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래쉬’는 앤디 멀리건의 소설 ‘안녕, 베할라’를 원작으로 한다. 원작이 워낙 유명하지만 영화화한 손길은 더 인상적이다. 먼저 감독은 ‘빌리 엘리어트’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등을 연출한 스티븐 돌드리. 소설을 영화 언어로 각색한 사람은 ‘어바웃 타임’의 감독이기도 한 리처드 커티스다. 제작사는 ‘노팅힐’ ‘속죄’ 같은 우아한 영국풍 영화를 만들어온 워킹 타이틀 필름스. 이 정도 궁합이면 영화 질에 대한 기대가 충만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트래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실제 빈민가에서 성장한 아이들로 구성된 주연 배우진이다. 영화에는 올해 일흔다섯이 된 마틴 쉰, ‘밀레니엄’으로 주목받은 루니 마라 등 유명 배우도 등장하지만, 이들은 말 그대로 조역에 불과하다. 영화 주인공은 아이들, 쓰레기 더미에서 생을 길어내고 커나가는 쓰레기촌 아이들이다.
시작은 우연히 주운 지갑이다. 주인공 하파엘은 어제처럼 오늘도 쓰레기 더미에서 쓸 만한 것을 찾다 현금이 꽤 들어 있는 지갑을 줍는다. 안에 든 돈을 절친 가르도와 나누는데, 다음 날 경찰이 몰려와 지갑의 행방을 캐묻는다. 똑똑한 소년은 지갑에 뭔가 비밀이 있음을 직감한다. 그리고 스스로 비밀을 찾아나간다. 이 추적에 하수구 소년 들쥐가 큰 도움을 준다. 세 아이는 지갑 속 단서들을 퍼즐로 엮어가며 하나 둘씩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을 연다.
문제는 그 출구가 꽤 위험하다는 것이다. ‘트래쉬’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바로 이 위험이다. 지갑을 감추고 진실을 찾던 하파엘은 결국 경찰들에게 붙잡혀 고문을 받게 된다. 영화 속 고문 장면은 아이에게 저런 일이 가당키나 할까 싶을 정도로 잔혹하다. 돌드리 감독은 이를 외면하지 말고 똑바로 보라고 말한다. 지독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는 것이 진실에 다가가는 지름길이라는 듯 말이다.
아이들은 생명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다. 더 똘똘 뭉쳐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기 시작한다. 버스, 지하철 구석구석 빈틈을 잘도 돌아다닌다. 아이들의 작은 몸은 민첩한 조사 및 도피의 도구가 된다. 틈새를 비집고, 담을 넘어 다니는 아이들의 행적은 파르쿠르(Parkour·도시나 자연환경의 장애물을 활용하는 스포츠) 액션보다 더 짜릿하다. 가장 큰 이유는 당위성이다. 아이들의 움직임에는 ‘옳은 일을 한다’는 도덕적 이유가 존재한다. 어른들의 액션스릴러 영화처럼 돈과 욕망을 위한 게 아닌 셈이다.
물론 아이들이 이루는 성과는 현실에서 만나보기 어려운 꿈같은 일이다. 하지만 이루기 힘들다 해서 꿈조차 포기하는 순간, 세상은 돌이킬 수 없는 지옥이 된다. 쓰레기 더미에서 쓰레기를 주우며 살아가지만 올바른 일이 무엇인가 알고 있는 한 아이들은 투명하게 빛날 수 있다. 이 역설법 위에서 ‘트래쉬’의 제안은 무척 건강하게 받아들여진다. 게다가 의미 있는 영화가 무척 짜릿하고 재미있기까지 하다. 영국 거장에게 배워야 할 덕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