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 남북정상회담의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6월20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에서 ‘황당한 장면’이 벌어졌다. 현직 통일부 장관과 차관이 서로 얼굴을 붉히며 상대가 거짓말쟁이라고 주장했던 것.
논란이 된 것은 김국방위원장이 6월13일 평양 순안공항에 직접 나와 김대통령을 영접한다는 사실을 정부가 사전에 알았는가 몰랐는가 하는 문제였다.
대표단 일원으로 김대통령을 따라 평양을 방문했던 박재규 통일부장관은 “몰랐다. 평양행 비행기 안에서 김영남이 나올지 김용순이 나올지 수행원끼리 내기까지 할 정도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영식 차관은 6월13일 서울프레스센터 오후 브리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순안공항 영접을 우리측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북은 준비접촉에서부터 경호, 호위문제는 쌍방 합의하에 밝히지 않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이 점을 미리 밝히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의원들이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느냐”고 집중 추궁하자 두 사람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박장관은 급기야 “내 성을 걸고 얘기하겠다. 절대 몰랐다”며 극단적인 표현까지 썼고, 양차관은 “브리핑을 임의적으로 할 수는 없다.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라며 항변했다.
이 때문에 통일부는 ‘콩가루집안’이라는 비난까지 받았다. 두 사람은 이때부터 서로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거짓말의 주인공 가리기’는 결론이 필요했고, 결국 양차관이 ‘늑대가 온다고 거짓말을 한 양치기 소년’이 됐다. 양차관은 이틀 뒤인 22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에 출석, “당시 서울에선 김위원장의 일거수일투족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서 “김위원장이 영접 나올 수 있다는 관측이 있던 터여서 ‘알고 있었다’고 발표했다”고 한발 물러섰다. 과연 그랬을까.
당시 평양 우리측 대표단과의 교신은 롯데호텔 내 정부상황실에서 이뤄졌다. 당시 정부상황실에서 일했던 관계기관의 한 인사는 기자에게 “양차관의 말이 진실”이라고 분명하게 증언했다.
그의 얘기는 이랬다. “양차관은 평양의 우리측 상황실에서 보내온 전문을 그대로 기자들에게 전한 것일 뿐이다. 더욱이 평양에서 온 전문에는 박장관의 사인까지 있었다.”
정부상황실에 있었던 또 다른 인사의 말도 비슷했다. 그는 “당시 롯데호텔 정부상황실에 있던 국정원과 통일부 관계자들은 무엇이 진실인지 다 알고 있다. 거짓말을 한 것은 박장관이며 양차관은 애꿎은 희생양이 됐다”면서 “박장관이 국회에 나가 여러 상황상 정상회담 당시에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버텼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관가 주변에서는 이같은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의 배경에 박장관과 양차관 사이의 ‘해묵은 갈등’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두 사람이 이미 몇 가지 일로 ‘갈 데까지 가버린 사이’가 돼 있다는 얘기다.
물론 두 사람이 처음부터 악연을 맺은 것은 아니었다. 박장관의 취임(99년 12월) 직후만 해도 두 사람은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학계 출신 장관과 관료 출신 차관이 썩 괜찮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얘기가 통일부 직원들 사이에 회자되기도 했다.
통일부 직원들은 이런 장면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박장관 부임 초기의 일이다. 통일부 직원조회 때 장관이 앉는 의자는 늘 차관 의자보다 반 보에서 한 보 정도 앞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박장관은 가까이 앉자며 양차관의 의자를 끌어당기곤 했다.
그러나 올 들어 남북대화가 본격화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틈새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박장관이 양차관의 업무 스타일이나 능력문제를 입에 올리는 빈도수가 많아졌다는 것. 하지만 사실은 ‘권력싸움’의 성격이 더욱 짙었다는 게 직원들의 얘기다.
양차관의 존재를 껄끄럽게 여기는 일부 간부인사들이 박장관 앞에서 ‘양차관 헐뜯기’를 계속했고, 결국 박장관도 점차 이들의 말에 귀기울이면서 ‘양영식 이지메’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양차관을 끌어내리는 데 의기투합했던 주역은 차관자리를 노리는 통일부의 고위간부 3인으로 알려졌다.
양차관에 대한 박장관의 불만스런 심사는 남북정상회담 준비접촉 때부터 서서히 밖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이런 얘기도 전해진다. 남측수석대표를 맡은 양차관이 북측 수석대표였던 김영성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참사(단장)와 회담하는 모습을 박장관이 폐쇄회로를 통해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박장관이 “양차관은 하느님 좀 그만 찾으라고 해”라고 벌컥 화를 냈고 이것이 나중에 양차관에게 전달돼 그를 분노케 했다는 것.
사연인즉, 준비접촉에서 양차관이 김영성 참사에게 “노래를 잘하신다면서요”라고 물었다. 김참사가 과거 외국방문 중 노래를 부른 적이 있는데 썩 잘하더라는 얘기를 전해들은 양차관이 건넨 인사였다. 이에 김참사가 양차관도 노래를 즐겨 하느냐고 물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양차관은 “성가대에서 노래를 좀 했습니다”고 답변했다. 이에 가뜩이나 양차관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 불교 신자였던 박장관이 화를 냈다는 얘기다.
더욱 큰 사단은 지난 5월 말 남북정상회담 준비작업을 위해 북한에 파견할 남측 선발대 단장을 임명할 때 발생했다. 업무의 성격이나 연속성을 위해 당연히 양차관이 선발대 단장이 될 것으로 예상됐고 대부분의 언론도 그렇게 예상보도를 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보니 달랐다. 손인교 남북회담 사무국장이 전격 임명된 것. 더욱이 박장관이 양차관에게 일언반구의 협의나 설명 없이 손국장을 임명한 것이어서 양차관은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박장관과 3인의 공세 수위가 더욱 높아진 것은 남북정상회담을 코앞에 둔 6월9일 양차관의 ‘이산가족`-`경협연계’ 발언 파문이 일면서부터다. 양차관은 이날 집권당인 민주당에서 남북정상회담 추진상황을 보고하며 “이산가족과 경협을 연계하겠다”고 언급했다. 이 발언은 북측을 자극할 수도 있는 ‘강성발언’으로 받아들여졌고, 대부분의 언론에 상당히 크게 보도됐다.
파문이 커지자 청와대 박준영 대변인은 이틀 뒤인 6월11일 “양차관의 언급은 김대중 대통령의 생각과 다른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정부 여당 주변에서는 “정상회담만 아니었으면 문책감”이라고 양차관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터져나왔다.
이로 인해 관가 주변에서는 정상회담이 끝나면, 또는 늦어도 다음 개각 때는 양차관이 반드시 경질될 것이라는 얘기가 그럴듯하게 퍼졌고, ‘반(反)양영식’ 입장에 서 있던 이들의 공세도 파상적으로 펼쳐졌다는 전언이다.
특히 박장관은 양차관의 발언파문을 계기로 평양으로 떠나면서 양차관에게 ‘재갈’을 물려 놓았다. 양차관의 ‘입’에 문제가 있다며 정상회담 기간 중 서울프레스센터에서의 발표를 오홍근 국정홍보처장이 하도록 한 것.
그러나 오처장은 “남북문제 전문가가 아니어서 브리핑하기도 어렵고, 질문이 나올 경우 답변할 자신도 없다”며 브리핑을 못하겠다고 버텨 결국 ‘마이크’는 양차관에게 넘어갔다. 6월13일 첫 브리핑은 오처장이 했으나 이후에는 양차관이 계속 브리핑했던 연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이런 둘의 악연이 결국 ‘정부의 한심한 팀워크’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요인이 됐다. 그리고 둘의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게 관가 주변의 시각이다.
논란이 된 것은 김국방위원장이 6월13일 평양 순안공항에 직접 나와 김대통령을 영접한다는 사실을 정부가 사전에 알았는가 몰랐는가 하는 문제였다.
대표단 일원으로 김대통령을 따라 평양을 방문했던 박재규 통일부장관은 “몰랐다. 평양행 비행기 안에서 김영남이 나올지 김용순이 나올지 수행원끼리 내기까지 할 정도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영식 차관은 6월13일 서울프레스센터 오후 브리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순안공항 영접을 우리측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북은 준비접촉에서부터 경호, 호위문제는 쌍방 합의하에 밝히지 않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이 점을 미리 밝히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의원들이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느냐”고 집중 추궁하자 두 사람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박장관은 급기야 “내 성을 걸고 얘기하겠다. 절대 몰랐다”며 극단적인 표현까지 썼고, 양차관은 “브리핑을 임의적으로 할 수는 없다.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라며 항변했다.
이 때문에 통일부는 ‘콩가루집안’이라는 비난까지 받았다. 두 사람은 이때부터 서로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거짓말의 주인공 가리기’는 결론이 필요했고, 결국 양차관이 ‘늑대가 온다고 거짓말을 한 양치기 소년’이 됐다. 양차관은 이틀 뒤인 22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에 출석, “당시 서울에선 김위원장의 일거수일투족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서 “김위원장이 영접 나올 수 있다는 관측이 있던 터여서 ‘알고 있었다’고 발표했다”고 한발 물러섰다. 과연 그랬을까.
당시 평양 우리측 대표단과의 교신은 롯데호텔 내 정부상황실에서 이뤄졌다. 당시 정부상황실에서 일했던 관계기관의 한 인사는 기자에게 “양차관의 말이 진실”이라고 분명하게 증언했다.
그의 얘기는 이랬다. “양차관은 평양의 우리측 상황실에서 보내온 전문을 그대로 기자들에게 전한 것일 뿐이다. 더욱이 평양에서 온 전문에는 박장관의 사인까지 있었다.”
정부상황실에 있었던 또 다른 인사의 말도 비슷했다. 그는 “당시 롯데호텔 정부상황실에 있던 국정원과 통일부 관계자들은 무엇이 진실인지 다 알고 있다. 거짓말을 한 것은 박장관이며 양차관은 애꿎은 희생양이 됐다”면서 “박장관이 국회에 나가 여러 상황상 정상회담 당시에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버텼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관가 주변에서는 이같은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의 배경에 박장관과 양차관 사이의 ‘해묵은 갈등’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두 사람이 이미 몇 가지 일로 ‘갈 데까지 가버린 사이’가 돼 있다는 얘기다.
물론 두 사람이 처음부터 악연을 맺은 것은 아니었다. 박장관의 취임(99년 12월) 직후만 해도 두 사람은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학계 출신 장관과 관료 출신 차관이 썩 괜찮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얘기가 통일부 직원들 사이에 회자되기도 했다.
통일부 직원들은 이런 장면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박장관 부임 초기의 일이다. 통일부 직원조회 때 장관이 앉는 의자는 늘 차관 의자보다 반 보에서 한 보 정도 앞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박장관은 가까이 앉자며 양차관의 의자를 끌어당기곤 했다.
그러나 올 들어 남북대화가 본격화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틈새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박장관이 양차관의 업무 스타일이나 능력문제를 입에 올리는 빈도수가 많아졌다는 것. 하지만 사실은 ‘권력싸움’의 성격이 더욱 짙었다는 게 직원들의 얘기다.
양차관의 존재를 껄끄럽게 여기는 일부 간부인사들이 박장관 앞에서 ‘양차관 헐뜯기’를 계속했고, 결국 박장관도 점차 이들의 말에 귀기울이면서 ‘양영식 이지메’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양차관을 끌어내리는 데 의기투합했던 주역은 차관자리를 노리는 통일부의 고위간부 3인으로 알려졌다.
양차관에 대한 박장관의 불만스런 심사는 남북정상회담 준비접촉 때부터 서서히 밖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이런 얘기도 전해진다. 남측수석대표를 맡은 양차관이 북측 수석대표였던 김영성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참사(단장)와 회담하는 모습을 박장관이 폐쇄회로를 통해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박장관이 “양차관은 하느님 좀 그만 찾으라고 해”라고 벌컥 화를 냈고 이것이 나중에 양차관에게 전달돼 그를 분노케 했다는 것.
사연인즉, 준비접촉에서 양차관이 김영성 참사에게 “노래를 잘하신다면서요”라고 물었다. 김참사가 과거 외국방문 중 노래를 부른 적이 있는데 썩 잘하더라는 얘기를 전해들은 양차관이 건넨 인사였다. 이에 김참사가 양차관도 노래를 즐겨 하느냐고 물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양차관은 “성가대에서 노래를 좀 했습니다”고 답변했다. 이에 가뜩이나 양차관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 불교 신자였던 박장관이 화를 냈다는 얘기다.
더욱 큰 사단은 지난 5월 말 남북정상회담 준비작업을 위해 북한에 파견할 남측 선발대 단장을 임명할 때 발생했다. 업무의 성격이나 연속성을 위해 당연히 양차관이 선발대 단장이 될 것으로 예상됐고 대부분의 언론도 그렇게 예상보도를 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보니 달랐다. 손인교 남북회담 사무국장이 전격 임명된 것. 더욱이 박장관이 양차관에게 일언반구의 협의나 설명 없이 손국장을 임명한 것이어서 양차관은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박장관과 3인의 공세 수위가 더욱 높아진 것은 남북정상회담을 코앞에 둔 6월9일 양차관의 ‘이산가족`-`경협연계’ 발언 파문이 일면서부터다. 양차관은 이날 집권당인 민주당에서 남북정상회담 추진상황을 보고하며 “이산가족과 경협을 연계하겠다”고 언급했다. 이 발언은 북측을 자극할 수도 있는 ‘강성발언’으로 받아들여졌고, 대부분의 언론에 상당히 크게 보도됐다.
파문이 커지자 청와대 박준영 대변인은 이틀 뒤인 6월11일 “양차관의 언급은 김대중 대통령의 생각과 다른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정부 여당 주변에서는 “정상회담만 아니었으면 문책감”이라고 양차관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터져나왔다.
이로 인해 관가 주변에서는 정상회담이 끝나면, 또는 늦어도 다음 개각 때는 양차관이 반드시 경질될 것이라는 얘기가 그럴듯하게 퍼졌고, ‘반(反)양영식’ 입장에 서 있던 이들의 공세도 파상적으로 펼쳐졌다는 전언이다.
특히 박장관은 양차관의 발언파문을 계기로 평양으로 떠나면서 양차관에게 ‘재갈’을 물려 놓았다. 양차관의 ‘입’에 문제가 있다며 정상회담 기간 중 서울프레스센터에서의 발표를 오홍근 국정홍보처장이 하도록 한 것.
그러나 오처장은 “남북문제 전문가가 아니어서 브리핑하기도 어렵고, 질문이 나올 경우 답변할 자신도 없다”며 브리핑을 못하겠다고 버텨 결국 ‘마이크’는 양차관에게 넘어갔다. 6월13일 첫 브리핑은 오처장이 했으나 이후에는 양차관이 계속 브리핑했던 연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이런 둘의 악연이 결국 ‘정부의 한심한 팀워크’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요인이 됐다. 그리고 둘의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게 관가 주변의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