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궁-Ⅱ 누적 수출액 13조 원 육박
한국산 지대공 유도무기체계 천궁 -Ⅱ. [뉴시스]
이라크의 천궁-Ⅱ 도입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이뤄졌다. 이라크가 천궁-Ⅱ 구매 의향을 타진한 것은 올해 초였다. 이라크는 3월 타베트 알아바시 국방장관을 한국으로 보내 신원식 당시 국방장관 측에 천궁-Ⅱ, 수리온 등 한국산 무기 구매 의사를 밝혔다. 알아바시 장관의 방한에 앞서 사미르 자키 후세인 알말리키 육군항공사령관도 한국을 찾아 KUH-1 수리온 기동헬기 구매 논의를 진행했다.
이라크가 갑자기 한국산 무기에 관심을 보인 이유는 냉정하게 말하면 당장 그들의 급한 사정 때문이다. 통상적인 국가라면 지대공미사일과 기동헬기 같은 무기체계를 구입하는 데 수년 동안 타당성 검토나 까다로운 기획, 분석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반면 이라크는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바람에 그야말로 주먹구구식으로 각종 무기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이라크 영공은 타국군의 놀이터가 됐다. 이에 이라크는 급히 지대공미사일 도입을 추진했다. 기존 이라크가 운용하던 러시아제 Mi-8과 Mi-17 기동헬기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후 미국의 대러 제재로 군수지원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라크는 대체 수단으로 수리온을 알아봤지만, 결국 9월 초 프랑스제 H225M ‘카라칼’을 계약했다.
원래 이라크가 지대공미사일 도입 후보로 점찍은 모델은 러시아제 S-400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적대 세력에 대한 통합제재법(CAATSA)’을 근거로 제재를 가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S-400 도입이 어려워지자 이라크는 프랑스제 SAMP/T NG 도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SAMP/T NG는 함대공미사일 ‘아스터-30(Aster-30)’을 육상형으로 개조한 무기다. 최대 120㎞에 달하는 사거리를 지닌 데다, 전술탄도미사일 요격 능력도 갖췄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SAMP/T NG 구매 협상이 틀어지자 이라크는 중국과 FD-2000B 도입 협상을 진행했지만 이마저도 결렬됐다. 중국과 협상이 엎어진지 몇 달 만에 이라크는 한국산 천궁-Ⅱ로 선회했고 구매 의사 타진 6개월 만에 계약서에 서명했다. 통상 무기 거래 협상이 짧아도 1~2년, 길게는 10년 가까이 걸리는 점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듯이 구매 절차가 마무리된 것이다.
사실 이라크는 ‘K-방산’과 악연이 있는 나라다. 2012년 이라크는 체코로부터 L-159 훈련기를 도입하려다 협상이 틀어지자 한국에 T-50 24대 판매를 요청했다. 이라크가 계약한 T-50은 FA-50 사양에 준하는 T-50IQ였다. 미국제 AN/APG-67(v)4 레이더가 탑재되고 단거리공대공미사일과 항공폭탄 운용 능력을 갖춘 경공격기 모델이다. 24대 도입 가격은 21억 달러, 당시 환율로 약 2조2100억 원에 달했다. 대당 920억 원이라는 높은 가격에 방산 수출이 성사된 것이다. K-방산이 올린 큰 성과였지만 이라크는 정상적으로 대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당시 이라크 정부는 “KAI(한국항공우주산업)가 분식회계 의혹 등으로 한국 검찰수사를 받고 있어 대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당시 이라크 재정 상태를 감안하면 대금을 치를 능력이 없어 지급을 미뤘다는 분석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K-방산’과 이라크의 악연
당시 이라크 정부와 지금 이라크 정부는 사실상 같은 세력이다. 모하메드 시아 알수다니 총리는 연정에 참여 중인 ‘법치연합’을 구성하는 이슬람다와당 소속이다. 시아파 정치세력인 이슬람다와당은 이란의 호메이니 혁명을 지지한 바 있다. 또한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이라크 내부에서 반(反)정부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이란과 매우 가까운 관계이며, 동시에 미국에 적대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수다니 총리는 자국에 주둔하는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서방 다국적군은 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 대응 작전을 위해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다. 이들의 존재는 이란의 대(對)이라크 영향력 확대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집권 초부터 미군 주도 다국적군 철수를 추진하던 수다니 총리는 최근 ‘소원’을 이뤘다. 2026년까지 이라크 주둔 다국적군을 철수시키기로 9월 미국과 합의한 것이다. 그는 다국적군 철수를 추진하는 동시에 이라크 정규군이 아닌 ‘인민동원군(PMF)’을 키우기 시작했다. PMF는 주로 시아파 세력으로 이뤄진 민병대 연합조직으로, IS와 싸운다는 명분하에 창설됐다. 현재는 이라크에서 시아파 정치세력의 무장조직으로 자리매김해 정규군보다 더 큰 위세를 떨치고 있다.
PMF는 이란, 북한, 러시아, 시리아와 사실상 동맹관계에 있으며 헤즈볼라, 후티와도 협력하고 있다. PMF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 이후 이라크와 시리아 각지의 미군을 공격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런 상황에서 수다니 총리는 PMF 관련 예산을 확대하고 있다. 지난해 이라크 전체 국방비가 51억 달러(약 6조8000억 원)였는데, PMF에 흘러들어간 정부 예산이 27억 달러(약 3조6000억 원)에 달한다. 11만 명이던 PMF 병력은 수다니 총리 집권 2년 동안 23만 명으로 불어났다.
그렇다면 한국은 이라크 수다니 정부가 왜 중거리 방공무기를 급히 도입하려 했는지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한 이후 이라크에는 이렇다 할 방공무기 소요가 없었다. 그런 이라크가 반미 성향의 수다니 총리가 집권한 후 중거리 방공무기 도입에 나선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라크는 현재 ‘외부 위협’이 사실상 없는 나라다. 수다니 총리 집권 후 이란과는 더할 나위 없이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가 통치하는 시리아와도 동맹 관계를 맺고 있다. 인접한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쿠웨이트 모두 이라크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 중이다. 이들 나라가 공군이나 탄도미사일을 사용해 이라크를 공격할 만한 가능성은 사실상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라크가 중거리 방공무기를 가지려는 이유는 주변국 때문이 아니라, 자국 영공을 휘젓고 다니는 외국 항공기를 공격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리고 그 외국 항공기란 미국과 영국, 이스라엘 군용기를 말한다.
美 항공기 공격 막을 수 있는 안전장치 필요
9월 23일(현지 시간) 이스라엘군이 친이란 무장정파 헤즈볼라를 겨냥해 레바논 남부를 공습했다. 최근 중동 정세는 첨예한 갈등 국면에 놓여 있다. [뉴시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이라크 측 요구를 모두 들어주려는 한국 정부의 협상 태도다. 이라크가 천궁-Ⅱ 3개 포대를 조기에 공급해달라고 요구하자 한국은 2개 포대를 조기 납품할 수 있다고 회신했다고 한다. 다른 무기 수출 사례와 마찬가지로 조기 납품 물량은 한국군 몫을 수출용으로 돌린 것이다. 당장 북한이 초대형 방사포와 고위력 탄도미사일 대량 배치를 선언하며 위협 수위를 높이고 있다. 단 1발이 아쉬운 요격 미사일을, 그것도 우리 동맹국을 적대시하는 국가에 조기 납품하기 위해 전용(轉用)하려 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라크와 천궁-Ⅱ 수출 계약은 ‘방산 수출 쾌거’ ‘잭팟’ 같은 표현으로 포장할 일이 아니다. 이 계약이 한국 국익과 안보에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 냉철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한국군에 들어갈 요격무기를 빼내 수출하면 당장 안보에 구멍이 뚫린다. 게다가 우리가 수출한 미사일이 미군을 공격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천궁-Ⅱ를 꼭 이라크에 팔아야겠다면 한국 정부는 이라크 수출용 미사일에 제거 불가능한 안전장치를 필히 붙여야 한다. 사격통제시스템에 피아식별장치를 보강해 미국 군용기나 민항기를 조준할 수 없게 조치해야 한다. 이는 천궁-Ⅱ 이라크 수출이 미국에 ‘배신’으로 비치지 않도록 취해야 할 최소한의 조치다.
정부가 천궁-Ⅱ 이라크 수출을 승인하는 과정에서 이라크 정치 상황과 중동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면 이는 ‘무능’이다. 현지 상황을 알면서도 수출을 승인했다면 이는 대한민국 생존과 번영의 바탕인 한미동맹을 위협하는 더 심각한 무능이다. 북한 핵미사일 위협이 점점 커지는 상황에서 이를 막을 무기를 수출하기에 급급하다면 이 또한 직권남용에 가까운 무능이다. 방산 수출이라는 미명하에 선전용 치적을 쌓느라 더 중요한 국익을 해쳐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