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승리로 마무리된 미국 대선이 사상 초유의 ‘초박빙’ 승부로 진행되면서 재계 큰손들의 역대급 ‘통 큰’ 후원도 이어졌다. 미국 경제매체 ‘포브스’에 따르면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와 민주당 대선 후보 카멀라 해리스를 지지한 억만장자(순자산 10억 달러 이상)는 각각 81명, 52명으로 조사됐다. 미 연방선거관리위원회(FEC)에 따르면 10월 중순까지 트럼프 진영은 선거자금 약 17억 달러(약 2조3700억 원)를 모금했다. 이 중 억만장자가 기부한 금액은 34%에 해당하는 5억6800만 달러(약 7900억 원)였다. 해리스 진영(조 바이든 캠프 포함)이 확보한 선거자금은 약 21억5000만 달러(약 2조9900억 원)로 이 가운데 약 6%인 3억9000만 달러(약 5400억 원)가 억만장자들이 낸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비영리단체에 기부한 후원자 신원은 명확히 확인되지 않아 이번 대선에서 실제 모금된 억만장자들의 후원금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론 머스크 트럼프에 1800억 후원
트럼프 전 대통령 지원 유세를 하고 있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왼쪽). 해리스 부통령 지지 단체에 5000만 달러를 기부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뉴시스]
이번 대선에서 가장 많은 돈을 기부한 사람은 ‘은둔 재벌’ 티머시 멜런이다(표 참조). 미국 멜런은행 가문 출신 재력가인 그는 이번 대선 기간 트럼프 슈퍼팩(정치자금 모금 단체)과 공화당에 총 1억6500만 달러(약 2300억 원)를 기부했다. 멜런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슈퍼팩인 마가(MAGA)에만 1억5000만 달러(약 2100억 원)를 후원했다. 트럼프 치어리더로 꼽히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기부금 1억3200만 달러(약 1840억 원)를 웃도는 금액이다.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멜런이 2020년, 2024년 미국 대선 기간에 공화당과 트럼프 슈퍼팩에 낸 기부금은 2억2700만 달러(약 3160억 원)다. 멜런은 트럼프와 만난 적이 없고 특별한 요구사항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를 지지한 또 다른 억만장자는 블룸버그 억만장자지수 기준 세계 1위 부호인 머스크다. 머스크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슈퍼팩 ‘아메리카 팩’을 설립하고 1억1800만 달러(약 1650억 원) 이상을 기부했으며, 공화당의 연방 상원의원 선출을 목표로 하는 슈퍼팩 ‘상원 리더십 펀드’에는 1000만 달러(약 139억 원)를 기부했다. 머스크가 트럼프 선거 운동에 쏟아부은 돈은 1억3200만 달러에 달한다. 또한 머스크는 대선 기간에 주요 경합주 등록 유권자 중 매일 1명을 뽑아 100만 달러(약 14억 원)를 지급하는 이벤트도 진행했다.
카지노 기업 라스베이거스샌즈그룹의 대주주 미리엄 애덜슨도 트럼프에게 1억 달러(약 1390억 원) 이상을 기부했다. 애델슨은 올해 초 500만 달러(약 70억 원)를 시작으로 7~9월 세 달 동안 매월 2500만 달러(약 350억 원)씩을, 9월 말에는 2000만 달러(약 280억 원)를 기부했다. 2021년 남편인 셸던 애델슨 라스베이거스샌즈그룹 회장이 사망한 후 남편 유산을 받은 애덜슨은 보유 자산이 350억 달러(약 48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란성 쌍둥이 암호화폐 사업가인 윙클보스 형제는 트럼프 진영에 200만 달러(약 28억 원) 규모의 비트코인을 기부했다. 윙클보스 형제는 페이스북의 사업 아이디어를 최초로 떠올린 인물로 알려졌고, 현재 암호화폐 거래소 제미니를 운영하고 있다. 이 밖에 트럼프에게 기부한 억만장자로는 아이작 펄머터 전 마블엔터테인먼트 회장과 그의 아내 로라 펄머터, 리즈 유라인 유라인 창업자 등이 있다.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는 막판에 해리스에서 트럼프로 돌아서며 자신이 사주(社主)로 있는 ‘워싱턴포스트(WP)’의 해리스 지지 선언을 막아 논란이 되기도 했다. 과거 민주당 대선 후보를 지지해온 대표 언론인 WP는 이번 대선에서도 해리스를 지지하는 사설 초안을 작성했으나, 이를 베이조스가 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유료 구독자 20만 명이 떨어져 나갔다. 현재 베이조스가 소유한 우주 기업 ‘블루 오리진’은 향후 5년 동안 국가 안보 로켓 발사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에서 머스크의 스페이스X 등과 경쟁하고 있는 상황이다.
빌 게이츠, 해리스 슈퍼팩에 600억 원 기부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로 출마해 47대 대통령에 당선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왼쪽)과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멀카라 해리스 부통령. [뉴시스]
해리스를 지지한 대표 억만장자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다. 게이츠는 그간 대선에서 “나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아니다”라며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이번 대선이 초박빙으로 흐르자 해리스를 지지하는 슈퍼팩인 ‘퓨처포워드’에 비공식적으로 5000만 달러(약 700억 원)를 기부했다. 게이츠는 NYT와 인터뷰에서 “미국과 전 세계의 의료 개선, 빈곤 감소, 기후변화 퇴치에 대한 명확한 의지를 보여주는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다만 게이츠는 헤리스 지지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해리스에게 후원금을 낸 것으로 공식 확인되는 또 다른 억만장자로는 더스틴 모스코비츠 페이스북 공동창업자, 리드 호프먼 링크드인 공동창업자,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 크리스 라슨 리플 공동창업자 등이 있다. 모스코비츠는 해리스를 지지하는 슈퍼팩 퓨처포워드에 3800만 달러(약 530억 원), 해리스 지지단체에 100만 달러(약 14억 원) 이상을 기부했다. 호프먼은 슈퍼팩 퓨처포워드에 1000만 달러(약 140억 원), 전 트럼프 지지자들의 비판 발언을 홍보하는 공화당 팩에 600만 달러(약 84억 원)를 기부했다.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은 1900만 달러(약 270억 원)를, 세계에서 7번째로 큰 암호화폐 ‘리플’ 공동창업자인 라슨은 1180만 달러(약 165억 원)를 해리스 진영에 후원했다. ‘월가의 황제’로 불리는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CEO, 에릭 슈밋 전 구글 CEO, 리드 헤이스팅스 넷플릭스 창업자도 해리스 지지자들이다. 또한 셰릴 샌드버그 전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와 스티브 잡스의 아내 로린 파월 잡스, 빌 게이츠의 전 부인인 멀린다, 월마트 상속녀 크리스티 월턴은 해리스를 지지하는 대표적 여성 억만장자다. ‘포브스’는 해리스 지지자들에 대해 “억만장자 가운데 신흥, IT(정보기술), 여성 부호가 많다”고 분석했다.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와 해리스가 억만장자들로부터 수천억 원에 이르는 후원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정치자금 후원금에 상한을 두지 않는 슈퍼팩(super PAC·특별정치활동위원회) 제도 덕분이다. 최초의 팩은 1944년 미국 산업별노조회의(CIO)가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대통령의 재집권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만들었는데, 당시에는 연간 후원할 수 있는 최대 금액이 5000만 달러(약 650억 원)였다. 이 상한선이 2010년 연방대법원 판결로 사라지면서 무제한 후원이 가능해졌다.
후원금 상한 없는 슈퍼팩
미국 정치감시 시민단체 ‘책임정치센터(CRP)’에 따르면 후원금 상한선이 없어지고 처음 치른 2012년 대선에서 슈퍼팩 관련 선거자금은 20억 달러(약 2조7700억 원)에 달했다. 2016년 대선에서는 약 2400개 달하는 슈퍼팩을 통해 선거자금 약 18억 달러가 모금됐다. 조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가 맞붙은 2020년 미 대선에서는 바이든 대통령 17억 달러, 트럼프 후보 20억 달러 등 총 37억 달러(약 5조1630억 원)가 슈퍼팩으로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