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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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 캠페인보다 중요한 건 ‘변화의 증명’

[이윤현의 보건과 건강]

  • 이윤현 남서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 (대한검역학회 회장)

    입력2025-12-08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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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저 수준인 한국 합계출산율을 높이려면 ‘아이를 낳아도 불편하지 않은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GETTYIMAGES

    세계 최저 수준인 한국 합계출산율을 높이려면 ‘아이를 낳아도 불편하지 않은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GETTYIMAGES

    1990년대 필자가 세 아이 손을 잡고 거리를 걸을 때면 날 선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불쑥 들리는 말. “아들·딸 다 있는데, 또 낳으셨어요?”

    그 시절 셋째를 키우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주위의 힐난에는 “둘이면 충분하다”는 한국 사회의 보이지 않는 기준이 숨어 있었다. 그 규범이 깨지지 않는 한, 정부가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도 출산율은 오르지 않는다. 출산은 삶의 조건과 시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출산 장려를 위해 지난 20년간 400조 원 넘는 예산을 투입했지만 합계출산율은 0.7대에 머물러 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여전히 삶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해외 성공 사례를 보면 방향은 명확하다. 프랑스는 부모에게 육아휴직을 나눠 쓰게 함으로써 ‘엄마만 일터를 떠나는 구조’를 없앴다. 싱가포르는 출산·주거·보육 지원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했다. 헝가리는 셋째 이상 자녀를 둔 어머니의 소득세를 면제했다. 이들 나라의 공통점은 “아이를 낳아도 불편하지 않다”는 확신을 만들어준 것이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공공임대주택을 보면 아이 셋을 데리고 살기엔 턱없이 좁은 곳이 많다. 육아 친화 도시를 표방하지만 아이가 많을수록 도심에서 멀어진다. 출산율을 높이려면 삶의 공간을 바꿔야 한다. 아이가 많은 가정이 더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어야 한다. “아이를 낳으면 외곽으로 밀려난다”는 인식이 “아이를 낳으면 도심 가까이에 산다”는 인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교육비 공포는 또 다른 장벽이다. 아이를 낳은 순간부터 사교육비와 대학 등록금이 부모 어깨를 짓누른다. 청년 취업은 갈수록 힘들어지고, 부모 세대는 자녀 뒷바라지를 하다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노년 빈곤율에 직면한다. 출산은 기쁨이 아니라 경제적 부담으로 인식된다. “아이를 낳으면 가난해진다”는 사회적 인식을 깨지 못하는 한,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도 효과가 없다.



    “아이 낳아도 불편하지 않다”는 확신 만들어야

    문제는 또 있다. 아이를 한 명 낳든 세 명 낳든 혜택이 비슷하다는 점이다. 다자녀 가정일수록 교육·주거·세제 혜택을 눈에 띄게 더 줘야 한다. 부모가 변화를 체감하는 게 중요하다. 출산은 개인의 결단이지만, 그 결단을 가능하게 만드는 건 사회 구조다.

    출산정책은 이제 “얼마를 주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편하게 살 수 있느냐”의 문제로 전환돼야 한다. 아이를 낳으면 집과 직장이 가까워지고, 주위의 배려를 받으며, 부모 세대도 함께 혜택을 누리는 사회. 그런 세상이 이뤄질 때 비로소 사람들은 아이를 낳을 용기를 낼 것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아이를 낳으라”는 캠페인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의 삶을 바꿨다”는 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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