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만 헤어져.”
이별을 앞둔 연인은 상대에게 이 한마디를 건넬 용기가 필요하다. 어느 쪽이든 상처를 받게 마련이고, 충격과 고통을 감내하는 일은 남은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별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이별 이후 삶은 꽤 힘들다. 병을 앓는 것처럼 매사에 집중할 수 없고 기운이 빠지는 등 하루하루가 고통스럽다.
혼자 이런 고통을 극복하려는 사람은 그나마 양반이다. 경우에 따라 술을 마신 뒤 헤어진 연인에게 전화를 걸어 통곡하고 문자메시지로 돌아오라고 애원한다. 심지어 집 앞이나 학교, 직장으로 찾아가기도 하고 연인의 친구나 가족에게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읍소한다. 이별 후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당사자는 스스로가 영화 속 주인공처럼 느껴지겠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이의 눈에는 결코 로맨틱하지 않다.
20, 30대 여성들 사이에서 이런 경험은 흔한 일이다. 겉으로 멋져 보여 사귀었는데 헤어지자고 얘기한 순간 돌변하는 사람이 적잖기 때문이다. 20대 중반 직장인 A씨(여)는 몇 해 전 사귀던 사람과 헤어진 후 지금까지 애인이 없다. 전 남자친구는 대학생 때 친구 소개로 사귀었는데, 관계가 소원해져 이별을 통보하자 학교로 매일같이 A씨를 찾아왔다. 학교 축제 때도 와 안면이 있는 A씨의 친구들에게 “A는 지금 어디 있느냐”며 찾아대는 통에 학교 밖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그는 “사귈 때는 평범한 남자애 정도로 생각했지, 그렇게 집착이 심할 줄은 몰랐다. 굉장히 무서웠고 아직까지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고 말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여성이 적잖다. 20대 후반 직장인 B씨 역시 전 남자친구와 이별 과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심지어 이별 통보에 완력까지 행사한 남자친구 때문에 B씨는 당황했다.
“드라마를 보면 헤어지자는 여자 주인공의 손목을 남자 주인공이 잡아당겨 끌어안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벽 쪽으로 여성을 밀어 벽치기를 한 뒤 키스하기도 하고요. 드라마에서는 굉장히 멋지게 묘사되지만 실제로 당하면 무서워요. 전 남자친구에게 헤어지자고 했을 때 강제로 키스하려 해 무척 당황했어요. 정색하며 밀어냈는데, 밀폐된 공간에 단둘뿐이라 도움을 청할 수 없어 더욱 무서웠어요. 이별 통보를 사람 많은 곳에서 하면 안 될 것 같아 인적이 뜸한 공간에서 한 것이 화근이었죠.”
30대 중반 직장인 C씨(여)도 지난해 만나던 애인과 결혼까지 생각했지만 결국 헤어졌다. 사귀는 과정에서 그가 집착하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별을 통보했는데 “결과적으로 잘한 결정이었다”고 회상했다.
“직장도 좋고 학벌도 좋은, 뭐 하나 빠지지 않는 남자였어요. 사귈 때는 다정했어요. 일하느라 바빠서 연락이 되지 않을 때면 전화를 계속 한다던가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게 쌓이다 보니 피곤해져 전화로 헤어지자고 했죠. 그랬더니 난리가 났어요. 회사로 찾아올까 봐 한동안 무서웠지만 다행히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어요. 연락을 계속 받지 않자 결국 포기하더라고요.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는 제 이별 방식에도 문제가 있긴 했지만 상대가 싫다고 하면 깨끗하게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남성들의 이러한 행동에 여성들이 두려움을 느낀다는 데 일부 남성도 동의했다. 20대 후반 직장인 D씨는 “보통 사귀다 헤어진 뒤 여자가 ‘전화 안 받으면 집 앞으로 찾아갈 거야’라고 하면 남자 처지에서는 귀찮긴 해도 무서운 정도는 아니다. 반대로 남자가 그런다면 무서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사귀면서 합의하에 찍은 사진이나 영상을 빌미로 ‘만나주지 않으면 공개하겠다’고 해도 남자는 여자에 비해 타격이 덜하기 때문에 같은 상황이라면 여자 쪽이 더 공포감을 느낄 듯하다”고 말했다.
이별 과정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여성이 늘어나자 ‘안전이별’이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안전이별이란 스토킹, 감금, 구타, 협박 같은 폭력 없이 자신의 안위와 자존감을 보전하면서 사귀던 사람과 헤어지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여성들이 안전이별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우리 사회에는 이상한 남성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항변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최근 데이트폭력 통계를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10월 18일 국민의당 신용현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최근 4년간 연도별·유형별 데이트폭력 피의자 검거 현황’에 따르면 데이트폭력 피의자 검거 인원은 2014년 6675명에서 2016년 8367명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올해는 8월 기준으로 6919명이 발생해 이 속도대로라면 연말까지 1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가해자는 대체로 남성이었다. 지난해 데이트폭력 피의자 검거 인원 가운데 남성이 77.6%로 높은 비율을 차지한 것. 이 가운데 폭행 상해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지난해에는 6233건에 달했다. 지난 4년간 데이트폭력으로 인한 살인·살인미수도 303건에 이르러 매달 약 7명이 데이트폭력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생명의 위협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연인관계에서 발생하는 데이트폭력이 대부분이지만 이별 통보 과정에서 발생하는 폭력이나 스토킹도 상당수다. 경찰청이 밝힌 데이트폭력 주요 사건 사례에는 ‘피해자가 만남을 거부하자 피해자의 직장을 수차례 찾아가고, 500여 통의 문자메시지를 발송해 불안감을 조성’ ‘피해자가 만남을 피한다는 이유로 주거지를 찾아가 과도를 목에 들이대거나 협박 문자메시지를 전송하는 등 8회에 걸쳐 협박’ ‘내연관계인 피해자가 결별을 선언하자 그간의 데이트 비용 500만 원을 돌려달라며 피해자의 고교생 딸을 납치해 감금’ 등 강력범죄로 비화된 경우도 적잖다.
이러한 이유로 온라인상에서는 ‘안전이별을 하는 법을 알려달라’는 글이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한 여성 카페에 어느 여성이 ‘남친이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 헤어지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안전이별을 할 수 있나’라는 글을 올리자 ‘정 떨어지게 진상처럼 행동해야 한다’ ‘남친이 집착하는 행동을 남친에게 똑같이 해줘라’ ‘빚이 수천만 원 있다고 말하고 남친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해보라’ 등 다양한 댓글이 달렸다.
이별도 순탄하게 하기 어려워
데이트폭력 사례가 늘면서 연인과 헤어질 때 신변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안전하게 이별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 역시 증가하고 있다. [shutterstock]
이별을 통보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저서 ‘범죄는 나를 피해가지 않는다’에서 ‘저녁보다는 차분한 마음으로 대화할 수 있는 낮 시간에 만날 것, 사람이 적당히 많이 모이는 곳에서 말할 것, 상대가 두려운 경우 지인 혹은 가족에게 도움을 요청해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동행하거나 주변에 머무르게 할 것’ 등을 제시했다.
경찰 · 상담소 등 도움 요청 필수
이별 과정에서 신변의 위협과 두려움이 느껴진다면 도움을 청하는 것이 필수다. 이임숙 여성폭력 사이버상담·신고 중앙센터 팀장은 “신체적 폭력만 폭력이 아니다. 정서적 폭력과 통제 의도 또한 심각한 문제다. 헤어지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든가, 함께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인터넷에 공개하겠다든가 등 다양한 협박으로 불안해하는 여성이 많다. 이런 폭력의 경우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혼자서 앓지 말고 상담전화나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고 본인이 느끼는 공포감을 알리는 등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별하는 데 경찰과 관련 기관 등에 연락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스스로 해결하려다 화를 입는 경우가 적잖다. 실제로 한국여성의전화가 지난해 11월 내놓은 ‘2016 데이트폭력 피해실태조사 결과와 과제’를 살펴보면 정신적·신체적 폭력 피해 이후 취한 조치에서 전문 상담기관에 알린 경우는 2.0~3.2%이고, 경찰에 신고한 경우는 1.2~8.5%에 그쳤다. 신체적 폭력조차 신고율이 14%에 불과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공권력에 대한 낮은 신뢰도가 자리한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경찰 신고는 법적 처벌이 가능한 범죄행위가 발생했을 때 가능한 일이어서 일부 여성은 ‘차라리 심각하게 맞아 폭행으로 고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호소하기도 한다. 이임숙 팀장은 “데이트폭력은 가정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심각한 사회문제다. 사랑싸움이나 사적인 문제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개입이 필요하다. 경찰 또한 수사 과정에서 연인관계라고 피해를 경시해선 안 된다. 현재 가정폭력은 특례법에 따라 의료지원과 보호소 제공 등 법제화된 지원책이 있는데 데이트폭력은 무방비 상태”라고 말했다.
법적 지원책은 없지만 경찰은 지난해 2월부터 전국 경찰관서에 ‘데이트폭력 근절 특별팀’을 편성, 운영하고 있다. 또 112시스템에 ‘데이트폭력’ 코드를 신설해 가해자에게 서면 경고를 하고 피해자 안내서 배부, 수사전담반 현장 출동 등 피해자 보호를 위한 현장대응도 강화했다. 특히 데이트폭력 피해자 신변보호제도를 만들어 보호시설 연계 및 임시숙소 제공, 신변 경호, 주거지 순찰 강화, 112 긴급신변보호대상자 등록, 위치추적장치 대여, 폐쇄회로(CC)TV 설치, 신원정보 변경, 사후 모니터링 등 지원책을 실시 중이다. 이별 과정에서 위협을 느낀 여성이라면 경찰의 이러한 제도를 적극 이용하는 것 또한 안전이별을 하는 방법이다.
여자만 공포? 남자도 공포 !
[shutterstock]
안전이별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비율은 낮지만 남성도 상대의 위협적인 행동에 고통을 겪는 경우가 있다. 지난해 부산지방경찰청이 2월부터 7월까지 수사한 데이트폭력 293건 가운데 일방적으로 피해를 본 남성도 10명으로 전체의 3.4%를 차지했다. 남성 피해자는 ‘결별했는데 다시 만나주지 않는다’ ‘다른 여자를 만난다’ 등의 이유로 뺨을 맞거나 우발적으로 폭행당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경찰청은 남성은 옛 연인에게 맞거나 피해를 입어도 자존심 때문에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실제 데이트폭력 피해 남성은 통계보다 많을 것으로 추측했다.
이런 가운데 요즘에는 아들을 둔 부모도 걱정하는 추세다. 대학생 아들을 둔 50대 여성 E씨는 아들이 연인과 헤어지는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겪을까 우려했다. 그는 “성인 남녀가 사귀는 것은 자유롭게 알아서 할 일이라 아들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요즘 언론기사를 보면 헤어지자고 했을 때 상대 여성이 ‘경찰에 성폭행당했다고 신고할 것’이라며 협박하는 경우가 더러 있던데, 그런 일이 생길까 봐 걱정이다. 그래서 아들도 친구들끼리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 상황을 녹음해야 한다’ 등 어떻게 하면 좋을지 대처법을 얘기하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남성들 사이에서 이런 얘기가 오가고 있다. 20대 후반 직장인 F씨는 “친구들끼리 얘기한 적 있는데, 여자친구와 헤어지려 할 때 그쪽에서 쉽게 받아들일 것 같지 않으면 미리 정을 뗀다든지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한다. 또 만약 신고할 생각까지 있으면 차에서 대화를 나누고 블랙박스에 녹화, 저장해둔다고도 한다”고 전했다.
남성 데이트폭력의 경우 상대 여성의 신체적 폭력보다 말로 하는 협박 혹은 스토킹이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따라서 증거를 확보해두는 것으로 화를 면할 수 있다. 정대걸 법무법인 엘케이파트너스 변호사는 “통화 중 녹음이나 블랙박스 음성 녹음, CCTV 영상 녹화 등 상대로부터 위협을 당했다는 증거가 있다면 소송에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다. 남녀가 원만하게 이별하는 것이 좋겠으나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면 증거를 확보한 뒤 맞대응을 선언하는 것만으로도 안전이별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