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DB]
이후 김씨는 ‘투명한 아파트 문화를 만들겠다’며 서울 옥수동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으로 출마, 당선했다. 그런데 그가 최근 돌연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을 그만둔다는 플래카드를 아파트에 내걸었다. 그것도 ‘007’ 작전하듯 한밤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한민국 아파트 비리를 고발한 게 사람을 이렇게 힘들 게 할 줄 미처 몰랐네요. 난방열사는 망했어요. 이제 안 하려고요.”
최근 서울 옥수동 ◯◯◯아파트 자택에서 만난 김씨는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다. 안방에는 각종 소송서류와 아파트 법령집이 켜켜이 쌓여 있었고, 거실에는 최근 소송 서류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놓여 있었다. 누렇게 바랜 2013년 난방비 ‘0원’ 가구 서류는 물을 쏟은 듯 자국이 선명했다.
김부선 씨가 최근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을 그만둔다는 내용이 담긴 플래카드를 설치하고 있다. [사진 제공·김부선]
불의에 초연하게…
“(소송) 서류를 보면 제가 한숨을 내쉬니 집에서 기르는 개도 싫은가 봐요. 서류만 눈에 띄면 그냥 볼일을 보네요.”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모습에 체념의 상흔(傷痕)이 묻어났다. 아파트 관리비 비리와 전쟁 내막은 5시간 인터뷰로도 부족해 11월 29일까지 간헐적으로 전화 인터뷰를 이어갔다. 다음은 그와 일문일답.
김부선 씨 집 거실에는 소송장이 쌓여 있다. [지호영 기자]
“괴롭다. 투명한 아파트 문화를 만들려고 나섰지만 지난 3년간 검찰과 경찰에 불려 다니면서 너무 힘들었다. 불의에 맞선 결과는 불행 그 자체다. 이젠 불의에도 초연해지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 일부 주민과 소송 때문인가.
“회장이 되고 나서도 아무것도 못하겠더라. 2014년 이른바 ‘난방비리’를 폭로해 이웃들이 도둑질당하는 난방비를 잡아냈고, 그해 10억 원이 든다는 개별난방 공사도 사업설명회를 통해 4억 원에 계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온수요금, 난방비를 안 낸 사람들은 나를 ‘가해자’로 몰아갔고, 주민설명회를 하면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해 그걸 제지하는 과정에서 몸싸움이 나고, 명예훼손 소송에 불려 나가고….”
▼ 난방비 문제는 2015년 구청과 경찰 조사에서 결과가 나오지 않았나.
“난방비가 아주 적거나 ‘0원’인 가구주들의 정당한 소명을 원했지만 ‘여행을 다녀왔다’ ‘난방을 끄고 살았다’ 같은 답변을 들었다. 여행을 다녀왔다면 비자 서류 같은 증빙을 내면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해보라. 집에 아무도 없거나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검침원은 외부에 달린 열량계를 보고 검침하고 요금을 부과한다. 그런데 실제 사용량을 알려주는 내부 기기(메인 검침기) 연결선을 끊으면 난방을 해도 외부 열량계 숫자는 그대로다. 검침 기록이 지난달과 같다면 당연히 연락해서 확인하고, 지난해 동월 기준 요금을 내라고 하던가 하는 조치를 취했어야 한다. 그러니 주민들이 전직 동대표나 아파트 간부들, 관리사무소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 거다. 2015년 5월 성동구청이 합동조사를 했을 때 참여한 인사에게 들어보니 ‘회계 서버 문제는 누군가에 의해 수정된 것으로 보여 회계감사를 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 당시 구청은 이 대목은 빼고 장기수선충당금 문제 등을 발표했다.”
▼ 누군가 회계장부에 손을 댔으면 기록이 남을 거 아닌가.
“서버 로그기록을 아무나 볼 수 없으니 조사에 한계가 있는 거 같다. 이 문제를 제대로 파헤치지 못하니 주민 갈등만 양산되고…. 그래서 ‘이건 아니다’ 싶어 2016년 초 난생처음 동대표와 회장에 출마했다. 한번 바꿔보려고.”
▼ 결과는 좋았는데.
“과거 임원을 했던 사람이 다시 회장 선거에 나왔는데, 그 사람은 중임제한 조항에 걸려 동대표 당선이 무효가 됐다. 그래서 동대표로 단독 출마해 당선했다. 그 과정에서 전 부녀회장은 나를 보고 ‘개X 안 치우는 여자다’ ‘회장 자격이 없다’고 소리쳤다 명예훼손 등으로 1심에서 벌금 300만 원 처분을 받았다. 다른 전임 동대표는 회식 자리에서 ‘김부선 씨가 몸 팔아 연예활동을 한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해 벌금 100만 원 약식명령 판결을 받았다. 이게 뭐하는 건지….나도 명예훼손으로 소송당하고,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 지금까지 500만 원가량을 병원비로 썼다. 그래서 민사소송을 청구해 승소하기도 했다.”
김씨는 2014년 자신이 사는 아파트의 난방비 비리 의혹을 폭로하는 과정에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전·현직 동대표들 난방비 처참’이란 글을 올려 150만 원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아파트 난방 방식을 논하는 자리에서 전 부녀회장 윤씨와 몸싸움을 벌여 쌍방 상해혐의로 벌금형을 받는 등 여러 차례 법원을 오갔다.
김씨와 일부 주민 간 갈등의 골은 깊어 보였다. 이는 김씨가 과거 폭로한 난방비 문제가 바탕에 깔려 있다. 2011년 각 가구마다 난방비가 천양지차고, 심지어 ‘0원’인 가구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씨는 여러 경로를 통해 문제를 제기했다. 2013년 겨울 서울시가 이 아파트를 대상으로 최근 7년간 겨울철 난방비 전수조사를 한 결과 난방비가 ‘0원’으로 측정된 건수는 300건, 9만 원 이하인 경우는 2398건이 적발됐다. 이후 경찰은 이 아파트 전체 530가구 가운데 2007년부터 7년간 두 차례 이상 난방비 ‘0원’이던 69가구를 조사했지만 △사기혐의 공소시효 지남(11가구) △열량계 조작이 의심되지만 증거를 못 찾음(11가구) △열량계 고장과 배터리 수명이 다함(18가구) 등의 결과를 내놨다. 열량계를 싼 봉인지의 부착·관리가 부실하고, 검침카드나 기관실 근무일지가 꼼꼼하게 기록돼 있지 않아 조작 여부나 주체를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어 형사입건이 불가능했다. 다만 열량계 고장 여부를 확인하지 않아 난방비를 제대로 부과하지 않은 혐의로 아파트 전직 관리소장 A씨 등 3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사태 해결을 바랐지만, 난방비를 적게 낸 입주민들과 상대적으로 많이 낸 입주민들 간 골은 더욱 깊어졌다. 10월 26일 만난 이 아파트 입주민의 말은 이렇다.
“2014년 연말 즈음 난방비 문제로 주민회의를 했는데, (난방비를) 적게 낸 사람 중에는 전 동대표가 많았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회의에 잘 참여하지 않던 주민들까지 와 ‘해먹은 거 뱉어내라’고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경찰 조사에서 ‘의심은 가지만’ 딱히 밝혀내지 못했으니 대놓고 비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때 이후 아파트 주민 간 앙금이 계속되는 거 같다.”
다시 인터뷰로 돌아가보자.
‘김부선 탄핵’ 신청, 法院은 기각
11월 6일 총무이사 명의로 내걸린 공고문. 김부선 회장 해임 절차 진행 요청건도 담겼다.
“천만에. 2016년 3월 1일 회장 업무가 시작되던 날 한 신문에 내가 ‘관리소장 성기를 가격했다’는 황당한 기사가 났다. 그해 2월 19일 관리사무소장을 찾아가 난방비 관련 문서를 요청하는 과정에서 바지 주머니를 끌어당긴 것을 ‘관리소장 급소를 가격했다’고 하더라. 경찰 입회하에 폐쇄회로(CC)TV 동영상을 확보해 제출했고, 신문사는 정정기사를 냈다. 10년간 안 먹던 심장약을 이때 다시 먹기 시작했다. 연예인도 인권이란 게 있다. 이후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비상대책위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내가 비리를 저지르는 듯한 공고문을 게시하더니 결국 탄핵에 나서더라.”
▼ 탄핵이라면 회장 해임투표 말인가.
“그렇다. 비상대책위원회에는 이른바 ‘난방비리 사건’과 관련된 전직 임원이 많았는데, 그들이 나서 입주민 76명 명의로 회장 해임투표안(입주민 10분의 1 이상 서명)을 아파트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에 제출했다. 선관위가 ‘검토할 이유가 없다’고 기각하자 민사재판을 청구했다. 그런데 서명한 76명을 확인하니 서명자들이 중복 서명하거나, 존재를 알 수 없는 명의까지 나와 항소심에서도 기각됐다.”
‘주간동아’가 입수한 1, 2심 판결문에 따르면 채권자 조◯◯ 씨는 ‘김부선 회장이 관리업체에 압력을 행사해 관리소장과 관리반장 등 관리 직원을 교체하고, CCTV 녹화 내용을 무단 열람하고, 고장 난 출입구와 CCTV 수리비를 지급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주민 76명의 동의를 받아 해임투표 절차 진행 가처분 신청을 냈다. 그러나 재판부 결정은 달랐다.
‘아파트 선관위가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해임 절차를 진행하지 않더라도 선관위와 별개 단체인 채무자(김부선 회장)에게 해임 절차를 진행할 의무가 없고, 관리업체 직원에 대한 부당한 행위는 전 부녀회장이 한 행위이며, 76장의 주민 서면동의서도 중복 제출했거나 입주자 명부 등재가 안 된 사람의 서명이 있고, 해임 사유를 모른 채 서명하는 등 46장이 무효이며 30장만 유효한 만큼 이를 기각한다.’
▼ 그사이 관할 구청의 중재나 개입은 없었나.
“여러 차례 사건 해결을 요청했다. 그런데 오히려 이상한 공문서를 보냈더라.”
▼ 이상한 공문서?
“‘회장 해임 요청건이 입주민 10분의 1 이상 동의를 얻어 아파트 선관위에 제출됐으니 조속히 추진돼 민원이 해결될 수 있도록 하라’는 ‘선거관리업무 관련 민원사항에 대한 행정지도’ 공문(아래)이었다. 이 공문은 지난해 해임을 시도할 때 아파트로 보낸 공문(1번 공문)과 똑같았는데, 이상하게도 구청장 직인과 접수 날짜, 담당 주무관·팀장·과장 서명이 없었다(2번 공문). 그런데 아파트 관리소의 ‘2017. 8. 25 접수’ 도장과 직원 서명이 써 있으니 재차 행정지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법부 판단을 기다리는데 뜬금없이 회장 해임투표를 촉구하는 공문을 보낸 거다. 이런 공문을 선관위원들이 열람하면 그들이 받을 압박감은 누가 책임지나. 결국 법원은 선관위가 진행할 사안이 아니라고 판결했는데 말이다. 이건 해임에 나선 사람들을 도와주려는 의도 외에는 달리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파트) 관리사무소도 마찬가지다.”
성동구청이 ◯◯◯아파트에 보낸 공문. 지난해 보낸 공문에는 직인이 찍혀 있다.
“내 집은 2016년 2월부터 아파트 방송이 나오지 않고 인터폰도 안 된다. 어떤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을 거다. 관리소장은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인 나와 상의 없이 공고를 냈는데, 나의 직인은 생략했더라. 사문서 위조가 아닌가(성동구청은 관리소장 월권·위법행위에 대한 행정조치 공문을 보냈다). 회계감사 결과 4700여만 원을 환수받아야 하는데 회계감사보고서를 입주민들에게 공개하지 않고, 변호사 비용에 대해서도 협조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나. 그래서 서울시에 위탁관리를 맡기려고 ‘서울시 민간아파트 공공위탁관리 아파트’로 선정되기 위해 정문 앞에서 직접 서명을 받았다. 전체 주민의 70%에 육박하는 서명을 받았고, 주민들은 ‘수고하는데 도와드리지 못해 미안하다’며 음료수와 빵을 건넸다. 어찌나 고맙던지…. 공공위탁관리를 맡기려고 노력하니 변화가 생기더라.”
김부선 씨가 입주한 아파트 전경. [지호영 기자]
“입주민 무관심이 장기집권 불러”
▼ 어떤 변화인가. “그동안 동대표 선거에 나서는 후보가 없었는데 대거 선거에 나왔고, 이후 공공위탁관리 반대 서명을 주도하더라. 공공위탁관리를 하면 시에서 책임지는 만큼 회계가 투명해지고 아파트가 더 발전하는 거 아닌가. 이 문제는 서울시와 상의하고 있다. 그런데 입주자대표로서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1년 9개월 동안 관리소장들의 일방적인 결재 요구만 확인하느라 허송세월을 보냈다. 투명한 아파트 만들어보겠다고 나섰다 폭행죄에 명예훼손 등으로 어느새 전과 5범이 됐다.”
그는 식탁에 놓인 심장약 한 알을 꺼내 입안에 넣더니 답답한 듯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눈물이 식탁으로 뚝뚝 떨어졌다. 기자는 말없이 티슈 한 장을 건넸다.
“사비 200여만 원을 털어 전문가를 초청해 부당 지출을 감시한 것은 물론, 3000만 원 넘게 소송비용을 썼다. 인기로 먹고사는 연예인이 ‘가짜뉴스’에 시달렸고, 주민과 다툼을 해도 내가 승소한 기사는 안 나오고…. 딸은 매일 ‘당장 회장 그만두고 고향(제주)에 가서 쉬어야 한다’고 호소한다.”
▼ 아파트 비리와 관련된 일이라 해도 어쨌든 폭행은 용납할 수 없는 거 아닌가.
“내가 성격이 좀 급한 건 사실이다. 그래도 정직성만큼은 하늘이 안다. 전 부녀회장과 쌍방 폭행건도 그렇다. 흥분해서 몸싸움을 했지만 그때는 정당방위라고 생각했다. 나도 어지간히 뭘 몰랐지.(웃음) 언론에서 ‘소장 급소 가격’했다기에 CCTV 동영상을 제출했더니 급소 얘기는 쏙 들어가고 주머니 잡고 당긴 것을 폭행으로 판결하더라. 벌금 50만 원 선고받았다. 좋은 경험했다.”
“이제 좀 쉬고 싶다”
김부선 회장 해임투표절차 진행 가처분 신청을 기각한 서울 고법 판결문. [지호영 기자]
“그러한 ‘은밀한 제안’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다. 중앙난방에서 개별난방으로 바꿀 때 아파트 입찰 시스템을 알게 됐는데, 나는 구청관계자와 언론인 등이 참여한 공개설명회를 열었다. 그랬더니 10억 원짜리 공사를 4억 원에 할 수 있었다. ‘제안’을 기대한 사람들은 서운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혜택은 입주민 전체가 봤다. ‘보일러 한 대 (무료로) 놓아드리겠다’고 한 사람도 있었는데 거절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명절에 인사차 봉투를 건네는 것도 거절했다. 생각해보니 아파트 비리를 키우는 건 입주민의 무관심이다. 입 벌리고 누워 있으면 감이 떨어지나. 무관심은 결국 ‘해먹은 사람들이 또 해먹는’ 아파트 임원의 장기집권을 부르고, 이는 곧 부패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나는 이제 좀 쉬고 싶다. 명색이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인데 야밤에 나 혼자 플래카드를 달았다. 나는 할 만큼 했다.”
한편 주간동아 확인 결과 8월 25일 성동구청이 옥수동 ◯◯◯아파트 관리소장에게 보낸 공문은 2016년 9월 2일 발송한 것이었다(13쪽 공문 참조). 김씨의 주장처럼 구청장 직인과 담당 공무원 결재란은 공란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는 2017년 8월 25일 아파트 관리사무소 접수 도장만 눈에 띄는 만큼 당연히 올해 보내온 공문으로 생각될 듯 했다.
‘요청을 받은 선거관리위원회는 해임절차를 진행해야 한다’는 문구는 김씨의 말처럼 선관위원에겐 큰 부담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성동구청 관계자는 “관리소장의 요청이 있어 단순히 내용 확인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 직인 등이 없는 문서를 관리사무소 측에 다시 보냈는데, 민원 제기가 있어 입주민들의 오해 여지가 없도록 문서 수정 요구 및 재발 방지에 대한 행정지도를 했다”고 밝혔다.
회계 서버와 관련한 김씨의 지적에 대해서는 “주택관리사 등 전문가를 불러 확인했는데 구체적인 서버 수정 관련 내용을 파악할 수 없었다”며 “회계장부 수정이 의심된다면 수사의뢰를 해야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