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통신대 프라임칼리지가 재취업 희망자들을 위해 마련한 강좌.
평균 퇴임 연령 53세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 하루 종일 우중충한 날씨가 이어지다 저녁이 되자 차가운 기운이 뼛속까지 파고들던 11월 20일 오후 6시 50분경,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한국방송통신대학(방통대) 본관에 중년 남녀가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인적이 드문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 소강당 앞에 도착하자 썰렁한 여느 층과 달리 북적이는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다.
방통대 프라임칼리지(Prime College)가 ‘4050세대의 재취업과 창업을 위한 준비’를 주제로 5회에 걸쳐 마련한 강좌 중 두 번째 시간이었다. ‘사례별 새로운 경력 목표와 전략 수립-인생2막, 무수히 많은 길이 있다’를 들으려고 저녁시간임에도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프라임칼리지는 교육과학기술부가 인생 후반기를 준비하는 4050세대를 지원하려고 설립한 단과대학이다.
강의 시간인 7시가 가까워오자 강당 안은 중년 남녀 60여 명으로 꽉 찼다. 강의가 시작되자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로 실내는 후끈 달아올랐고, 중간 휴식시간도 없이 두 시간 동안 이어진 강의에서 자리를 뜨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강의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졌다.
“한 직장에서 30년을 근무했는데 내가 과연 무엇을 잘하는지 고민이다. 재취업하려면 나만의 강점을 찾으라고 하는데, 그걸 어떻게 찾나?”
“전직에 관심이 많아 전직 지원 서비스 같은 일을 하고 싶다. 그런 직업에 비전이 있나.”
강좌가 끝나고 만난 40대 후반 남성 수강생은 “전 직장에서 부장으로 퇴직한 지 1년이 지났다. 그동안 인터넷 취업포털사이트와 중·장년층 일자리 박람회 등 수없이 많은 곳을 찾아 이력서를 내봤지만 단 한 군데서도 연락이 없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막막하고 답답해서 강좌를 들으러 왔다”고 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국내 직장인의 평균 정년퇴임 연령은 53세다. 이미 700만 명을 헤아리는 베이비부머들이 본격 은퇴 시기를 맞았고 거기다 40대에 해당하는 2차 베이비부머들(1968~74년생)까지 은퇴 대열에 합류하면서 이들의 재취업 문제가 청년실업과 함께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정부는 고용노동부 산하에 중견전문인력 고용지원센터를 설립하고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등 총 6개 기관을 고용지원센터로 지정해 베이비부머 은퇴자들의 재취업을 돕고 있다. 고용지원센터 사업 실적에 따르면, 지난해 6개 지정기관을 통해 구직활동을 한 7781명 가운데 실제 취직에 성공한 사람은 2732명으로 35.1%를 차지했다. 이는 다시 말해 베이비부머 10명 가운데 6~7명은 재취업에 실패했다는 얘기다.
능력 인정하지만 채용에는 소극적
중견전문인력 고용지원센터 외에도 전국 고용지원센터와 대한상공회의소 기업인력지원센터, 소상공인진흥원의 시니어넷, 고용노동부 워크넷 등 베이비부머의 일자리 마련과 재취업을 위한 서비스 기관들이 운영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와 공공기관, 민간단체 외에 인터넷 취업포털사이트나 헤드헌트 업체, 전국적으로 수시로 열리는 중·장년층 일자리 박람회 등을 통해서도 베이비부머가 재취업할 수 있지만, 실제로 이런 곳을 통해 재취업에 성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취재 도중 만난 재취업 컨설턴트는 “박람회나 취업포털사이트 같은 곳은 구직자와 구인자를 한자리에 모아놓은 시장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사장이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를 뽑는 데 시장에 가서 물건 사듯 하겠나. 수백 명, 수천 명이 북적대도 실제 취업으로 잘 연결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박람회장에 가보면 주최 측 강요에 못 이겨 형식적으로 참가해 전시용으로 부스 하나 차려놓고 달랑 직원 한 명 앉아 있는 곳도 많다. 보험업체나 인력파견업체 부스만 많다 보니 실제 중·장년층 취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특히 청년 취업박람회보다 중·장년층 재취업 박람회장이 그런 경향이 강하다”고 귀띔했다.
베이비부머가 재취업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나이다. 아직 우리나라 정서상 자신보다 나이 많은 부하직원에게 지시를 내리고 질책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중견 전문인력 종합고용지원센터를 운영하는 전경련 중소기업협력센터가 최근 중소·중견기업에 재취업한 베이비부머와 그들을 채용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중견인력이 회사 업무성과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응답한 기업은 68%였다. 반면 향후 중견인력 채용계획을 묻는 질문에선 “현행 채용 인원만 유지하겠다”고 응답한 기업이 40.3%를 차지했고 “채용을 늘리겠다”는 기업은 11.2%에 그쳤다.
이렇듯 기업들은 베이비부머의 능력과 회사에 대한 기여도는 높이 사면서도 채용에는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 “나이가 많아 업무지시가 쉽지 않다”(23.7%) “나이 차이로 기존 직원과 팀워크 발휘가 어렵다”(18.8%) “건강 문제가 발생할까 염려된다”(15.1%) 등 나이로 인한 부담을 꼽은 비율이 57.6%를 차지했다.
조사를 담당한 임철원 선임컨설턴트는 “중견인력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나이보다 업무능력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기업인식이 전환되고 사회풍토도 그런 방향으로 조성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방구 이력서’로는 안 돼
인터넷에선 베이비부머 재취업을 둘러싸고 답답함을 호소하거나 눈물 나는 분투기를 토로한 글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50대 초반입니다. 해외 주재 경험이 있어 영어를 잘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많은 게 걸리네요. 이 나이에 재취업이 가능할까요? 답답합니다.” “대기업에 다니던 50대 남자 분이 재취업이 안 돼서 치킨가게를 시작했는데, 직접 아파트를 돌며 전단지를 돌리다 경비한테 욕을 먹자 그걸 본 아들이 경비를 가만 안 둔다고 분노하는 걸 봤습니다. 참 눈물 나는 현실입니다.”
베이비부머 재취업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바늘구멍 같은 현실을 뚫고 성공한 사람도 꽤 된다.
한 중소기업에서 25년간 근무하다 최고재무책임자(CFO)로 퇴직한 50대 초반 K씨는 민간단체가 운영하는 전직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3개월 동안 교육을 받았다. 그 기간 여러 차례 이력서를 냈고 딱 한 번 면접 기회를 얻었지만 재취업으로는 연결되지 않았다. 그 후 재취업 컨설턴트를 찾은 그는 ‘이력서’ 대신 A4 용지 두 장 분량으로 ‘재무관리 수행방식’이란 제목의 이력서를 만들었다. 중소기업 재무관리 문제점과 개선방안을 맨 앞에 적고 자신이 취업한다는 가정하에 ‘연간 10% 비용 절감’을 직무수행 목표로 내세웠다. 그러고는 그 밑에 자신의 주요 경력과 입사지원 동기, 포부를 간략히 정리해 지난해 6월 한 중소기업에 냈고, 2주 만에 재취업에 성공했다. 제안서 형식의 이력서가 최고경영자(CEO)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소상공인진흥원이 주관하는 시니어창업스쿨 경영·기술 컨설팅 분야를 수료한 50대 중반 황우연 씨는 현재 중소기업진흥공단 청년창업사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금융기관 지점장을 끝으로 재작년에 은퇴한 그는 30년 직장경력 외에 경영지도사, 재무설계사 자격증과 경영학 박사학위 등 자신의 강점을 활용해 경영컨설팅 회사를 운영할 계획도 세웠다.
이렇듯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그 전에 필드에서 활동 경험을 쌓으려고 청년창업사관학교 교수직에 도전해 재취업에 성공했다. 황 교수는 “시니어가 은퇴 후 가만히 앉아 있으면 ‘모셔갈 곳’은 없다. 창업이든 재취업이든 자신이 원하는 길을 고민해보고 좋은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취업·창업교육을 받기 위해 발품을 마다하지 않는 적극성을 가져야 한다”고 충고했다.
재취업에 나선 수많은 베이비부머가 공통적으로 푸념하는 소리가 “수십 군데 이력서를 냈지만 면접 보러 오라는 곳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이력서는 재취업 전문가들 사이에서 ‘문방구 이력서’라고 불린다. “증명사진과 함께 이름, 주민등록번호, 학력, 경력을 차례로 나열하는 전형적인 이력서로는 취업이 불가능하다”는 게 재취업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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