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나는 살인자입니다’라는 제목을 보면 영화 ‘살인의 추억’ 같은 연쇄 살인마가 등장하는 스릴러 영화가 떠오른다. 하지만 이러한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현대의 이솝’으로 불리는 SF소설가 호시 신이치(1926~97)의 ‘쇼트쇼트’(short-short · 기존 단편보다 짧은 초단편소설) 1000여 편 중 죽음과 관련된 8개 작품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만든 연극이다.
일본 SF소설의 황금시대를 연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호시는 대표적인 ‘금수저’로, 아버지는 호시제약 창업자이고 어머니는 당대 최고 지식인 집안 출신이었다. 덕분에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어두운 정세에도 풍요로운 경제적 환경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도쿄대 대학원 재학 시절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이어받게 된 가업(家業)의 경영은 그의 ‘꽃밭 속 학자 스타일’과는 안 맞았다. 매도 맞아본 사람이 맞는다. 회사는 순식간에 부도가 났고 그는 나락으로 떨어지며 무너졌다. 인생 최대 위기에 봉착한 그는 그 시절을 떠올리기조차 싫어했다. 이 암울하고 허무적인 경험은 그의 소설 곳곳에 배어 있다. 이것이 오히려 그의 소설이 가진 독특한 매력으로 손꼽힌다.
그의 작품은 ‘무섹스, 무폭력, 무시사’라는 3무(無)의 냉소적 철학을 따른다. 그렇다고 이 3가지가 그의 소설 속에 전혀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과도한 성적 묘사와 과격한 폭력 묘사를 최대한 자제하면서 평이하고 건조한 문장만 간결하게 사용했다. 어찌 보면 그의 작품을 심심풀이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하찮은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와 미래를 오가는 기발한 퍼즐 속에서 그의 기상천외한 발상과 촌철살인의 반전에 독자는 허를 찔린다.
연극을 문학처럼 무대에 올리는 연출자 전인철은 호시의 차가운 ‘3무(無)’ 정신에 세련된 무대감각을 불어넣어 정답고 친근한 작품을 선사한다.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인구조절’ 임무를 맡은 공무원이 결국 자신을 ‘인구조절’해야만 하는 아이러니를 제시하는 ‘생활유지부’, 스스로 은둔에 들어갔다 세상에서 완벽하게 잊힌 청년을 그린 ‘수많은 금기’, 술 접대를 위해 만들어진 완벽한 미모의 로봇 이야기를 그린 ‘봇코짱’, 13일의 금요일에 잡은 연약한 악마가 결국에는 인간을 파멸시키고 마는 ‘거울’, 분해되지 못하고 우주에 버려진 로봇들의 힘겨운 이야기를 담은 ‘어슴푸레한 별에서’ 등 8개 작품이 ‘나는 살인자입니다’에 포함돼 있다.
전인철의 팔색조 무대언어는 관객의 가슴에 잔잔하지만 깊은 메아리를 남긴다. 그의 인간미 넘치는 터치로 만들어지는 외로움, 공포, 고통을 보며 2017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든 빛에는 그림자가 따른다’는 역설을 다시금 차분히 사색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