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윤 동아일보 기자]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동아일보사 부설 화정평화재단·21세기평화연구소(이사장 남시욱)가 12월 4일 ‘2018년 한반도 정세 회고와 전망’을 주제로 개최한 정책토론회에서 이같이 전망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돌발 발언은 시스템이 잘 작동하는 미국 의회나 군대에 의해 견제되고 있지만, 우리는 미국과 다르기 때문에 자칫 문제가 생기면 독박을 쓸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참석자들의 주요 발언이다.
최강 부원장 올해는 자유주의 국제질서 세력의 구심점이 약화하고 분열된 반면, 비자유주의 세력의 부상이 지속됐다. 무역전쟁을 통해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전면적으로 확산되는 모습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우선주의 정책을 펼치다 보니 가치보다 이익을 앞세우면서 동맹국들과 마찰이 발생하고 있다. 미국 스스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기본을 약화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한반도 상황을 고려할 때 북핵 해결을 위한 북·미 간 합의점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접근 방식에서 차이가 극명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정상회담에서 논의하자 하고, 미국은 협상에서 해결책을 내놓아 밑그림을 그린 다음 정상회담으로 가자는 것이다. 내년 초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 2차 북·미 정상회담도 1차와 마찬가지로 ‘정치쇼’가 될 가능성이 높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한국이 미국을 놀라게 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북한은 움직이지 않는데 한국이 왜 빠르게 속도를 내는지에 대한 불만과 걱정이 많다. 한미 양국은 북핵 문제 해법을 둘러싸고 서로 입장을 조율하기보다 매일 현안으로 넘기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미국이 북핵과 통상 문제로 한국을 압박하면 우리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진다.
“북한, 피해자 코스프레 가능성”
미국의 대북 군사적 옵션은 여전히 남아 있다. 선박 환적 단속과 금융제재, 대북 원유 공급 차단 같은 카드를 꺼내 들 수 있다. 지금처럼 북·미 간 대화가 지지부진하고 분위기가 경색되면 북한은 세련된 평화 공세를 펴면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남북관계 개선도 중요하지만 한국 외교는 시선을 넓혀야 한다. 미국과 중국이 치열하게 힘겨루기를 하는 상황에서 지정학적 정세 변화에 둔감하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등에서 한국의 역할과 행동이 중요하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이동선 교수(고려대 정치외교학과) 현재 남북관계 진전 상황은 희망이 현실을 앞서는 모습이다. 문제는 북·미 사이에 비현실적 기대감, 즉 ‘거품’이 크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지부진하다 북·미의 북한 핵 폐기 협상이 실망감으로 변하는 시점이 오면 서로 좌절하고, 커다란 상호 불신으로 이어지게 된다. 한국 정부는 이 거품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만약 거품이 꺼지면 군사적 긴장감이 고조될 개연성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유진영을 끌고 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북·미 관계도 좋지 않다. 동북아를 넘어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을 통해 확실한 강자로 올라서려는 중국은 자유진영의 분열을 은근슬쩍 이용하고 있다. 이런 정세를 감안하면 한국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압력은 점점 더 강화될 것이다.
황일도 교수(국립외교원) 지금까지 우리의 선택은 미국을 따라가면 됐기에 쉬웠다. 세력과 실익 측면에서도 유리했다. 하지만 (자유주의와 비자유주의 사이에서) 가치를 놓고 선택하면 이상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가치와 실익이 충돌하기 때문에 선택의 문제가 더 어렵게 됐다. 세력과 실익만으로 선택을 바라봐야 하는 복잡한 외교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미국이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깨고 새로 중거리미사일을 개발해 동북아 역내에 전개하려 할 경우 우리가 따라가기 애매한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반면, 일본은 실익으로 따르는 것이 맞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지금 트럼프 행정부가 그렇게 예외적인 정권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모든 쟁점에서 기존 판단을 따르는 시대는 끝났다.
김한권 교수(국립외교원) 중국의 부상과 관련해 전통적인 자유진영에서는 미국의 리더십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규범과 질서의 경쟁은 결국 전략적 패권경쟁의 일환이다. 냉전시기에 미국이 소련을 몰아갈 때 그랬고, 지금 중국에게 (미국 주도의) 규범과 질서에 대한 순응을 요구하는 과정도 그렇다.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전쟁 등을 통해 강경하게 나오는 것은 중국의 부상을 멈추게 하고 향후 대미 경쟁 기반을 무너뜨리려는 의도다.
중국 처지에서는 물러설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자 큰 위협이다. 미국에 대한 대응에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국 최고지도부는 국내 정치권력을 지키고자 시간을 끌며 버티고 있고, 전문가 집단이나 중간 관료 집단은 중국이 새로운 도광양회(韜光養晦 · 은인자중하며 세력을 키움) 전략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미동맹이 바게닝 칩 될 우려”
황태희 교수(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트럼프 대통령은 국제 정치도 국내 정치적 이익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기존 질서와 안보 제도에 각을 세우고 있으며 국제적인 공공재, 즉 자유무역협정 등 모든 것에서 발을 빼고 있다. 미국이 패권국으로서 안보와 경제 등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것을 송두리째 무시하고 있다. 지금은 이런 균형에서 이탈하고 있지만 결국 다시 돌아올 것으로 보인다.트럼프 대통령은 북·미 정상회담을 정치적 이익 측면에서만 이용하고, 의미 있는 북한 비핵화 진전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협상은 서로 갖고 있는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북핵 폐기는 로드맵이 없고 불확실성이 크다. 가장 문제되는 행위자는 한국인데, 트럼프 대통령이 볼 때 한국은 존재감이 너무 없다. 주한미군 주둔, 한미방위비분담금 협상, 한미합동군사훈련, 전시작전통제권 협상 등 한미동맹의 상징이 북·미 협상에서 언제든 ‘바게닝 칩’(협상카드)으로 이용될 수 있어 우려스럽다.
한편 이날 참석자들은 “정부는 현 상황에 대응하는 데 급급하기보다, 북한 비핵화가 끝내 불발될 경우에 대한 대처 방안을 담은 장기 로드맵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 “북한이 비핵화할 것이라는 가정에 매몰되지 말고 안보에 대한 국민의 다양한 우려와 고언을 경청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