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끄러운 풍미가 일품인 ‘시바스 리갈 18년’. 페르노리카코리아 제공
이 위스키가 독보적으로 유명해진 시점은 1979년이다. 10·26 사태 당시 연회장에 놓여 있던 술이 ‘시바스 리갈 12년’이었다는 사실이 대중에게 전해지면서 ‘대통령의 위스키’라는 강력한 잔상을 남겼다. 당시 한국인에게 이 이름은 단순한 술을 넘어 부와 권력의 상징과도 같았다.
최초 25년 숙성 위스키
200년 역사를 가진 시바스 리갈은 정치적 사건만으로 럭셔리 반열에 오른 것은 아니다. 내면을 들여다보면 철저한 장인정신과 처절할 정도로 정교한 마케팅 전략이 숨어 있다. 대부분의 유서 깊은 스카치위스키처럼 시바스 리갈 역시 19세기 초반 스코틀랜드 애버딘의 한 식료품점에서 시작됐다. 제임스 시바스와 존 시바스 형제가 경영하던 ‘시바스 브라더스’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전 세계에서 건너온 진귀한 식료품과 향신료, 주류를 취급하는 일종의 ‘럭셔리 편집숍’ 운영자이자 큐레이터 역할을 자처했다.
‘시바스 리갈 12년’은 10·26 사태 당시 연회장에 놓여 있던 술로 알려지며 ‘대통령의 위스키’로 불렸다. 동아DB
결정적인 전환점은 1843년에 찾아온다. 빅토리아 여왕이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에 머물자 시바스 형제는 왕실에 식료품과 주류를 공급하는 책임을 맡게 됐다. 이때 품질을 인정받아 영국 왕실 인증인 ‘로열 워런트(Royal Warrant)’를 수여받았다. 이를 통해 시바스 브라더스는 막대한 부유층 고객을 확보했으며, 브랜드 자체에 ‘로열(Royal)’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정당성이 부여됐다.
자신감을 얻은 시바스 형제는 1909년, 당시 시장 상황에서는 파격적인 ‘시바스 리갈 25년’을 출시한다. 당시에는 10년 이상 숙성시킨 위스키조차 귀한 시절이었기에 25년이라는 숫자는 압도적인 럭셔리의 상징이 됐다. 이 제품은 철저히 북미시장, 특히 뉴욕 호황기를 누리던 상류사회를 겨냥해 기획됐다. 시바스 리갈 25년은 뉴욕 고급 호텔과 레스토랑, 브로드웨이 사교계를 순식간에 장악했다. 이는 위스키가 샴페인 같은 축하와 성공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1920년부터 1933년까지 시행된 미국 금주법은 위스키산업에 사형 선고와도 같았으나, 시바스 리갈에는 절묘한 기회로 작용했다. 당시 미국 내 밀주들은 품질 관리가 되지 않아 실명이나 사망 사고가 빈번했다. 자산가와 마피아는 신뢰할 수 있는 정품 위스키를 암암리에 거래했고, 시바스 리갈은 캐나다 등 인접 국가를 거점으로 이 수요를 흡수하며 브랜드를 유지했다. 무엇보다 무리하게 판매를 확장하기보다 원액을 꾸준히 숙성시키며 버티는 전략을 택했다. 마침내 1933년 금주법이 폐기됐고,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미국시장에 복귀했다. 이후 1938년 출시된 시바스 리갈 12년은 25년 제품과 금주법 시대에 형성된 고급 이미지를 그대로 이어받아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1950년대 고가 전략 구사해 흥행
1949년 시바스 리갈은 캐나다 시그램에 인수되며 본격적인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한다. 당시 시바스 리갈의 포지셔닝이 모호하자 경영진은 패키지 디자인을 대폭 업그레이드해 고급화하면서도 원액은 바꾸지 않은 채 가격을 대폭 인상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매출은 급격히 상승했고 브랜드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소비자가 품질을 판단하기 어려울 때 가격을 품질 척도로 삼는 심리적 포인트를 정확히 공략한 것이다. 고가 전략을 통해 희소성을 높이는, 현 명품 마케팅 모델을 구축한 것이다.
대중적인 맛을 자랑하는 ‘시바스 리갈12년’. 페르노리카코리아 제공
대표 제품인 12년은 향보다 맛이 풍부하고 대중적이며, 18년은 세월 흔적을 담아 훨씬 매끄러운 풍미를 자랑한다. 특히 일본 물참나무를 활용한 미즈나라 캐스크 에디션은 희소성 덕분에 소장용으로도 인기가 높다. 시바스 리갈은 ‘대통령의 위스키’를 넘어 200년이라는 시간을 버텨온 전략과 철학이 담긴 술이다. 이번 주말에는 마트에서 시바스 리갈 라벨이라도 천천히 감상해보면 어떨까. 음미하지 않더라도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읽는 것만으로 위스키 세계를 충분히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