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5~6년 전 옌볜을 통해 ‘격치고부록’(格致藁附錄)과 ‘동의사상초본권비망록’이 입수되었고, 동무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던 지난해에 ‘동의수세보원’ 갑오본(1894년, 이제마는 여러 차례 ‘동의수세보원’을 고쳐 썼는데 갑오본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초고본으로 알려졌다) 필사본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동의수세보원’ 간행 100주년이 되는 올해 제자가 쓴 것으로 보이는 ‘보제연설’(普濟演說)까지 공개되어 사상의학계는 상당히 고무된 상태다.
‘보제연설’의 최초 발견자인 한국한의학연구원 안상우 선임연구원(학술정보부)은 출판된 적이 없는 필사본으로 초창기 사상의학의 임상 적용 사례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라고 설명했다.
“사상체질의학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있던 터라 고서점에 체질 비슷한 말만 있어도 일단 연락하라고 부탁했다. 청계천 고서점으로부터 연락받고 가보니 제목은 ‘보제연설’이라 되어 있으나 책 말미에 ‘동의수세보원보편(普遍)’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어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을 근간으로 한 책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저자가 누구인지 밝혀줄 단서가 나오지 않은 데다 서문에 ‘경자년 윤가을에 썼다’고 되어 있어 처음에는 작성시기를 1960년으로 추정하고 큰 가치를 두지 않았다. ‘동의수세보원’ 신축본의 간행연도가 1901년이니까 그 책을 보고 자신이 집필했다면 1900년 경자년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윤가을’이라는 대목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0년은 여름에 윤달이 들었고, 윤가을은 1900년 일이었기 때문이다.”
1900년 가을이라면 이제마가 운명한(1900년 9월) 무렵이며, ‘동의수세보원’ 신축본(1901년)이 간행되기 직전이다.
이제마는 1893년 집필을 시작해 13년 만에 사상의학의 이론적 배경이 담긴 철학서 ‘격치고’를 완성했고, 그해 7월13일부터 서울 남산 이능화(신채호, 주시경과 더불어 조선 근대 민족문화의 3대 학자로 꼽힌다)의 집에서 ‘동의수세보원’집필에 들어갔다. 이미 이론적 토대를 완성한 상태였기 때문에 사람의 체질을 주역 이치에 맞춰 네 가지로 구분하는 독특한 체질의학이 탄생하기까지 불과 9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후 고향 함흥으로 돌아간 이제마는 ‘동의수세보원’을 수정, 보완하는 작업에 몰두했고 이것이 1900년에 나온 ‘동의수세보원’ 경자본이다. 이듬해 이것을 다시 정리해 출판한 신축본이 나오면서 이 책이 오늘날까지 사상의학의 원전으로 널리 읽혀왔다.
이번에 발견된 ‘보제연설’은 시기적으로 갑오본과 경자개초본 사이에 있다. 안상우 박사는 ‘보제연설’의 저자가 당대 서울에 살던 한의사(책 중에 한남산이라는 지명이 나옴)로 이제마가 이능화의 집에서 초고를 집필하는 동안 사상의학을 접하고 제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스승의 연구를 토대로 수년간 임상실험을 거쳐 나름대로 처방까지 포함해서 쓴 책이 ‘보제연설’이라는 것이다. ‘보제’란 널리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고 ‘연설’은 자신의 창작이 아니라 ‘동의수세보원’을 부연설명한다는 의미.
이 책은 앞부분에 사상의학의 개설을 요약하여 제시하고 사상인의 외형과 체질, 약제, 처방을 차례로 담았다. 대부분 ‘동의수세보원’의 내용을 간추린 것이나 저자가 처방한 약들이 체질에 따라 어떤 효능의 편차를 보이는지 직접 관찰한 임상기록 부분은 오늘날 사상의학을 연구하는 한의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으로 보인다.
‘보제연설’을 번역하고 있는 상지대 김달래 교수(한의과대 학장·체질의학)는 “본문 중 ‘내가 정평 땅에 있을 때 일찍이 소양인 외감병에 소시호탕을 잘못 복용하여 하루도 넘기지 못하고 죽는 것을 봤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시호·황금은 비록 소양인의 열을 제거하지만 인삼·반하는 소양인에게 사용하지 말라는 약이니 어찌 살 수 있겠는가’라는 대목으로 보아 저자가 이제마의 고향 함흥 서남쪽에 위치한 정평에 살던 한씨 가문 사람일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이제마는 서른 살 무렵 정평을 방문했다가 어느 주막집 벽의 도배지로 쓰인 운암 한석지(1709~1803)의 ‘명선록’ 초고를 얻었다고 한다. 운암의 손자를 졸라 밤새워 ‘명선록’ 원본을 받아 읽은 뒤 나중에 제자 한창연을 보내 베껴 오도록 지시했다. 이것이 사상의학의 뿌리가 된 ‘명선록’이다. 실제로 함경도 지역에서는 한씨 가문이 한의사로 이름을 떨쳤고, 이제마의 제자 가운데는 유난히 한씨가 많았다. 김교수는 이런 정황으로 보아 저자가 정평지역에 살았던 한씨가 아닐까 추측했다.
저자에 관계없이 사상체질에 따른 처방을 하고 있는 한의사라면 ‘보제연설’에 실려 있는 경험방(의사가 실제로 많이 써서 겪어본 약의 처방) 부분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처방 중에는 구한말 시대 상황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부분도 눈에 띈다. 매독을 여전히 수은으로 치료했다는 점(1960년대에는 이미 페니실린 치료가 일반적이었다)이나 한여름 갈증을 풀어줄 음료를 만드는 법을 소개하면서 ‘주석산 2푼6리, 1고뿌(컵), 중탄산 1푼3리, 등피사리 한 잔에 염산 3방울과 설탕 1근을 섞는다’고 해놓았다. 이 무렵 일본에서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해 주석산, 중탄산, 염산 등 오늘날 사용하는 화학용어들이 사용되었다. 또 소아병으로 정수리에 흰머리가 생겼을 때는 ‘백발이 난 곳을 날카로운 칼로 바싹 깎아내고, 칼날로 긁어 진물이 나온 다음 모래무지 기름을 좋은 먹에 개어 바르면 곧바로 효과가 있다’는 내용을 한문과 한글을 섞어 ‘以利刀로 밧삭 削之하고, 以刀刃으로 박박 글그면…’이라고 표기한 것이 이채롭다.
김달래 교수는 ‘보제연설’ 경험방 부분에 대해 “체질별 병증에 대한 초기의 해석을 볼 수 있는 자료다. 비록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병증 분류나 처방과 상당히 달라 실제 임상에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더라도 ‘동의수세보원’에 게재되지 않은 새로운 처방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김교수는 또 ‘동의수세보원’ 초고(갑오본)와 ‘보제연설’에는 현재 한의학계가 사상의학 교과서처럼 쓰고 있는 ‘동의수세보원’ 신축본에 간략하게 나와 있는 식물류(植物類), 즉 체질별 음식에 관한 부분이 자세히 실려 있어 음식연구에 좋은 자극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안상우 박사 역시 “사상의학계는 지나치게 ‘동의수세보원’ 자체에만 매달리는 교조적 분위기가 강하다. 그러나 ‘보제연설’에서도 볼 수 있듯 사상의학 형성 초기에 이미 이제마의 가르침을 응용한 새로운 처방을 시도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사상체질의학은 한국 한의학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대표하는 학문이며 의술이다. ‘동의수세보원’ 갑오본과 ‘보제연설’과 같은 관련 문헌들이 잇따라 세상에 공개됨으로써 ‘사상의학’은 이제마로서 완성된 학문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수정, 보완을 거듭하며 진화하는 학문임을 입증했다. 최근 젊은 한의학자들은 경쟁적으로 정확한 사상체질 감별법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제마는 “내가 죽은 뒤 100년이 흐르면 사상의학이 온 세상을 풍미할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유언은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