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안철민 기자]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전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사진)은 동아일보사 부설 화정평화재단·21세기평화연구소(이사장 남시욱)가 11월 27일 개최한 제5회 화정 국가대전략 월례강좌 ‘한미동맹과 북핵’ 주제 강연에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천 이사장은 또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하고 대북제재 수위를 점진적으로 높이는 지금의 접근법은 성공하기 어렵다. 대북제재가 경제 전면 봉쇄 수준으로 확대되고, 숨 막힐 정도의 제재로 김정은이 버틸 수 없게 해야 비핵화 길이 열린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이번 주제 강연의 주요 내용이다.
일부는 “동맹이 왜 필요한가”라고 말한다. 지난 60년여 동안 한미동맹이 지속되다 보니 동맹을 공기처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국제관계를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건 힘의 논리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은 불확실하고 위태롭다. 이에 대한 보험이 바로 동맹이다. 특히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고, 강대국이 탐내는 전략적 요충지에 있는 나라일수록 전략적 보험이 필요하다. 강한 나라의 힘을 빌려 주권과 독립을 지키는 게 동맹이다.
한미동맹은 중국에 대응할 확실한 카드
한반도 영토에 야심이 없고 공동안보에 대한 이해관계를 가진 나라가 우리 동맹으로 가장 적합하다. 우리와 안보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나라는 동맹이 될 수 없다. 동맹에서 가장 중요한 건 위협을 같이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이 동맹의 미래를 좌우한다. 당장 눈앞에 닥친 위협은 북핵이다. 북핵을 넘어, 지역 전체에서 오는 한반도 위협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패권세력이다. 신흥 패권세력이 등장할 때마다 한반도 침탈 또는 지배 시도를 했다. 한반도는 전략적 공시지가가 높다. 과거 우리가 패권세력을 독자적으로 견제할 능력이 없을 때는 속국이 되거나 식민지배를 당했다.앞으로 동북아 패권세력은 누구인가. 우리는 과거 유령에 홀려 일본의 재무장 움직임을 크게 걱정한다. 하지만 미래를 보면 동아시아 패권세력은 중국이다. 중국적 질서 위협에 가장 큰 피해가 예상되는 나라가 한국이다.
20세기 전반까지 지정학적 숙명이 동아시아를 지배했다. 20세기 동아시아 지정학에서 가장 큰 변화는 역외세력과 동맹이다. 미국이 동아시아에 등장함으로써 한반도는 수천 년간 이어지던 지정학적 숙명에서 해방됐다. 미국은 일본의 재기를 제어하고 러시아와 중국의 동아시아 지배를 막았다. 우리 처지에서는 과거에는 생각할 수 없던 안보정책 옵션이 생긴 셈이다. 즉 역외세력을 통해 역내세력의 침탈을 막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한(11월 7~8일)이 한미동맹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연출과 메시지 관리 차원에서 괜찮아 보인다. 미국이 원하던 한반도 비핵화 목표를 대외적으로 전달하고, 중국을 향해 한미동맹에 이상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행보였다. 그러나 멀쩡한 겉포장보다 속이 어떠냐가 중요하다. 동맹은 속이 병들면 소용없다. 최근 우리 정부의 언급을 들여다보면 한미동맹에 중병이 들었을 때 보이는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동맹의 생명은 신뢰와 위협인식의 공통성이다. 신뢰가 없으면 지금 얘기해도 나중에는 해석이 달라진다. 그럼 전략적 교감과 공조를 이룰 수 없다.
한중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문제 해결을 위해 세운 ‘3불(不) 원칙’은 안보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나라와 공동 어젠다를 만든 것이 문제다. 우리가 사드 추가 배치를 안 하고 미국 미사일방어(MD)체계에 들어갈 생각이 없다고 치자. 그렇다 해도 이것을 중국의 결재 사항으로 넘겨주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일이다. 인도·태평양 전략을 둘러싼 한미 간 엇박자도 중국을 위협으로 인식하는 정도에 차이가 있음을 노출한 것이다. 향후 아시아 안보질서를 재편하고 평화와 안정을 흔들 패권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안보 전략 차원에서 어느 나라와 손잡을 것인가. 중국의 패권적 횡포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국가들의 전략적 공조 필요성에 대해 잘 생각해봐야 된다.
북한이 6차 핵실험을 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쏜 상황에서 평화적 해결이 가능할까. 김정은에게 핵보다 중요한 것이 생존이다. 생존을 위협할 수준의 압박 없이는 김정은이 핵을 내놓을 이유가 없다. 테러지원국 재지정, 점진적 제재 수위 증강 같은 현 접근법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 대북제재가 경제 전면 봉쇄 수준으로 확대되고, 숨 막힐 정도의 제재를 통해 김정은이 버틸 수 없게 해야 비핵화 길이 열린다.
북 질식시킬 제재 가해야 비핵화 가능
김정은이 미국 본토까지 위협할 수 있는 핵미사일 능력을 확실히 보여준 다음 북·미 간 딜을 시도할 수 있다. 북한은 미국 본토 공격용 ICBM 배치 포기를 조건으로 내걸고 한국, 일본, 괌을 공격할 핵미사일 능력을 유지하게 해달라고 할 것이다. 또한 핵실험 중단과 동결 대가로 최소한 경제제재 해제 및 지원, 한미 군사훈련 중단 등을 요구할 수 있다.앞으로 북한이 대화의 장으로 나올 상황은 3가지다. △첫째, ICBM 완성에 필요한 실험 완료 △둘째, 대북제재가 경제 전면 봉쇄 수준으로 강화될 경우 숨 고르는 차원에서 협상 제시 △셋째, 미국의 선제공격이 임박했다고 판단될 때 ‘우리가 협상 안 하자고 했느냐’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걱정은 트럼프 대통령이 완전한 비핵화를 공언했고 결기도 대단해 보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약화될 개연성이 높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임기 내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으면 비핵화 공약 없는 동결 수용 여부를 둘러싸고 한미일 공조체제가 위기를 맞을 공산이 크다.
북핵 동결은 비핵화 입구로서는 괜찮지만, 비핵화에 모든 카드를 다 써버리면 나중에 쓸 카드가 없어진다. 동결이 입구이자 출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미국에게는 도움이 되나, 한국과 일본을 상대로 한 위협 해소에는 도움이 안 된다.
지금까지는 북한이 심각하게 타격을 입을 만한 치명적인 제재가 없었다. 제재와 대화를 이분법적 혹은 양자택일로 보는 것이 문제다. 제재 동력이 커지면 협상으로 전환한다. 즉 제재가 임계치에 도달하면 협상을 시작하는 것이다. 북한이 경제적 질식 상태에서 협상에 나올 경우 제재가 강할수록 협상 레버리지는 강화된다. 북한이 제재를 버틸 수 있는 상황에서 대화에 복귀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최악이다. 북한 요구에 속수무책으로 끌려 다니는 협상이 될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북한이 비핵화 협상에 나올 경우 핵능력이 훨씬 진전된 만큼 요구하는 바도 많으리라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미국이 핵실험 중단과 동결로 타협하자는 상황은 물론, 일본과 어떻게 공조할지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비핵화 공약을 받아내더라도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는 부분을 확실히 해야 핵 동결 유지에 허비되는 시간을 방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