 덩샤오핑, 그리고 30여 년간 안정적 외부환경을 조성한 중국은 실용주의로 좌우대립을 해소하고 경제성장을 이끌겠다는 이명박 정부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1978년 12월15일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 중앙공작회의 마지막 날. ‘작은 거인’ 덩샤오핑(鄧小平)은 사상해방, 실사구시 방침을 발표한다. 사흘 뒤 11기 3중전회(12월18~22일)에서는 개혁개방이 핵심 의제가 된다.
문화대혁명이라는 ‘극좌의 오류’를 경험했음에도 마오쩌둥(毛澤東)의 위세가 여전하던 그때, 덩은 진리 검증 기준은 마오의 지시가 아니라 ‘실천’이라며 변화를 주장했고, 결국 29개 성(省·현재는 31개) 가운데 27개 성의 지지 선언을 이끌어낸다. 국내총생산(GDP) 2165억 달러, 1인당 GDP 224달러에 불과하던 한 가난한 나라의 역사적 노선 전환이었다. 그로부터 30년 뒤 중국은 GDP 3조2800억 달러, 1인당 GDP 2482달러, 외환보유액 세계 1위(1조9055억6000만 달러)로 경제성장의 대명사가 됐다.
그러나 모두가 중국의 경이적인 경제성장(30년간 연 9.8%)에 감탄할 때, 탈냉전과 세계화의 외풍(外風)을 슬기롭게 막아낸 중국의 대외정책을 눈여겨본 사람은 많지 않다. 안정적, 평화적 국제환경 조성이 경제성장의 필수조건임에도 말이다.
1970년대 소련의 위협이 가시화하면서 중국은 미국과 연대한다. 이른바 ‘연미항소(聯美抗蘇)’.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과 손잡은 것은 개혁개방의 토양을 제공했다.
1989년 6월 톈안먼사건 이후 중국에 대한 서방세계의 인식이 악화되자 덩은 ‘도광양회(韜光養晦)’를 강조한다. “냉정히 관찰하고, 현실 기반을 튼튼히 하며, 침착하게 대처하고, 기회를 기다리면서 앞장서는 일을 피하라(冷靜觀察 … 韜光養晦).” 대내외적으로 어려울 때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르라’는 당부였다.
덩의 뒤를 이은 장쩌민(江澤民)은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르면서’도 ‘할 바는 했다’. 이른바 유소작위(有所作爲). 종합 국력 신장이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나라와 동반자 관계를 강조하며 전방위 외교가 펼쳐졌다. 상하이협력기구(SCO)의 전신인 ‘상하이-5’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등에서 중국이 얼굴을 내민 때도 이즈음이다.
2000년대 들어 후진타오(胡錦濤)를 중심으로 한 제4세대 지도부는 ‘화평굴기(和平堀起)’를 내세운다. “강대국으로서 중국의 자부심을 표현하며 책임과 의무를 다하라!” 패권이 아닌 평화적으로 부상(peaceful rising)한다는 전략이었다. 대외관계 우선순위도 안보·군사 분야에서 경제·통상 분야로 빠르게 바뀌었다. 에너지를 찾아 지도부의 아프리카와 중동 방문이 이어졌고, 폭발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아시아 국가들과의 교역량도 급증했다. 2005년에는 ‘화해세계(和諧世界·조화세계)’라는 화두를 꺼내든다. 빈부격차 등 경제발전의 후유증을 최소화하고,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대립보다 조화로운 국가관계 형성(조화세계 건설)에 주력하겠다는 천명이었다.
이처럼 격변하는 세계질서 속에서도 유연하고 일관된 대외정책이 있었기에 경제성장도 가능했던 것이다.
모든 국가가 추구하는 대외정책의 목표가 국가 생존(survival)과 번영(prosperity) 그리고 영향력 확대(prestige)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어쩌면 중국의 사례는 100년 뒤 ‘국제관계의 교과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사상해방과 실사구시로 인민들의 이념 과잉을 막고 ‘실천’으로 오늘날의 중국을 만든 덩샤오핑, 그리고 30여 년간 안정적 외부환경을 조성한 중국은 실용주의로 좌우대립을 해소하고 경제성장을 이끌겠다는 이명박 정부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