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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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 인생…진심 강펀치 날린다”

  • 입력2005-03-24 14: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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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만장 인생…진심  강펀치 날린다”
    자신이 만든 영화가 사람들 앞에 최초로 공개될 때 감독의 마음은 어떨까? 류승완 감독을 만난 때는 그의 최근작 ‘주먹이 운다’ 시사회가 열린 날 저녁이었다. 시사회가 끝난 뒤 기자간담회를 하고 저녁을 먹기 위해 간 충무로의 한 식당에서 그는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쏟아냈다.

    영화감독이나 소설가는, 자신의 작품 앞에서는 신의 위치로 이동한다. 작품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캐릭터와 그 캐릭터들이 부딪치며 살아간 인생은 전적으로 감독이나 작가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자신의 뱃속에서 잉태되어 고통스럽게 세상에 나온 핏덩이를 보는 어미의 마음처럼, 류승완 감독은 ‘주먹이 운다’에 대한 절절한 애정을 고백했다. 그는 시사회에서도 “정말 잘 만들었거든요”라고 말하는 등 자신감이 강하게 배어나왔다.

    “난 내가 만든 영화가 좋다” 애정 고백

    “세상의 모든 감독이 그렇다. 영화가 개봉됐을 때, 비가 오고 아무도 오지 않고 영화가 망해도, 그래도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걸려 있는 극장 앞에 서 있을 수 있어야 한다. 내 새끼인데,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해도 내가 사랑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나는 내가 만든 영화들이 진심으로 좋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5년 전, 그의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극장 개봉되기 이전이었다. 나는 이 영화를 본 뒤 너무나 짜릿해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중학교 3학년 때 1년 동안 점심값을 모은 돈으로 8mm 중고 무비카메라를 사서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들과 영화를 찍었던 그는, 그러나 부모님을 잃고 하나밖에 없는 동생 류승범을 돌보며 소년 가장으로 성장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단편영화 모임에 들어가 영화를 찍다가 뒤늦게 영화 공부를 위해 들어온 연상의 여자를 만나 결혼하기까지, 그의 사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단편 하나 찍을 예산이 확보되면 영화를 찍고, 다른 데서 찍고 남은 자투리 필름을 모아 다음 단편을 찍고 하는 식으로 만든 4개의 단편을 묶어 완성시킨 옴니버스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된 뒤 마니아들의 입을 통해 ‘죽인다’는 입소문이 돌았다.

    나는 그의 영화를 처음 본 뒤, 한국 영화계에 또 한 사람의 재능 있는 감독이 탄생했다고 생각했다. 16mm 필름으로 찍은 이 영화가 일반 극장에 개봉되기 위해서는 35mm 필름으로 확대해야 했지만, 상업적 성공에 자신이 없었던 프로듀서는 16mm 영사기가 있던 코아아트홀 한 곳에서 상영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프로듀서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면 은행에 집이라도 잡혀서 확대 개봉하겠다고 설득했지만, 결국 그 영화는 코아아트홀 한 곳에서만 개봉되었다. 그런데 거의 전 회 매진될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자 2주일 뒤에야 다시 확대 개봉을 했지만 이미 시기를 놓친 뒤였다.

    “그 영화의 운명이 그러니 어쩌겠어요.”

    지난 이야기를 꺼내자 류 감독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데뷔작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TV 광고에 등장하기도 했다. 길거리에서도 일반 시민들이 그를 알아보고 사인을 요청했고, “류승완이야”라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파란만장 인생…진심  강펀치 날린다”

    류승완의 존재를 알린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피도 눈물도 없이’, ‘아라한 장풍대작전’(왼쪽부터).

    “돌이켜보면 그것은 허상이다. 그때는 무엇엔가 홀려 있었던 것 같다. 나 스스로 나를 조절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어린 나이에 너무 요란하게 데뷔해서 그런지, 언론과 미디어에서 나를 조절해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간 것 같다. 내가 영화를 만드는 근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진짜 중요한 것은 자기의 진심을 담는 것이다.”

    계단에 앉아 있는 모습은 개인사 흔적

    그의 다음 작품 ‘피도 눈물도 없이’는 전도연, 이혜영, 정재영이 주연을 맡았지만, 상업적으로는 실패했다. 작품은 좋지만 너무 무겁고 칙칙했다는 것이 사후 평가다. 다음 작품 ‘아라한 장풍 대작전’은 전국 200만 가까운 관객을 불러들이며 상업적으로는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비평에 있어서는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그러므로 ‘주먹이 운다’를 이제 막 공개한 뒤 그가 느끼는 감정은 복합적일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 대한 예의는 지켜줘야지. 영화 한 편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을 들이는데, 쌈마이(삼류) 영화에도 수많은 사람의 피와 땀이 깃들어 있다. 힘들게 찍은 영화에 대해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게 너무 화가 난다. 좋은 비평은 감독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것이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진지하게 분석하는 것인데 그런 것이 ‘아라한 장풍 대작전’의 비평에는 빠져 있었다. 부천국제영화제를 찾은 스튜어트 고든이 이 영화를 보고 흥분해서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 맨’보다 훌륭하다고 말했다. 오리엔탈리즘도 있었겠지만.”

    -머릿속에서 상상한 장면이 실제로 완벽하게 찍혀졌을 때 섹스보다 흥분된다고 한 적이 있는데, 이번 영화에서 그런 신을 꼽는다면?

    “두 인물의 분할화면이 나오는 이 영화의 엔딩 컷이다. 분할화면은 결승전에 두 인물이 남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할 때 한 번 등장하지만, 정말 힘을 준 것은 마지막 컷이다. 감독은 영화 안의 세계를 만들면서 신의 대리인 역을 하기도 하는데, 이번 영화는 두 인물의 삶에 너무 애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누구 한 사람의 손을 들어주기가 싫었다. 승자가 안 밝혀지고 크로스 펀치를 날리면서 끝나는 게 원래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그것은 비겁한 결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승자로 만들었지만, 누가 승자가 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태식과 상환의 삶은 마지막 15분 전까지 서로 만나지 않는다. 교차편집으로 진행되는데 왜 이런 구조를 만들었는가?

    “처음에는 서로 한 시간씩 배분해서 마지막에 만나게 하는 구조였다. 그렇게 해보니 앞에 나오는 사람이 무조건 손해를 본다. ‘킬빌’처럼 볼륨 1, 2로 만들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결국 두 사람의 삶을 수평으로 병행해서 보여주게 했다. 태식을 찍을 때는 방임형 연출이었다. 그리고 상환의 가족 이야기에는 나의 개인사가 많이 묻어 있다. 가령 상환이 아버지와 계단에 앉아 있는 신 같은 것이 그렇다. 그래서 가장 애착이 간다. 그런데 영화를 만들다 보면, 감독이 사랑하는 장면과 관객이 사랑하는 장면이 일치하지 않을 때도 많다.”

    “파란만장 인생…진심  강펀치 날린다”

    두 밑바닥 인생의 교차 드라마인 '주먹이 운다'의 한장면.

    -‘주먹이 운다’는 가족 문제를 핵심에 두었다. 당신에게 가족은 무엇인가?

    “가장 가까운 관계지만, 서로에 대한 애정이 서로에게 부담이 되기도 한다. 실제 혈육관계는 그렇게 끈끈하지 않다. 오히려 가까운 친구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

    -다음에는 저예산으로 액션영화를 찍겠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말은 못하지만 곧 들어갈 생각이다. 액션영화에 대한 욕망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처음 영화를 시작할 때는,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초까지 나왔던 성룡의 ‘프로젝트 A’ 같은 아크로바틱 액션영화를 하고 싶었다. 예전에는 장르영화가 재미있었는데 이제는 흥미가 없다. 인물이나 드라마, 사건들에 더 관심이 간다. 그리고 독창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독창적 장르영화는 어떤 것인가?

    “잘 만든 장르영화는, 작가의 세계관이 너무 드러나 보여서 영화가 짓눌리지 않는다. 영화가 오히려 감독의 색채를 드러내주기도 한다. 장르의 힘이 감독을 잡아먹는 게 아니라, 서로의 존재감을 있는 듯 없는 듯 지켜주는, 이게 나의 장르영화다.”

    인터뷰 도중 전화가 왔다. “미안하다, 네 영화 시사회 때 가지 못해서…’라고 그는 말했다. 임창정에게서 온 전화였다. 류승범 때문에 알게 되었고, 동갑이어서 친구 사이로 지내는데, 굉장히 좋은 배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임창정 역시 류승완의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주먹이 운다’의 태식과 상환은 서로 관련 없이 종반의 격돌을 향해 달려가지만, 두 인물의 궤적이 너무 닮아 있다. 마치 콜라주를 한 것 같다.

    “대칭구도를 의식한 것은 아니다. 주변에 등장하는 조력자도 그렇다. 살아가다 보면 패턴이라는 게 있는데, 다 비슷한 거 같다. 아주 특별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친구관계도 비슷하다. 내가 신경을 쓴 것은 두 인물의 이야기를 최대한 진솔하게 끌고 가는 것이었다. 예전에 작업하던 방식과는 많이 차이가 난다. 모든 것을 다 만들어놓고 그대로 가려고 한 것이 나의 예전 영화라면, 이번에는 현장에서도 계속 새로 만들어가는 방식이었다.”

    -최민식도 좋은 배우지만, 특히 류승범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캐릭터를 보여준다. 무서운 집중력과 섬세한 감성이 눈부실 정도였다.

    “아무도 류승범이라는 배우의 괴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나는 그것이 형으로서 답답했다. 이 훌륭한 인재를 이렇게 소모시키는 게 짜증났다. 그래서 내가 능력은 안 되지만 제대로 표현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승범이가 내 능력을 넘어선 연기를 보여주었다. 겸손 떠는 게 아니라 최민식과 류승범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찍을 수 없었다. 진짜 고마웠다. 잘 만든 영화에서는 인물들이 어떤 식으로든지 변화한다. 변화하지 않는 인물은 매력 없다. 죽어 있는 캐릭터다. 현장에서 두 배우가 너무나 잘 도와줬다. 배우들이 배우로 살아가는 이유가 있다. 굉장히 독종이다. 흡입력 있는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들을 보면 사람 같지 않을 때가 있다. 설경구, 송강호, 최민식, 이런 사람들을 보면 무섭다. 한국영화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훌륭한 배우들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영화를 만들면서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늙어간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그 나이에도 영화를 찍을 수 있다면….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에비에이터’를 재미있게 봤다. 마틴 스코시즈가 나이 드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세월에 몸을 맡기는 사람 같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살고 싶다”

    -당신에게 영화는 무엇인가?

    “영화는 거대한 환상이었고, 꿈이었다. 10대 후반에는 영화가 도피처이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이 대학 다니던 20대에 나는, 거리에 나와서 어떻게든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영화가 나에게 직업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루어졌다. 한때는 영화가 직업이라는 게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것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거대한 환상이 사라지고 추악한 모습을 목격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33년을 살았는데 감독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게 5년 정도 된다. 그 이전 조수 생활한 것까지 치면 영화를 해서 돈을 번 게 10년이 넘는다. 영화가 도피처였던 시절까지 올라가면, 내 인생의 3분의 2를 영화와 함께 살았다. 내 아내와 자식과 살 부딪치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지금 영화를 만드는 것은 나에게 직업 이상의 것이 되어 있다. 멋부리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영화는 내 삶의 모든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휴식도 영화를 보면서 한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이 소중하다. 나도 시간이 지날수록 영화가 소중해진다. 거장이 되고 싶은 욕망은 일찌감치 접었다. 내가 만든 영화가 세계를 제패하는 꿈도 접었다. 다만 영화를 만들면서 꾸준히 행복할 수 있다면 좋겠다. 진짜 잘 만든 영화를 볼 때 콤플렉스를 느낀다. 박찬욱, 봉준호, 장준환, 이런 감독들은 없어졌으면 좋겠다.”(웃음)

    “그 감독들은 당신의 영화를 보면서 똑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라고 내가 말하자 그는 크게 웃었다.

    ‘주먹이 운다’가 개봉하는 4월1일,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도 개봉한다. 한 주라도 서로 피해서 개봉하려고 했지만, 각각 쇼 이스트와 CJ에서 배급을 맡고 있는데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맞붙게 되었다. 두 감독은 아주 가까운 사이다. 그들은 서로 ‘우리 너무 불쌍한 거 아니니’라고 문자를 날려보았지만 결국 맞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말아톤’과 ‘공공의 적2’가 같은 주에 맞붙어서 두 작품 모두 흥행에 성공한 것처럼, 서로 잘되기를 바라고 있다. 류 감독과 옆에 있던 프로듀서는 자기 작품이 ‘말아톤’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만우절의 대격돌, 누가 흥행의 승자가 되든 이미 류 감독은 승자나 다름없었다. 그는 자신의 진정성을 담아 만든 영화가 어떤 파괴력을 갖는지 목격했고, 영화 만드는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의 삶이 구원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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