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4월, SK텔레콤이 삼성전자와 손잡고 시작한 ‘네이트 드라이브’ 서비스(왼쪽)와 오는 11월 선보일 현대자동차의 텔레매틱스 서비스.
그도 그럴 것이 텔레매틱스는 정통부가 선정한 9대 IT(정보기술) 신 성장동력의 하나이자, 정부의 10대 차세대 성장산업 중 ‘차세대 이동통신’의 핵심기술이다. 7월31일에는 대통령 직속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이하 동북아위)에 의해 ‘1차 동북아 프로젝트 시범사업’으로 선정됐다. 이른바 ‘노심(盧心)’까지 실린 것이다.
비포 마켓 vs 애프터 마켓 시장 양분
이렇듯 참여정부의 각별한 관심을 받고 있는 텔레매틱스 사업은 우리나라 2대 주력 산업인 IT산업과 자동차산업의 성공적 결합을 전제로 한다. 문제는 그 대표주자인 SK텔레콤(이하 SKT)과 현대·기아자동차(이하 현대차)가 사업 주도권을 놓고 지루한 샅바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 그러나 ‘과열’이라 할 만큼 강력한 정부의 의지, 그럼에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시장 상황은 두 세력에게 모종의 ‘결단’을 강요하고 있다. 수건을 던지는 자, 누구일 것인가.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의 국정과제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맨 오른쪽).
우리나라 최초의 텔레매틱스는 비포 마켓을 겨냥한 것이었다. 2001년 11월 대우자동차는 KTF 통신망을 이용, ‘드림넷’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러나 사업은 흐지부지됐다. “처음부터 곧 접을 생각이었다. 당시는 이미 대우차가 부도 등으로 막바지에 몰려 있을 때였다. 이왕 개발해놓은 시스템이니 회사 가치도 높일 겸 홍보용으로나 활용해보자는 식이었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2002년 4월, SKT의 ‘네이트 드라이브’ 서비스가 시작됐다. 전용 휴대전화 단말기와 키트를 구입, 가입 신청을 한 뒤 교통정보, 위치정보 등을 제공받는 형태다. 011 가입자여야 하며 정보 제공은 휴대전화 단말기 화면을 통해 이루어진다. 전형적인 애프터 마켓을 겨냥한 상품이다.
일본 도요타 자동차의 텔레매틱스 시스템.
SKT도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세운 전략이 ‘선(先) 애프터 마켓, 후(後) 비포 마켓 공략’이다. 선두사업자의 이점을 살려 확실한 브랜드 이미지를 심고 일정 수준 이상의 수익을 거둔 뒤, 여세를 몰아 비포 마켓에서도 주도적 위치를 점한다는 복안이었다. 이를 위해 2002년 4월, 일찌감치 르노삼성자동차와 차량장착형 서비스 제공에 합의했다. 실제로 지난 9월 판매에 들어간 2004년형 SM5에는 SKT의 텔레매틱스 시스템이 선택사양으로 들어 있다.
그렇다면 왜 SKT는 자동차산업 1위 업체인 현대차와 손잡지 않았을까.
“두 회사 간 만남은 이미 2001년 5월부터 있었다. 제휴와 관련해 70~80%까지 얘기가 진척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사업성격과 주도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협상이 결렬될 수밖에 없었다.” 현대차 관계자의 말이다.
사업 주도권이란 결국 누가 고객과 직접 맞닥뜨리는 ‘최후의 고리’가 될 것이냐의 문제다. 어떤 회사의 이름으로 누가 고객관리를 하느냐는 것. 그에 따라 구매자는 최종적으로 SKT 고객이 될 수도 있고 현대차 고객이 될 수도 있다. 자존심 문제까지 걸려 있는 만큼 두 회사 모두 고개를 숙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 텔레매틱스 시장 및 산업 역량은 SKT 주도 그룹(SKT㈜-SK-삼성전자-르노삼성차)과 현대차 그룹(현대차-모비스-LG전자-LG텔레콤)으로 양분됐다. 그러던 것이 현대차가 마침내 새 텔레매틱스 서비스를 선보이게 된 지금,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차는 오는 11월, 본격적인 텔레매틱스 서비스에 돌입한다. LG텔레콤 망을 사용하되 휴대전화 단말기, 키트, 화면 등은 모두 내장돼 있다. 물론 운전자가 LG텔레콤에 가입해야 한다. 그랜저XG, 뉴EF소나타, 옵티마, 리갈 등이 첫 대상이다. 선택사양이며 그로 인한 추가비용은 1대당 200만~250만원 정도다. 참고로 SKT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SM5의 경우 키트, 화면 등은 내장시키되 외부로부터 011 휴대전화 단말기를 꽂도록 하고 있다.
SKT는 현대차보다 1년7개월이나 먼저 네이트 드라이브 서비스를 시작했으나 고객 수는 8만1000여명에 불과하다. 이는 지난해 10월 고객 수 8만명에서 1000여명밖에 늘지 않은 수치다. 업계에서는 SKT가 손익분기점을 넘기려면 100만명 이상의 고객은 확보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상황인 만큼 SKT는 지난해 말부터 네이트 드라이브에 대한 마케팅을 사실상 중단하다시피 했다. 올 초에는 “아예 사업을 접자”는 얘기까지 나왔다. SKT의 한 임원은 “텔레매틱스 사업과 관련해 지난해 SKT와 ㈜SK가 쓴 돈이각각 500억원에 달했다. 그런데 매출은 30억원에 불과했다. 이래서야 이자 비용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SKT가 텔레매틱스 사업에서 손 뗄 수 없는 건 경영전략적 측면에서 그만큼 가치 있는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SKT가 의욕적으로 추진 중인 위성DMB(Digital Multimedia Broadcasting·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 사업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자동차 메이커와 원활한 제휴가 이루어질 경우 해외진출이라는 SKT의 ‘숙원’을 푸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시장 규모만 해도 그렇다. 2005년이 되면 텔레매틱스의 세계시장 규모는 약 18조~23조원, 국내시장 규모는 약 8000억~1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무엇보다 텔레매틱스는 참여정부와 정통부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분야다.
“1위 업체간 손잡기 시간문제”
현대차도 갑갑하긴 매한가지다. 곧 상업서비스를 시작한다지만 손익분기점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일단 ‘사돈’ 사이인 LG텔레콤, LG전자와 손을 잡았으나 SKT와 삼성전자에 비해 힘이 달리는 게 사실이다. 또 ‘인터넷 자동차(e-car)’ 개발에 있어 획기적 진전을 보기 전에는 르노삼성차에 비해 차별적 우위를 점한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현대차 역시 텔레매틱스 사업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자체로 고수익원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효율적 시스템 구축에 성공할 경우 내수, 수출 양쪽에 있어 확실한 특장점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e-car 개발은 전기자동차 등 친환경적 미래차 생산 기술이 턱없이 부족한 현대차에겐 절박한 과업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빈약한 시장을 활성화하고 △정부의 물적·제도적 지원을 이끌어내며 △경쟁체제로 인한 힘 소모를 방지하고 △원천기술 개발과 효율적 시스템 구축으로 해외시장 진출에 성공하기 위해선 각 분야 1위 업체인 SKT-현대차-삼성전자의 협력체제는 필요충분조건에 가깝다.
또 이는 과거와 같은 재벌 그룹의 선단식 세계시장 개척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지금, 대기업간 협력 및 역할분담이라는 새로운 산업 모델을 시험해볼 수 있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현재 ‘1위 업체간 손잡기’에 있어 더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쪽은 SKT다. 중심 시장인 비포 마켓 진출을 위해선 현대차와의 제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 SKT 관계자는 “사실 지난봄 현대차 쪽에 비슷한 얘기를 넣어봤다. 그때는 어쩌다 보니 일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물론 아직 ‘주도권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정도의 속시원한 의사표현까진 하지 않은 상태다. 그렇더라도 현대차에서 옆구리를 찔러준다면 언제든 응할 준비가 돼 있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현대차 역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곧 공식적인 말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화답’했다.
두 업체의 협력은 동북아위, 정통부 등 정부가 원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정태인 동북아위 기획조정실장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부터 양사 관계자를 만나 “텔레매틱스는 동북아위의 중심 사업이 될 것이다. 그를 위해 양사간 협력이 절실하다. 주도권 다툼보다는 공동 R&D 클러스터 설치 등을 위해 힘써달라”는 뜻을 전해왔다.
한편 SKT는 텔레매틱스 외에도 신용카드, 위성방송, 전자결제 등 여러 미래산업 분야에서 타업종 1위 업체들과 갈등 또는 충돌을 겪고 있다. 텔레매틱스 사업과 관련한 SKT의 전향적 자세가 타 분야로도 확산될지 또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