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제철 유상부회장(57)이 작년 3월 주총에서 신임 회장에 선임될 때만 해도 그는 자민련 박태준총재의 수렴청정을 받는 ‘대리인 회장’ 정도로 평가됐다. 유회장의 선임 자체가 정권 교체로 인해 포철에 대한 영향력을 되찾은 박총재의 ‘작품’이라는 분석이 유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있다. 유회장이 정치권의 ‘청탁’을 일절 배제하는 것은 물론 포철을 한국에서 투명한 기업 중 하나로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포철 경영진들은 박태준총재가 되도록 포철과 거리를 두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도 유회장의 소신 경영을 가능케 해주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잘 알려진 대로 김영삼정부 시절 포철은 정권의 ‘전리품’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영삼전대통령의 막역한 친구인 김모 변호사의 아들이 포철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음에도 95년말 포철 협력업체 운영권을 받았으며, 정치권 인사들의 이권개입설이 적잖았다.
그러나 유회장의 포철은 과거와 달라진 면모를 보이고 있다. 최근 들어 정치권에서 유회장에 대한 불만이 높은 것도 유회장의 이런 태도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유회장이 “정치인들의 전화는 대부분 청탁과 관련된 것이 많다”며 이들의 전화를 받는 것조차도 꺼리면서 정치권에서 “건방지다”는 비난이 나올 정도다.
심지어 유회장은 취임 직후 여권의 한 핵심 실세가 보낸 메신저의 청탁도 거절, 한때 이 실세의 오해를 받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행히 박총재의 한 측근이 두 사람 사이를 중재, 두 사람이 직접 만나는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오해가 풀렸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포철 관련 민원은 박태준총재실에 몰리고 있어 박총재가 곤혹스러울 정도라고 한다. 오죽 했으면 박태준총재가 올 6·3 서울송파갑 보궐선거운동 기간 중 자민련 김희완후보를 지원유세하 다 휴식차 서울 삼성동 포항제철 본사를 방문한 자리에서 “웬만한 청탁은 들어줘도 되는 것 아닌가” 고 말했을까.
유회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청탁 자체를 들어줄 수 없는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올 초 발족한 업무혁신(process innovation) 추진팀이 개발하고 있는 업무 정형화 시스템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시스템이 개발되면, 가령 포철이 계약을 체결할 때 유회장이 외부의 청탁을 들어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된다.
유회장이 이처럼 정치권과 거리를 두는 것은 김영삼정부 출범 직후 6개월 동안 교도소 신세를 진 것과 무관치 않다는 게 포철 주변의 분석. 유회장은 당시 포철에 대한 ‘표적 세무조사’ 결과 개인비리 혐의가 드러나 검찰에 구속됐다. 그래서인지 유회장은 정권이 바뀌어 또다시 ‘표적 사정’을 당하더라도 책 잡힐 일을 결코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것 같다고 측근들은 말한다.
유회장의 투명경영 원칙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유회장은 올 4월 유병창 홍보담당 상무를 대변인으로 임명, 매주 포철 경영에 관한 정례 브리핑을 실시하게 할 정도로 투명경영 원칙을 실천하고 있다.
당연히 유회장 취임 이후 포철에서 ‘비자금’이라는 말이 사라진 지 오래다. 포철의 한 고위 관계자는 “유회장도 회사에서 증빙자료 없이는 1만원도 빼 쓸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한 회계 시스템을 만들어놓았 다”고 자부했다. 유회장의 이런 행보가 돋보이는 것은 김우중회장이 모든 경영 정보를 독점하고 독단적으로 경영하다 수십조원에 이르는 부실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대우그룹과 비교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유상부회장의 ‘홀로서기’가 성공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내년에는 총선이 있다. 과거의 예로 볼 때 포철 같은 공기업들이 정치권으로부터 시달릴 소지가 있다. 유회장이 투명 경영과 정치권 청탁 거절이라는 원칙을 고수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