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기업의 조세 회피 문제가 국제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최근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아일랜드 정부가 미국 애플사에 감면해준 130억 유로(약 16조 원)를 징수해야 한다는 이른바 ‘애플세(Apple Tax)’를 발표하면서 EU와 미국 간 통상마찰 문제로 확대될 우려가 제기됐다. 2013년 브라질 정부에 이어 2015년 호주 정부는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OTT(Over The Top·인터넷으로 볼 수 있는 TV 서비스) 사업자의 디지털 콘텐츠 다운로드 수익에 부가가치세를 부과하는 ‘넷플릭스세(Netflix Tax)’를 발표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미래창조과학부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구글 정밀지도 반출 논란’으로 촉발한 구글의 조세 회피 문제가 다뤄지면서 ‘구글세(Google Tax)’ 도입 논의가 한층 거세지고 있다. 2014년 세법 개정을 통해 구글이나 애플 앱스토어에서 판매되는 해외 개발자 애플리케이션(앱)에도 부가세를 부과하기로 결정한 데 이어, 다국적기업의 법인세 납부 논의로도 확대되는 추세다. 국내 사업자와 해외 사업자에 대한 조세, 규제 형평성 문제뿐 아니라 과세 주권 차원에서도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법인세수 2400억 달러 감소
다국적기업의 조세 회피 문제에 대해 국제사회의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글로벌 차원의 ‘구글세’ 격으로 나온 것이 ‘BEPS(Base Erosion and Profit Shifting·세원 잠식 및 소득이전) 프로젝트’다. BEPS 프로젝트는 변화된 경제구조 하에서 각국 정부와 국제사회의 세무적 과제 및 대응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2012년부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진행해 완성한 결과물을 지난해 11월 G20 정상회의에서 세계 각국 정상이 공식 승인하면서 국제 세법과 조세조약 개정의 신호탄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BEPS 프로젝트는 이중과세 방지에 초점을 맞춘 국제조세체계가 급변하는 현대 사업환경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인식에서 나왔다. 현행 국제조세체계는 이중과세 방지를 위한 국제적 공조의 결과로 20세기 전반 그 틀이 완성됐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국가 간 군수물자의 원활한 이동을 보장하는 것이 선진국의 공통 관심사로 부상하면서 1928년 국제연맹 주도로 국가 간 조세조약 기준이 되는 모델조약이 만들어졌다. 전후 OECD 모델조약이 이를 승계했고, 현재까지 양자 간 조세조약의 글로벌 기준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세계화가 본격화한 이후에는 이중과세보다 이중비과세와 조세 회피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무역정책 자유화, 운송비용 감소 등으로 세계경제의 글로벌화가 진행되면서 다국적기업은 국경을 넘어 경영 자원의 유연한 배치가 가능해졌다. 이를 통해 다국적기업은 각국 조세법과 조세조약의 허점을 이용해 이중비과세 혜택을 받거나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을 수 있었다.
2000년대 후반 스마트폰 보급으로 모바일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다국적기업의 조세 회피는 점점 더 탄력을 받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지적재산권의 이동과 서비스 공급이 가치 창출 요인으로 부각됐으나 국제조세체계는 과거 20세기 초반의 틀에 머물다 보니, 다국적기업이 합법적으로 조세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여지가 더욱 커졌다. 특히 인터넷 광고, 클라우드 컴퓨팅, 인터넷 앱스토어,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등 해외 사업자(비거주자)가 인터넷을 통해 원격으로 자국 고객(거주자)과 거래하면서 상당한 수익을 거두는 반면, 과세 가능한 실체(taxable presence)가 없는 경우가 매우 많다.
다국적기업의 조세 회피가 확대됨에 따라 세계 각국은 과세 주권과 조세 형평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OECD 추정에 따르면 2014년 기준으로 다국적기업의 조세 회피로 인한 전 세계 법인세수 감소분은 연간 최소 1000억 달러에서 최대 2400억 달러(약 274조2000억 원)로, 전 세계 법인세수의 4~10%에 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2000년 32.6%였던 OECD 회원국의 실효법인세율은 2011년 25.4%로 크게 하락했다. OECD는 각국의 법인세 인하 영향뿐 아니라 다국적기업의 조세 회피가 실효법인세율 감소를 부추겼다고 보고 있다.
BEPS 프로젝트는 15개 실행안을 통해 조세 회피 문제를 식별하고 대응하고자 한다. 총 15개 행동 지침으로 국제조세체계의 일관성, 실재성, 투명성 확보를 목표로 한다. 즉 국가 간 세법 차이 및 특혜조세제도 등을 활용한 조세 회피 행위를 방지하고자 과세제도의 일관성(coherence) 확보, 디지털 경제 등 새롭게 변화하는 국제 거래 환경을 반영한 국제 기준의 정비 및 강화를 골자로 하는 국제거래 사실관계의 실재성(substance) 강조, 기업 거래 정보의 공유와 조세 분쟁 해결 절차의 투명성(transparency) 확보를 골자로 한다.
다국적기업 정보공개 의무화
BEPS 프로젝트의 제반 규정들은 디지털 경제에서 조세 회피 전략을 통제하는 데 유용할 것으로 평가된다. 예를 들어 유해 조세제도에 대한 대응에 따라 지나치게 낮은 세율 같은 유해 세제를 시정할 수 있다. 아일랜드와 네덜란드에 법인을 설립해 다국적기업의 조세 회피 전략의 대명사가 된 애플의 ‘더블 아이리시 위드 어 더치 샌드위치’(Double Irish with a Dutch Sandwich·2개의 아일랜드 법인과 1개의 네덜란드 법인을 끼워 마치 샌드위치 같다는 의미) 방식도 유해 조세제도로 판정될 경우 수정할 수 있을 전망이다.
또한 고정 사업장의 범위를 확대해 과세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디지털 경제의 주요 사업모델에 대한 대응책도 마련했다. 투명성 관련 실행 안은 과세당국에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국가 간 정보를 교환해 조세 회피를 억제하고 있다. 이는 가장 가시적인 성과이며, 기업들은 정보 제출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상황이다.
BEPS 프로젝트 하에서는 조세 회피 방지를 위한 원칙과 정보공개 등을 통해 그동안 놓치고 있던 기업활동도 포착할 수 있다. 한 번 발표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변함에 따라 그에 맞는 내용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해야 하기 때문에 BEPS 프로젝트는 일종의 국제조세체계의 플랫폼이라 볼 수 있다. 디지털 경제로 인한 광범위한 조세 문제를 지적하고, 잠재적인 해법을 제시하고자 한 노력도 눈여겨볼 만하다.
하지만 BEPS 프로젝트는 대응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동안 느슨하게 구성돼 있던 양자 간 국제조세체계가 이제는 다자간체제로 한 단계 도약함으로써 다국적기업과 눈높이를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글로벌 시장을 넘어 점차 확대되고 있는 디지털 경제라는 새로운 경제 공간은 이제야 조금 이해됐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