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시대 하늘에 제사를 드리던 장소로 추정되는 경기 하남시 이성산성. 왼쪽 아래 원 형태의 12각 건물지가 보인다. 국가유산포털
생기는 조선 성리학자들의 이기(理氣) 논쟁에서 등장하는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니다. 현실 공간에서 실재하고 살아 움직이는 기운이다. 생기는 에너지 속성에 따라 목기(木氣)·화기(火氣)·토기(土氣)·금기(金氣)·수기(水氣) 등 다섯 가지로 분류하거나, 에너지 방향성에 따라 크게 천기(天氣)와 지기(地氣)로 구별한다. 천기는 하늘에서 땅으로 하강하는 운동성을 지닌 생기다. 지기는 반대로 땅에서 하늘로 솟구치는 운동성을 지닌 생기를 의미한다. 천기와 지기는 에너지 방향이 반대이다 보니 한곳에서 공존하는 터를 찾기란 쉽지 않다.
돌무더기에서 발견된 말 머리 유적
경기 하남시 이성산성(사적 제422호)은 이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산성이라는 하나의 공통 권역에서 하늘기운인 천기와 땅기운인 지기를 한꺼번에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천기와 지기가 조화를 이루는 놀라운 터도 존재한다. 이른바 생기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다.이성산성은 하남시 춘궁동 이성산에 세워진 둘레 1925m의 성이다. 삼국시대 유적지로, 이 성에 오르면 하남 시내를 비롯해 남한산, 검단산, 아차산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한양대박물관이 주관해 1980년대부터 15년 이상 발굴 작업을 진행했는데, 백제·고구려·신라 유물이 골고루 발견된 점에서 보면 삼국시대 전략적 요충지였던 듯하다.
이성산성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곳은 8각, 9각, 12각 등 독특한 각을 지닌 건물 유적지다. 지금은 건물 형태가 사라지고 초석과 돌덩이들만 남아 있다. 해당 유물을 통해 이곳에 과거 8각형, 9각형, 12각형 건물들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9각 건물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天壇), 8각 건물은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社稷壇)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지기가 솟아오르는 명당터인 이성산성 8각 건물지. 국가유산포털
이 9각지 부근 돌무더기에서 진흙으로 만든 토제마와 철로 만든 철제마 등 말 모양 유물 17점이 목이 잘린 채 발견됐다. 건물 초석 인근에 동물 머리를 매장하는 것은 동아시아에서 고대부터 전해져온 종교 풍습이라고 한다. 한반도에서는 백제 풍납토성에서 실제 말머리를 매장한 사례가 발견된 바 있다. 삼국시대 중반 이후부터는 흙이나 철 등으로 작은 말 모형을 제작해 매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9각지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바로 이런 유물이 출토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곳의 풍수적 특성은 어떨까. 9각지는 공중에서 지상으로 하강하는 생기, 즉 천기 터다. 한국에서 국가적 차원의 하늘 제사를 지내던 곳은 대부분 천기형 명당에 해당한다. 대표적으로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 강원 태백산 천제단 등을 꼽을 수 있다. 수도권에 속하는 이성산성 9각지에서도 이 같은 천기를 체험할 수 있는 건 이곳이 삼국시대에 신성한 제단 구실을 했음을 방증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하늘기운과 땅기운 공존
이성산성에서는 8각 건물지(8각지)도 볼 수 있다. 9각지에서 채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인데, 건물 중심부에 해당하는 위치에 초석 하나가 놓여 있다. 그것을 중심으로 4개 초석이 있고, 그 외곽에 또 다시 8개 초석이 일정 간격으로 놓여 있다. 이로 보아 8각형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에서는 8각지에서 토지 관련 제례의식이 진행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성산성에 설치된 설명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9는 완전무결함을 의미하는 하늘의 숫자이므로 9각지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천단으로 볼 수 있다. 8은 땅을 상징하는 숫자이므로 9각지와 대칭되는 지점에 있는 8각지는 지신(地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으로 추정된다.”
이 설명을 증명이라도 하듯 8각지는 지상에서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생기, 즉 지기 터에 해당한다. 이성산성은 천기 터와 지기 터가 공존하는 지역인 셈이다. 이런 장소가 서울 한복판에도 있다. 바로 중구 소공동의 환구단 터다.
환구단은 조선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제천의식을 치른 곳이다. 천자(天子)를 자임한 고종은 3층 원형 제단에 황금색 원추형 지붕을 얹은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치른 데 이어, 2년 후인 1899에는 제단 바로 옆에 신패를 보관하는 황궁우(皇穹宇)를 지었다. 환구단은 이처럼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단과 황궁우가 쌍을 이루는 구조였는데, 기운으로 보면 제단은 지기, 황궁우는 천기 명당에 해당한다. 각각 이성산성의 8각 건물, 9각 건물과 같은 배열이라고 할 수 있다.

고종이 대한제국 황실의 신패를 보관할 목적으로 지은 황궁우 내부. 국가유산포털
아픈 역사 속에서 환구단의 원래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 기운만큼은 지금도 생동하고 있다. 지기가 풍성한 원형 제단 터에 들어선 웨스틴조선호텔은 비즈니스 미팅 혹은 혼인을 위한 맞선 명소이자 풍수 명당으로 소문나 있다. 신패를 모셔놓은 황궁우는 여전히 천기가 넘친다.
그런데 이성산성에는 12각 건물지(12각지)도 있다. 12개 초석이 원을 그리며 3겹으로 놓여 있는데 그 용도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곳 기운은 매우 특이하다. 12각지 전체는 천기 터에 해당하고 그 중심부에서 지기가 용솟음치는 구조다. 천기와 지기가 음양의 조화를 이뤘다고나 할까.
12각지는 이성산성 외에 전남 순천시 검단산성과 세종 이성(지정 기념물 제4호)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먼저 검단산(138m) 정상부에 있는 검단산성은 백제시대에 지은 석성(石城)이다. 학계에서는 이곳에 있던 12각 건물에서 제사나 의례가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세종 이성의 12각지에 있던 건물은 다각형일 뿐 아니라 3층 이상 다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돼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이 건물지는 3열(내진, 중진, 외진)로 초석을 놓아 12각을 완성했는데, 중심부 바닥에 열 십(十) 자 형태로 홈을 판 게 특징으로 꼽힌다.
삼국시대 아크로폴리스
흥미롭게도 백제시대에 지어진 두 산성의 12각지는 이성산성의 그것처럼 천기와 지기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에 비춰볼 때 아직 어느 나라 ‘작품’인지 논란이 분분한 이성산성의 건물지 또한 백제시대 장인들이 터 기운에 맞춰 지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백제시대 건립된 전남 순천시 검단산성. 이곳에서 12각 건물 흔적이 발견됐다. 국가유산포털
결론적으로 이성산성은 8각, 9각, 12각 등 특이한 모양의 건물에서 하늘과 신에게 제를 지내는 신성한 곳이었다.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그리스 아테네 언덕처럼 전략적 요충지이자 종교적 신전으로서 삼국시대 아크로폴리스 구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