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일 한국 해군의 율곡이이 이지스함(위)이 종합해양과학기지가 있는 이어도 해역에서 기동 경비작전을 실시하고 있다.
“암초가 아니라 규칙 문제”
딱딱하고 복잡하게 들리지만, 여기까지가 유엔해양법협약(UNCLOS)을 비롯한 국제법의 영유권에 대한 기본 상식이었다. 그 틀 위에서 탄생한 국제해양법재판소는 이후 촘촘하게 판례들을 쌓아 올려왔다. 독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섬들, 각국이 얼기설기 엮여 있는 영토분쟁을 가르는 규범이다. 서로 견해가 다를 수는 있다. 예컨대 독도는 섬인가 암초인가 같은 쟁점이다. 그러나 어찌됐건 이 틀 안에서 논의를 진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라 사이에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2015년 중국이 남중국해 문제와 관련해 꺼내놓은 이야기는 완전히 층위가 다르다. 남중국해에 흩어져 있는 무수한 섬과 암초, 산호초들 가운데 영해를 가진 것은 무엇 무엇이므로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우리 영해라는 식의 구체적인 주장이 아니다. 남중국해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U자형 선을 긋고는, 그냥 통째로, 다른 나라 섬들과의 거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이 바다는 자기들 것이라고 말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11월 7일 싱가포르국립대에서 한 연설을 통해 “남중국해 도서들은 오래전부터 중국의 영토였다”며 “남중국해에서 영토 주권과 해상에서의 정당한 권익을 수호하는 것은 중국 정부가 짊어진 책무”라고 말했다. 15세기 초 명나라 영락제의 명을 받고 출항한 환관 정화의 원정 때부터 자기네 바다였고, 그동안 자신들의 힘이 약해 제국주의 세력에 침탈당했으나 이제는 되찾겠다는 게 중국 측 주장의 골자다. 영해나 EEZ 같은 국제법 용어 대신 ‘정당한 권익’ 같은 새로운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 주석의 발언 직후 아시아·태평양(아·태)지역의 안보 문제를 다루는 온라인 전문지 ‘디플로맷(The Diplomat)’에서는 한바탕 설전이 벌어졌다. 중국 논리대로라면 이탈리아는 로마제국 시절 영역을 근거로 지중해 전체에 대해, 포르투갈은 대항해 시대 활약을 근거로 대서양 전체의 ‘정당한 권익’을 주장할 수 있다는 서방 측 인사들의 비아냥거림이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르며 완성된 국제법 질서의 근간을 송두리째 무시하는 세계관이라는 반발이 줄을 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대만 역시 중국과 똑같은 논리를 사용해 남중국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해왔다는 것. 기실 중국이 말하는 U자 선은 1947년 국민당 정부가 제시한 개념을 그대로 차용한 것에 가깝다. 요컨대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 측 주장은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하는 체제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바로 ‘중화(中華)주의’라는 뜻이다.
“암초가 아니라 규칙이다(Rules, not rocks).” 대니얼 러셀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의 이 말은 남중국해 문제를 둘러싼 중국과 미국의 대립에 숨은 본질을 한 줄로 묘파한다. 단순한 영역 다툼이 아니라, 20세기 미국 등의 주도로 만들어진 국제법 질서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싸움이라는 것. 이른바 ‘앵글로색슨 스탠더드’라 부르는 서구식 관념을 중국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최소한 ‘우리 동네’에서는 그런 제국주의 시대의 질서를 함부로 강요하지 말라는 게 중국의 기본 태도다. 당장은 이 바다에 얽힌 경제적 이익도 중요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미국식 세계질서를 뿌리부터 뒤집겠다는 중화의 야심만만한 계산이 숨어 있는 셈이다.
리커창이 이어도를 꺼내 든 이유는
그저 먼 동네 이야기일 뿐일까. 이제부터는 상황이 다르다. 리커창 중국 총리의 방한으로 이뤄진 한중 정상회담 직후였던 11월 1일 중국 외교부는 인터넷 홈페이지에 리 총리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가능한 한 빨리 한중 해역경계 획정 담판(협상)을 시작하자”고 말했다고 전했다. 1990년대 이래 정체 상태에 머물고 있는 두 나라 사이 해상경계선을 하루빨리 확정하자는 공식 제기였다. 이어도와 EEZ로 상징되는 ‘영토분쟁 불씨’를 되살리는 한 수였다.
당초 청와대는 회담 후에도 이러한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고, 중국 측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은 뒤 서둘러 진화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11월 5일 외교부는 “EEZ 문제를 논의하는 한중 해상경계 획정 협상과 관련해, 12월 1차 회담을 개최하고자 일자를 조율 중”이라고 밝혔다. 수년간 반복돼온 서해상 어업 분쟁을 해결하려면 이번 기회에 EEZ를 확정해야 한다는 게 중국 측의 공식 설명이다.
상당수 전문가는 리커창 총리의 제의가 남중국해 문제와 관련 깊다고 풀이한다. 이 사안에서 한국이 섣불리 미국 편을 들고 나서는 것을 막으려는 견제구에 가깝다는 것. ‘당신들도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다’는 암묵적 신호탄. 남중국해 문제와 이어도 문제의 본질이 고스란히 겹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는 중국 측의 날카로운 일격이다. 바다에 면한 동남아의 다른 나라들처럼, 한국 역시 자신들의 ‘몽니’에 꼼짝없이 노출돼 있음을 상기케 하는 것이 목표다.
남중국해 문제를 촉발한 계기가 이들 해역에 중국이 건설한 인공섬이었듯, 한중 해상경계 획정 문제와 관련해 중국 측은 이어도에 2003년 한국 정부가 건설해놓은 해양과학기지를 문제 삼는다. 국제법적으로는 섬도 암초도 아닌 ‘바다 밑 무언가’에 인공시설을 만들어 점유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신네나 우리나 마찬가지 아니냐’는 게 중국 측 속내다. 인근 해역이 다양한 어종으로 붐비는 황금어장이고 태평양에서 중국, 동남아, 유럽으로 향하는 주 항로가 인근을 통과한다는 지정학적 중요성도 닮은꼴이다.
박근혜 대통령(왼쪽)과 리커창 중국 총리가 10월 31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서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산술적인 중간선은 해답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기점에 해당하는 해안선 길이나 해당 지역의 인구분포 같은 다른 요인들을 감안해 ‘비례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것. 요컨대 제주와 마라도는 인구가 적고 본토로부터 거리가 멀지만, 중국 동부해안은 대도시가 밀집해 있으므로 더 넓은 EEZ를 가져야 한다는 취지다. 이렇게 중국이 그어놓은 EEZ에 이어도가 포함된다는 사실은 불문가지다. 이어도 주변 해역 역시 중국의 것이라 주장하기 위한 핑계다.
국제법 전문가들은 한중 해상경계에 대한 중국 측의 이러한 주장 또한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조정현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해안선 길이나 인구 등을 감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례가 없었던 바는 아니지만, 국제해양법재판소 판례에서 폭넓게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남중국해에 중국이 그은 U자 선처럼 서해에 중국이 그어놓은 EEZ 또한 ‘그들만의 주장’에 가깝다는 뜻이다.
전통적으로 한국은 국제법을 민감하게 해석해온 모범생이었다. 심지어 자국의 핵심 이해가 걸린 문제에서도 국제법 해석을 교과서적으로 적용해온 나라다. 독도를 두고 2006년 이전까지만 해도 ‘독자적 경제활동이 불가능한 암초’라는 국제법 해석을 적용해 영해만 주장했을 뿐 EEZ를 긋지 않았던 게 대표적이다.
모범생, 그리고 서글픈 운명
그러나 남중국해에서 벌어지는 일들, 정확히 말해 남중국해에 대해 중국이 높이는 목소리는, 그간 한국이 몸을 기대온 국제법 규범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음을 뜻한다. 최소한 중국이 ‘자신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서태평양 주변 바다에서는 그렇다. 그 거친 행보는 2013년 동중국해, 올해 남중국해를 돌아 이제 이어도와 그 주변 바다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뒷마당이라고 믿지만 중국인들은 자신의 앞마당이라고 생각하는 이 바다가 갈등의 다음 무대라는 이야기다.
지금으로부터 꼭 2년 전, 중국은 갑작스레 자신들의 방공식별구역(Chinese Air Defense Identification Zone·CADIZ)을 선언하고 나섰다. 이어도를 넘어 한국의 기존 방공식별구역과 일부 중첩될 뿐 아니라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까지 포함해 일본의 방공식별구역을 상당 부분 차지하는 이 공세적 행보에, 한국 역시 이어도를 포함한 새 방공식별구역을 공포함으로써 맞불을 놓았다. 강수에 강수로 맞선 당시 조치는 자존심을 지킨 쾌거라는 평가가 줄을 이었지만, 실제로는 이후에도 이들 공역에 들어오는 타국 항공기가 우리 측에 사전 통보를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 아무리 선을 그어도 강제할 힘이 없는 나라의 한계. 전직 외교부 고위 당국자의 말이다.
“국제법이라는 게 본디 그렇다. 겉으로는 완벽한 체계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허점과 빈 공간이 남아 있고, 각국 주장이 불분명하게 겹치는 회색지대가 즐비하다. 강대국은 이 회색지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자는 말만으로도 약소국을 압박할 수 있는 것이다. 20여 년간 이어도와 한중 해상경계는 대표적인 회색지대였고, 우리 정부는 이 문제가 쟁점화하지 않는 게 국익에 가장 부합한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중국은 더는 이를 좌시할 분위기가 아니다. 논리적 근거가 부족한 주장이라도 밀어붙여가며 압박하겠다는 노골적인 ‘힘의 정치’다.”
조지워싱턴호.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직후인 2010년 11월 한미 합동군사훈련 당시 서해에 들어온 미국의 핵 추진 항공모함이다. 슈퍼호넷 F/A-18E/F 전투공격기를 비롯한 항공기 80여 대를 탑재한 이 최강 전력의 ‘앞마당’ 진입에 중국 정부는 극도의 경계심을 보였다. 북한의 도발에 대한 대응조치라는 명분 때문에 소리 높여 반대하진 못했지만, 한국 정부에 대한 물밑 압력 역시 상당했다는 게 당시 청와대 당국자들의 회고다.
10월 27일 중국이 만든 남중국해 인공섬 인근을 항해한 미 해군 구축함 라센호 사건과 관련해 수많은 해외 매체와 전문가들이 함께 거론한 것 역시 5년 전 조지워싱턴호의 서해 진입이었다. 2000km가 넘는 거리를 두고 벌어진 두 사건에 대해 우리는 한 번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지 않았지만, 당사자인 중국과 미국을 포함해 세계 시선은 전혀 달랐다는 이야기다. 어느 때보다 기세등등한, 어느 때보다 거칠게 ‘힘의 정치’를 구사하는 중국과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다. 그러는 사이, EEZ 협상이 시작되는 12월은 이제 코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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