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턴 무비는 서부를 배경으로 권선징악의 주제가 전개된다. 비겁하고 사악한 악당이 있고 이와 맞서는 착한 우리 편, 주인공이 있다. ‘놈놈놈’은 200억원이라는 많은 제작비를 들여 30년대 만주 모습을 재현했다. 그리고 나라 잃고 만주 벌판을 헤매는 조선인들과 오직 돈만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냉혈한 마적들, 대륙 점령의 야욕으로 가득 찬 일본군을 뒤섞어 웨스턴 무비 스타일의 오락영화를 만들어냈다.
영화 제목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지만 그 세 영역이 딱히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제목에는 선과 악이 구별되고 그 완충지대에 이상한 놈이 있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그들은 위치 이동하면서 영역이 혼재된다. 관객들이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착한 주인공은 열차강도 윤태구인 듯 보이지만, 그는 전형적인 착한 인물과 거리가 멀다. 이는 주변부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조선인이지만 더러운 친일파 앞잡이 박판수(송영창 분)가 있고, 조선인 중국인 러시아인으로 뒤섞인 잡탕 마적단도 있다. 상황 자체가 포스트모던이다.
‘놈놈놈’에서 정우성과 이병헌은 말을 타고, 송강호는 오토바이를 탄다. 특히 마적단 두목 박창이 역의 이병헌은 직업상 늘 말 위에서 살아야 한다. 능숙하게 말을 다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병헌은 ‘놈놈놈’을 찍으면서 말 타는 법을 배웠다.
“어릴 때 민속촌에서 말 타본 것, 그리고 제주도에서 조랑말 타본 게 전부였다. ‘달콤한 인생’을 같이 한 김지운 감독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힘들게 ‘놈놈놈’ 출연을 결정했는데 다음 날 발목이 부러지는 사고가 났다. 그때 나는 내가 이 영화를 못할 운명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오기가 생겼다. 깁스를 한 달 반 한 뒤 기초부터 말 타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의외로 빨리 배워 스태프들에게서 운동신경이 좋다는 말을 들었다.”
이병헌은 ‘놈놈놈’을 통해 오랜만에 국내 관객들과 인사한다. 그는 최근 200일 이상을 중국 미국 체코 등 해외에서 체류했다. 두 편의 할리우드 영화, ‘시클로’를 만든 베트남 출신 트란안홍 감독의 ‘I come with the rain(나는 비와 함께 간다)’과 스티븐 소머즈 감독의 ‘지 아이 조(G.I. Joe)’를 찍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영어로 말이 잘 통하지 않아 ‘거만한 동양 배우’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이제는 할리우드식 촬영장 분위기에 적응해가고 있다. 앞으로도 이병헌은 당분간 국내보다는 할리우드 등 해외 공략에 집중할 생각이다.
한국형 웨스턴 무비를 만든 ‘놈놈놈’은 한국 오락영화의 수준에서 진일보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30년대의 만주는 포스트모던 공간이다. 중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고 한국도 아니다. 그래서 국적 불명의 비빔밥 짬뽕 퓨전 양식이 등장한다. 군사력에 의지하는 일본군의 야욕이 있고, 돈이 최우선 가치인 마적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조국 독립의 사명감을 갖고 움직이는 조선 독립군들도 있다. 절대적인 가치가 부재하고, 모든 것이 혼재된 공간의 매력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놈놈놈’은 이 부분에서 분명하게 좌표를 설정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놈놈놈’이 이 매력적인 공간을 제대로 살려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냥 신기하고 황당하고 어지러울 뿐이다. 관객들의 상상력을 뒤흔들며 번쩍 정신이 들 만큼 새로운 길을 제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철학이라고 해서 거창한 이념이 등장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30년대 만주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가. 나라 잃고 만주 땅까지 밀려난 조선인들이 왜 마적이 되고 열차강도가 되고 현상금 사냥꾼이 돼야 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이 바닥에 깔리며 진행되는 것과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는 것은 다르다. 배우나 감독은 혼돈된 상황 속에서 같이 혼돈된 채 뛰어가서는 안 된다. 뛰어가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로 뛰어가는지, 왜 뛰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오랜 연기생활 악역으로 새 연기인생 도전
‘놈놈놈’에서는 불행하게도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중심인물인 세 남자의 캐릭터 설정은 각각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으로 돼 있지만 그들이 꼭 이 전형성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적 깊이를 더하기 위해 그들이 원래 부여받은 캐릭터의 전형성을 탈피하고 위치 이동하는 순간, 각자 갖고 있던 고유의 영역이 모호해지고 겹쳐지는 그 순간을 김지운 감독은 날카롭게 포착했어야만 했다. 절반의 성공을 거둔 ‘놈놈놈’은 발상의 새로움과 거대한 스케일과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있지만, 가장 핵심이 되는 이야기의 치밀함과 캐릭터의 새로움이 부족해 아쉬움을 준다.
“오래전부터 악역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 내가 찍은 영화는 대부분 멜로 장르다. 그런 영화를 찍으면서도 내가 악역을 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연기는 재미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연기한 악역이 실망스럽게 보인다면 어떡하나 걱정도 컸다. ‘놈놈놈’에서 나쁜 놈 박창이 역을 제의받고, 부담이 되면서도 한편으론 재미있을 같았다. 영화를 찍고 난 뒤 처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경험을 해 뿌듯하다.”
‘놈놈놈’의 최후의 승자는 이병헌이다. 비록 윤태구와의 재대결에서 이기지는 못하지만, 그는 정우성 송강호와의 연기 대결에서 결코 밀리지 않는다.
이렇게 각각 다른 목적으로 세 남자가 부딪치는 ‘놈놈놈’의 도입부는 매우 매력적이다. 열차강도, 마적단 두목, 현상금 사냥꾼 등 전형적인 웨스턴 무비의 클리셰가 등장해 30년대 만주라는 공간과 부딪치며 미묘한 울림을 준다. 더구나 달파란과 장영규가 만든 사운드는 매력적이다. 웨스턴 무비의 익숙한 음악들을 변주해서 낯익으면서도 새로움을 창출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야기 치밀함과 캐릭터 부족은 아쉬움
말을 타고 만주 벌판을 누비는 박창이의 캐릭터는 최고를 향한 집념의 승부사다. 그는 자신이 최고라는 소리를 듣기 원한다. 몇 년 전 어느 사건 현장에서 윤태구와 조우했다가 그에게 손가락 하나를 잘린 것을 생애 최고의 수치라고 생각한다. 그는 잘린 손가락을 감추기 위해 늘 검은 장갑을 끼고 다닌다. 윤태구와 다시 만나 자신이 최고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송강호와 이병헌, 정우성. 한국영화의 한 영역을 담당하고 있는 세 남자배우가 부딪친다면 연기가 비교될 수밖에 없다. 박도원 역을 맡은 정우성은 ‘비트’ 이후 아무렇게나 해도 멋있는 그림이 연출되기에 카메라는 늘씬한 그의 전신을 잡는 데 주력한다. 달리는 말에서 총신이 긴 라이플을 꺾어서 총을 쏘거나, 도르래 줄에 의지해 허공을 날아다니며 장총을 쏘아대는 정우성을 보면 말이 필요 없어진다. 그저 멋있을 따름이다.
“촬영 들어가기 전, 어떻게 나쁜 놈을 표현해야 할지 고민했다. 너무 근육질이거나 살집이 많은 것보다는 조금 마른 체형에 근육이 드러나는 모습이 더 악인 캐릭터에 어울릴 것 같았다.”
윤태구 역을 맡은 송강호는 ‘놈놈놈’의 이야기를 끌고 가는 핵심 주인공이다. 그러나 그의 캐릭터는 새롭지가 않다. 코믹 연기도 그동안 낯익게 본 송강호표 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칸에서는 먹히는 코믹 연기였지만, 그의 지나온 과정과 필모그래피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우리는 쉽게 웃음이 터지지 않는다. 가히 송강호의 굴욕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그는 최근 들어 가장 밋밋한 연기를 보여준다.
이병헌의 카리스마도 새로운 것은 아니다. 집요하게 복수를 위해, 최고라는 자존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눈빛을 번뜩이는 그의 모습은 만화적 캐릭터에 가깝다. 하지만 이병헌은 다른 두 배우보다 그것을 훨씬 생동감 있게 표현한다. 당대 최고의 연기파 배우 송강호와 이른바 ‘간지’가 나오는 정우성에게 절대 밀릴 수 없다는 그의 욕망이 만든 결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