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중식 기자]
청소년들과 1년에 두 편을 무대에 올리니 대략 6개월은 주말마다 지방행이다. 대부분 문화를 접하기 어려운 시골지역에서 공연을 준비하다 보니 주말 장거리 운전은 필수다. 나머지 6개월은 주말마다 지역아동센터를 찾아 초등학생들과 공연을 준비한다. 주중은 대학생, 주말은 초중고교생을 가르치니 교육자가 천직인 듯한데, 사실 돈은 안 된다. 오히려 사비를 털어 무대 소품과 차비를 댄다. 노력봉사와 기부가 따로 없다. ‘교수님’ 소리 들으며 편하게 살 수 있는데 아이들과 함께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11월 26일 오후 서울 혜화동 동덕여대 연구실에서 그를 만났다.
주말마다 경남 산청을 찾는 이유는 뭔가.
“경남도교육청과 산청교육지원청, 산청군과 함께 12월 14일 산청군문화예술회관에서 50번째 공연을 연다. 동아일보가 2007년부터 청소년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친구야! 문화예술과 놀자’라는 사회공헌사업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산청에서 연다(포스터 참조). 문화를 접하기 힘든 지역에서 어려운 가정환경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선발해 8~12주가량 교육시켜 공연한다. 주로 경남, 전남, 강원 시골지역 학생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장거리’를 뛰게 된다.(웃음) 2011년부터 총괄감독, 연출로 참여해 매년 2~3차례 공연을 한다. 이번 공연에는 처음으로 케이팝(K-pop)을 활용한 창작뮤지컬 ‘K-POP 뮤지컬, 라비앙 로즈(장밋빛 인생)’를 선보일 예정이다.”
묻고 답하고 토론하는 ‘김춘경式 교수법’
“케이팝 가수가 꿈인 라비앙과 음악방송 PD가 되고픈 로즈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상을 향해 자유롭게 날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학생들이 YB의 노래 ‘나는 나비’, 워너원의 ‘에너제틱’ 등 다양한 케이팝에 맞춰 연기하면서 자존감을 회복하고 자신의 꿈을 키울 수 있도록 연출했다. 뮤지컬을 통해 전인교육을 하는 게 목표다.”
이번 공연은 산청중, 단성중, 덕산중고교 등 4개 학교 학생 22명이 참여하는데 매주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오전 산청군문화예술회관, 산청군청소년수련관 등에서 맹훈련을 하고 있다. 김 교수가 총괄감독을, 유성준 동덕여대 강사가 안무를, 임세진 한림예고 교사가 음악을 담당하고 김 교수의 동덕여대 제자들도 함께 참여한다.
뮤지컬과 전인교육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전국을 다니며 공연하다 보니 학교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아이들과 이른바 ‘문제아’도 많이 만났다. 어떤 아이는 무력감에 빠져 꿈을 포기하거나 어려운 가정환경을 비관하며 살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만나면 나는 ‘자신에게 반항해보라’고 조언한다. 기죽은 자신에게, 손버릇 나쁜 자신에게, 비관하는 자신에게 반항해보라고 함으로써 학생들의 ‘마음의 중심’을 살짝 흔들어놓는다. 이후 배역과 대사에 대해 토론하고, 무대에 올라 스포트라이트와 관객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연기인을 경험하다 보면 아이들은 눈물을 흘리고 또 조금씩 바뀌어간다. 자존감과 꿈을 키우는 거다. 공연을 마치면 아이들은 ‘더 있다 가시라’며 소매를 붙잡는다. 그 보람에 매주 장거리를 뛴다.(웃음)”
연기는 내면의 표현인데, 연기하다 보면 아이들의 속마음도 드러나겠다.
“그렇다. 대사와 표정, 몸짓과 리듬, 음정, 박자에 맞춰 내면을 표현하는데, 그 과정에서 나는 끊임없이 토론하며 아이들의 내면을 이끌어내도록 노력한다.”
연기하는데 토론을 한다?
“과거 연기수업은 단순히 대사를 외우고 연기하는 등장인물의 ‘아바타 수업’이었지 정작 연기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찾지는 못했다. 나는 등장인물의 감정과 처한 상황에 대해 학생들과 토론하면서 그 캐릭터를 내면화하고, 대사를 통해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도록 유도한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라는 대사가 있다면 ‘왜 이 사람은 이런 말을 했을까’ ‘이 얘기를 듣는 부모님의 심정은 어땠을까’ 하는 식으로 물어보는 것이다. 그러면 많은 아이가 자신의 상황에서 이야기를 하고, 동시에 가족이나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단순히 대사를 외우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배역, 그 대사에서 아이들이 느끼게끔 유도하는 거다. 공연을 마치면 많은 학생이 눈물을 흘린다. 세상을 원망하던 자신을 반성하며 만감이 교차한다고 한다. 지난해 호서대 입시 심사를 하러 간 적이 있는데, 경남 진주 공연에 참여했던 아이가 연극영화과 학생이 돼 있었다. 당시 공연을 통해 부정적인 자신을 버리고 꿈을 찾았다고 이야기하는데, 코끝이 시큰했다.”
‘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요’
[홍중식 기자]
“그렇다. 얼마 전(11월 3일) 우리 대학 공연예술센터에서 6개 지역아동센터 초등학생들이 그동안 준비해온 공연(뮤지컬 ‘우리읍내’)을 선보였다. 지역아동센터는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이 이용하며, 대부분 가정형편이 좋지 않다. 아이들과 토론하며 시를 지어보라고 했는데,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한 아이는 ‘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요’라는 시를 썼다. ‘우리만 두고 가버린 곳은 행복했었나요. (중략) 가끔 지치고 힘들 때면 당신 탓했어요’라는 시구가 마음 아팠다. 마지막 시구가 ‘당신 발에 묶어둔 죄책감 풀고 자유롭게 날아요’였는데, 내면에 묶어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원망을 연기를 통해 훌훌 털어버렸다. 아이들의 시에 곡을 붙여 공연에 활용했다.”
연기 하면 보통 엄격한 도제식 지도가 떠오르는데, 김 교수는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활용하는 거 같다.
“결국 연기는 자기 자신을 찾는 전인교육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연기수업을 할 때 차용하는 게 소크라테스의 문답법과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 교육법이다. ‘이 캐릭터는 이렇게 연기해야 해’가 아니라, 끊임없이 묻고 답하며 자신을 기준으로 캐릭터를 구축하도록 돕는 거다. 우주의 중심은 각자의 마음이니까, 문답을 통해 우주의 중심인 자신을 찾아가는 거다. 이는 자신을 깨달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대학(university)의 어원으로, 라틴어로 ‘전체’를 뜻하는 우니베르시타스 교육은 토론이 핵심이었다. 주제에 대해 질문하고 이의를 제기하며 결론을 끌어내는 거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건 교류와 소통이며, 이를 잘하려면 표현하는 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공연예술교육이 곧 표현 능력 향상 교육 아닌가. 이런 교육을 초등학생과 청소년 전인교육으로 확장하면 아이들의 자존감과 자애감, 배려심 등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답과 토론을 통해 ‘마음의 중심’을 흔들어주는 건가.
“정체된 마음의 중심을 흔들어 새로운 길을 찾아가게 하는 것, 인생에 정답은 없으니까 자신만의 길을 찾게끔 살짝 마음의 중심을 흔들어주는 거다. 사실 이 수업법은 러시아 유학 시절 깨우친 경험이 바탕이 됐다.”
러시아의 민머리 교수가 깨우쳐준 경험
청소년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친구야! 문화예술과 놀자’의 공연 브로슈어. 2017년 시작해 올해로 50회째를 맞았다, 동덕여대 학생들의 연기 지도를 하는 김춘경 교수, 산청지역 중고교생들이 12월 14일 창작뮤지컬 ‘K-POP 뮤지컬, 라비앙 로즈’ 공연을 앞두고 연습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동아일보, 홍중식 기자, 사진 제공 · 산청교육지원청]
“당시 민머리 할아버지 교수가 있었는데, 학생들은 그의 머리를 만지면서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교수님’이라고 인사했다. 도제식, 아바타식 수업에 익숙한 나로서는 작은 충격이었다. 어색했지만 나도 민머리를 만지며 인사했다. 그 ‘민머리 인사법’은 교수 대 제자로서 관계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 접근한다는 의미였고 제자들은 스스럼없이 내면을 표현하며 토론할 수 있었다.”
김 교수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연극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내면을 표현하는 수업에 크게 감명받았다고 한다. ‘김춘경식 교수법’의 태동이었다. 김 교수의 수업을 들은 한 학생이 동덕여대 강의에세이에 쓴 수강평이 흥미롭다.
‘수업시간 교수님께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왜’이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행동했을까, 왜 너는 그렇게 생각하니…. 당연히 생각이 많아지고 깊어지고 진지하게 수업에 임하게 됐다. (중략) 우리는 왜 사는지, 나는 무엇을 목표로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지, 무엇을 추구하고 살아가는지, 우리가 지금 왜 이 수업을 배우고 있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셨다. (중략) 돈, 명예, 지식 등 다양한 것을 얻기 위해 살겠지만 궁극적으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함이라는 것, 진정으로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게 예술이라는 결론을 얻게 됐다.’
토론하면 안무와 연기 수업은 언제 하나.
“그런가.(웃음) 본격 연기에 앞서 몸을 풀면서 안무를 시작한다. 무용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시각화하는 건데, 무용을 통해 다양하게 표현하도록 유도한다. 땀을 내면 우뇌가 활발해지고, 슬슬 연기 욕심이 난다. 그때 아이들의 반응을 보고 캐릭터에 대해 토론하면 수업 몰입도가 높아진다.”
‘주말 봉사교육’을 하다 보면 가족의 불만도 클 거 같다.
“다 이해해준다. 가끔은 가족과 함께 봉사하기도 하고. 사실 그보다 내가 더 많이 배우고 얻는 거 같다. 아이들과 함께 눈물 흘리고 감동받다 보면 내 마음이 정화되고 힐링된다. 내 또래는 고민이 많은데 나는 나이가 든다는 느낌이 없다(김 교수는 1964년생이다). 공연에 참여한 아이들로부터 ‘자신감을 갖고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편지나 안부 전화를 받으면 보람도 느낀다. 그러니 주말에 ‘일하러 간다’는 생각은 안 한다. ‘연기 봉사’는 내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재주 가운데 하나라, 그저 운명이라고 생각한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