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피해자 김모 씨(32)가 2018년 서울 구로구 개봉동 집을 계약할 당시 부동산공인중개사로부터 들은 말이다. 임대인이 집을 몇 채씩 갖고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임대인 K는 수도권에서만 1093채, 약 2190억 원 규모의 전세사기를 친 상습 채무불이행자였다. 그는 지난해 8월 구속됐다. 전세사기가 빈번해지자 주택도시보증공사(HUG)는 ‘안심전세’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상습 채무불이행자(악성임대인)’ 명단을 게시했다. 그러나 해당 명단에 K는 없다. 안심전세 앱 명단이 2023년 9월부터 작성했기 때문이다.
HUG가 제공하는 상습 채무불이행자 명단. 바로가기를 눌러 검색창에 임대인 이름을 검색해볼 수 있다. [‘안심전세’ 앱 캡처]
“전세사기 당할 걸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꿈같았다.” 김 씨가 첫 계약을 떠올리며 말했다. 부동산 중개 플랫폼에서 찾아낸 집은 방 2개가 딸린 10평형(33㎡)에 ‘풀옵션’이었다. 시스템 행거를 갖춘 드레스룸도 있었고, 침대를 포함한 가구를 얹어준다고도 했다. 가격도 비슷한 크기의 다른 집보다 2000만~3000만 원 저렴했다. 신축이고 인테리어도 깔끔해 계약을 결심했다. 그러던 김 씨가 사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계약 만료일이 다가오는 2년 뒤였다. 결혼을 앞두고 신혼집으로 이사 가려고 임대인에게 연락했더니 다음 세입자가 구해질 때까지 보증금을 못 준다는 것이었다. 김 씨 집 앞으로 걸려 있던 가압류만 800억 원이었다. 결국 김 씨는 6년째 이 집에서 살고 있다.
K의 또 다른 피해자 한모 씨(42)도 김 씨와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임대인이 돈이 충분하니 보증금을 돌려받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집을 계약한 한 씨는 2021년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부동산중개소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한 씨는 “계약하려고 부동산 등기등본을 뗐을 땐 깔끔했다”며 “전세사기인 것을 알고 들어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애통해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소송 등 2차 피해 금액도 감수해야 했다. 피해자들은 변호사 수임비용 등으로 800만 원씩을 추가로 냈다. 김 씨는 “보증금 반환 소송에 필요한 법무사 수임료로 100만 원을 썼지만 결국 보증금은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며 “이후 경매 집행 등으로 400만 원, 민사소송 변호사 수임료로 330만 원을 냈다”고 말했다. 한 씨는 “1순위로 돈을 돌려받을 수 있지만, 임대인이 계속해서 돈을 못 주겠다는 입장이라 7년째 이사도 못 가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대규모 전세사기가 빈번하게 일어나자 HUG는 ‘안심전세’ 앱에 악성임대인 명단을 공개하도록 주택도시기금법 개정안을 지난해 9월 시행했다. 이름을 치면 인적사항은 물론, 떼먹은 보증금 액수와 기간까지 상세히 보여준다. 개정안 시행 이후 전세금 미반환 사례가 1건 이상 있고 미반환 전세금 규모가 2억 원 이상인 임대인은 이 명단에 등록된다. 올해 11월 기준 약 900명의 악성임대인 이름이 올라와 있다. 임차인은 임대인 동의 없이 악성임대인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HUG “임의로 추가 못 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집주인의 이름은 해당 명단에서 찾아볼 수 없다. 개정안이 시행되기 전 보증금 미반환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HUG 관계자는 “개정안 시행 전에 있던 일까지 소급으로 적용하진 않는다”며 “국회에서 개정되거나 다른 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임대인 등록 요건을 임의로 바꿀 순 없다”고 말했다. 전세사기 피해자 김 씨는 “계약할 때는 갑구와 을구가 깨끗했다”며 “전세사기를 당해보니 사실상 계약 전 단계에서 전세사기를 막을 방법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명단엔 없지만 상습적으로 대규모 전세사기를 친 임대인은 K만이 아니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손명수 의원이 HUG로부터 제출받은 ‘전세보증 다주택 채무자 상위 10인 현황’ 자료에 따르면 10명 중 6명은 악성임대인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 상위 10명의 대위변제(HUG가 임대인을 대신해 임차인 또는 은행 등 우선순위자에게 대신 보증금을 갚는 행위) 금액만 8563억 원이지만, 회수 금액은 853억 원으로 10%에 그친다. 가장 상위에 있는 채무자 A 씨는 ‘빌라의 신’으로 불렸다. HUG에 신고된 대위변제 건수만 730건인데도 악성임대인 명단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2위인 B 씨 역시 1081억 원을 HUG가 대신 갚았지만, HUG는 단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세입자의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악성임대인 요건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권대중 서강대 일반대학원 부동산학과 교수는 “지난해 9월 전에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고 해도 현재 민형사상 고소가 진행 중인 임대인에 한해 명단에 추가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채원 기자
ycw@donga.com
안녕하세요. 주간동아 윤채원 기자입니다. 눈 크게 뜨고 발로 뛰면서 취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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