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기술 발전의 최대 수혜주인 엔비디아와 TSMC, SK하이닉스가 구축한 이른바 ‘팀 엔비디아’가 매서운 기세로 질주하고 있다. 세 기업은 그래픽처리장치(GPU)와 파운드리, HBM3(4세대 고대역폭메모리)를 각각 독점하다시피 하면서 AI 산업의 과실을 누리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들은 AI 인프라 구축에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금을 쏟아부으며 GPU, HBM 시장에서 ‘물주’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날 AI 산업과 GPU, HBM 시장은 장밋빛 전망으로 가득하지만 일각에선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막대한 투자가 집중되는 AI 산업이 언제쯤 수익을 낼지, 그 과정에서 ‘죽음의 계곡’(death valley: 기업이 기술개발에 성공했으나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구간)은 어떻게 돌파할지 여부다. 반도체가 핵심 먹거리인 한국 경제에선 한 가지 물음표가 더 따라붙는다. HBM 중심으로 재편된 반도체 시장에서 향후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어떻게 생존하고 발전할지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이상윤]
SK하이닉스, HMB4 단계에서도 우위 유지할 것
이에 대해 20년 이상 반도체 시장을 분석해온 전문가인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AI 산업에서도 일종의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이 단기적으로 나타날 수 있겠지만 배터리 등 다른 산업처럼 장기화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며 “반도체 시장에선 SK하이닉스가 HBM4(6세대 고대역폭메모리) 단계에서도 주도권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되며, 메모리반도체와 온디바이스(on-deive) AI 영역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는 기업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11월 5일 이 센터장을 만나 AI 산업과 HBM 시장 전망에 대해 자세히 들었다.
HBM4 단계에서도 SK하이닉스 우위가 유지될까.
“당초 SK하이닉스는 HBM4 생산 시점이 내년 말이 될 것이라고 말해왔다. 그런데 최근 ‘SK AI 서밋 2024’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요청했다며 ‘HBM4 공급을 6개월 앞당기겠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가 HBM4에서도 경쟁사보다 앞서갈 것임을 명확히 밝힌 대목이다. SK하이닉스가 ‘어드밴스드(advanced) MR-MUF(매스 리플로-몰디드 언더필: 칩과 칩 사이에 액체 보호제를 주입해 굳히는 공정) 기술로 16단 HBM3E 생산이 가능하다’고 말한 점도 주목된다. 그간 MR-MUF가 12단 제품 생산까진 우수한 기술이지만 단수가 높아지면 어려움에 처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다. SK하이닉스가 테스트 결과 기존 공정을 16단 HBM3E에도 문제없이 적용할 수 있다며 우려를 불식했다.”
최근 마이크론이 HBM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마이크론의 목표는 HBM 시장에서도 기존 D램 시장에서와 비슷한 정도의 점유율 확보인 것으로 보인다. 시장 선두가 되겠다기보다 2등과 격차를 줄여 3등이 되겠다는 것이다. 향후 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 위치를 위협할 존재가 있다면 마이크론보다 삼성전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한다.”
최근 삼성전자는 엔비디아 HBM 납품에 유의미한 진전이 있다고 발표했다.
“공표된 내용은 아니지만 내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HBM 매출액에선 삼성전자가 SK하이닉스에 크게 뒤지는 것 같지 않다. 엔비디아 납품 이슈가 남아 있긴 하지만 곧 해결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당초 늦어도 올해 3분기 중 삼성전자의 엔비디아 납품이 이뤄질 것이라고 봤는데 시장 기대보다 많이 지연된 것은 사실이다. 그로 인해 삼성전자가 ‘반성문’까지 내놓고 올해 안에 엔비디아에 납품할 것이라고 얘기했으니 일단 믿어볼 일이다. 관건은 엔비디아 납품에서 진전이 있다는 게 메인 제품인 H100나 H200, 블랙웰인지 혹은 그 외 제품인지 여부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3월 18일(현지 시간) 자사의 신형 인공지능(AI) 반도체 칩 ‘블랙웰을’ 공개했다. [GETTYIMAGES]
엔비디아, 내년까진 지금 같은 실적 성장세 전망
투자자들 이목은 엔비디아의 시장 독점과 주가 상승세가 언제까지 이어질지에 쏠린다. GPU 시장에서 후발 주자와 격차가 줄어들면 엔비디아의 매출과 주가도 조정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이 센터장의 전망이다.
“그래픽 시장에서 엔비디아와 AMD의 매출 격차가 빠르게 좁혀지는 것 같지 않다. 엔비디아의 파워는 AI 작동에 필요한 제반 기술들, 가령 초고속 네트워킹 기술인 NV링크(link)나 핵심 소프트웨어 쿠다(CUDA)에서 비롯된다. 당장 AMD 같은 후발 주자가 그래픽카드 경쟁력을 키운다고 해도 다른 기술 수준까지 끌어올리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엔비디아 점유율이 점차 떨어지더라도 급격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엔비디아의 내년 매출에 대한 컨센서스는 1650억 달러(약 234조4000억 원)에 달한다. 그보다 많은 2000억 달러(약 280조5400억 원)에 이를 가능성도 있다.”
투자자 관점에서 엔비디아 주식은 업사이드가 적고 밸류에이션이 높아 보인다.
“그렇다.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 엔비디아 주가가 쌀 수는 없다. 지금 엔비디아가 받는 제품 단가도 굉장히 높은데, 가령 GP 마진(매출 총이익률)이 80%에 달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엔비디아가 내년은 몰라도 내후년까지 시장 눈높이에 맞는 실적 성장세를 보이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투자자 입장에선 AI 섹터의 다른 영역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영역인가.
“국내 반도체 업체들을 눈여겨보고 싶다. 가령 SK하이닉스가 엄청난 이익을 내고 있다. 마이크론과 비교하면 이익 규모가 3배(3분기 영업이익 SK하이닉스 약 7조300억 원, 마이크론 약 2조4000억 원)에 달하는데 시가총액은 더 낮다. 한국 주식시장의 디스카운트 때문이다. 또 하나 짚어볼 점은 메모리반도체에 대한 시장의 과도한 불신이다. 메모리에는 지능이 없기 때문에 주(主)가 아니라 종(從)으로 따라붙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HBM 다음 단계로 거론되는, 메모리의 아키텍처를 고도화·효율화하는 CXL(컴퓨트 익스프레스 링크)에선 메모리의 부가가치가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메모리도 장기적 관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현 시장 상황을 보면 ‘반도체 겨울’이 올 것 같지는 않다. HBM이 워낙 반도체 시장을 견고하게 받치고 있다. 예전처럼 반도체 업황이 들쭉날쭉한 사이클을 나타내기보다 우상향할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HBM뿐 아니라 메모리 섹터도 현재의 낮은 밸류에이션이 재평가될 기회를 맞을 것이라 본다.”
HMB 시장이 계속 성장하려면 지금처럼 빅테크가 AI 투자를 지속적으로 늘려야 한다. 제아무리 빅테크라지만 언제까지고 투자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AI 산업에서 옥석 가리기가 본격화되면 거기서 밀린 빅테크의 투자 규모도 줄어들 것이다. 일각에서 AI ‘죽음의 계곡’ 우려가 높아지는 이유다.
AI 산업 ‘죽음의 계곡’ 조짐 아직 없어
AI 산업이 죽음의 계곡을 맞을 가능성은 없나.
“빅테크는 말 그대로 일반 기업이 아닌 빅테크다. 굉장히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고 엄청난 수익을 내며 계속 성장 중이다. 향후 빅테크의 AI 투자가 다소 둔화될 수는 있겠지만 아직 그런 조짐은 없어 보인다. 3분기 4대 빅테크(아마존·MS·메타·알파벳)의 CAPEX(자본적 지출)는 약 603억 달러(약 84조6000억 원)로 전년 동기 대비 62%가량 증가했다. 사실 증권가에서도 이들 빅테크의 CAPEX 증가율이 2분기 피크를 찍고 3분기 다소 둔화하지 않을까 전망했다. 하지만 현실에선 3분기 들어 2분기보다 증가율이 더 가팔라졌다. AI 산업에서도 죽음의 계곡이나 일종의 캐즘이 단기적으로 나타날 수 있겠지만 배터리 등 다른 산업에서처럼 장기화되지는 않으리라 본다. AI 기술은 아직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 연구나 투자 규모가 급격히 줄어들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향후 AI 산업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까.
“결국 온디바이스 AI 시대가 열릴 것이다. 이는 곧 AI가 스마트폰 같은 디바이스에 널리 쓰이는 에지(edge) AI 단계다. 현재 엔비디아 칩은 주로 데이터센터용으로 쓰이는데, 그 정도 고가 그래픽카드를 스마트폰에 쓸 수는 없다. 따라서 그보다 경량화되고 특정 기능에 특화된 애플리케이션(앱) 칩이 나올 것이다. 이런 시장 분화 과정에서 여러 업체가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국내외 기업은.
“국내 기업으로는 비상장업체인 퓨리오사AI, 리벨리온, 망고부스트가 아직 본격적으로 실적을 낸다고 보긴 어렵지만 기회가 있을 수 있다. 미국에도 온디바이스 AI와 관련된 업체가 많다. 개인적으로 그중에서도 ‘반도체의 전설’ 짐 켈러가 CEO(최고경영자)로 있는 ‘텐스토렌트’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텐스토렌트는 온디바이스용 NPU(신경망처리장치)를 만드는 회사다. ‘엔비디아와 경쟁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들이 다루지 못하는 특정 영역에 최적화된 가벼운 칩을 공급하겠다’는 게 텐스토렌트 입장이다. 혹시라도 투자 기회가 있다면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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