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육군 리더십 기준교범 ‘Army Leadership’.
1990년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미군을 휩쓴 화두는 군사 혁신이었다. 초기 의견수렴 과정에서 완강한 내부 저항이 있었는데, 그 핵심은 혁신이 오히려 국익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 국방부가 뼈저리게 깨달은 교훈은 혁신의 근본적 토대가 상하 혹은 전체 구성원 사이 의사소통이라는 것이었다. 의사소통을 활성화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지시나 방침을 내려야 할까, 고민 끝에 미군이 선택한 원칙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솔선수범이었다. 야전에 배치된 부대 장병들에게 혁신의 필요성을 이해시키고 붐이 일어나게 하려면 결국 일선 지휘관이 나설 수밖에 없다. 이때 지휘관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롤모델이 되는 것이다.
세 가지 원칙
군사적 관점에서 솔선수범이란 지휘관이 부대원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그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다. 이는 지휘관의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 태도, 언행을 부대원이 어떻게 인식하느냐를 통해 구성된다. 그러므로 솔선수범은 ‘모범을 보이는’ 데서 끝나면 안 된다. 그렇게 보인 모범이 부대원에게 실제 영향을 끼쳐야 한다. 솔선수범을 자기수련 차원으로 보는 동양적 관점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 첫 번째 원칙은 외양이다. 2006년 발간한 미 육군의 리더십 기준교범 ‘Army Leadership(육군 리더십)’은 ‘내면의 자부심은 외양의 자신감에서 시작된다’고 단호하게 기술한다. 세계 유수 군사교육기관에서는 오늘도 ‘외모가 바른 장병은 반드시 그 내면도 바르다’는 훈육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전쟁 중인 군대라 해도 복장이 단정하지 못한 장병을 군율에 따라 징계하는 이유다. 리더의 외양은 협상, 회의 등에서 힘을 발휘한다. 사전 정보가 없는 초면의 상대로부터 얻는 가장 일차적인 정보는 외양이다. 물론 이 점을 역이용할 수도 있다.
두 번째 원칙은 신뢰다. 냉전 종식 이후 벌어진 분쟁에서 미군이 얻은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아무리 군사과학기술이 발달해도 현장에서의 판단은 결국 장병 개개인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의사소통에 소요되는 시간의 지체다. 쌍방 신뢰가 없는 부대는 지휘부가 현장의 판단에 개입하거나 현장 리더가 지시사항을 재확인하는 과정에서 작전을 실행할 적기를 놓치곤 했다. 신속한 상황 판단과 의사결정에 따른 초기 대응이 작전 성공의 핵심인 대(對)테러전이나 대반란전에서는 치명적 약점이다.
‘Army Leadership’에서 주목하고 강조하는 것은 결과로서의 신뢰보다 팀워크 출발점으로서의 신뢰에 가깝다. 지휘관이 자기 자신을 믿는 것처럼 부하들을 신뢰하고 부하들은 그 믿음에 감복해 지휘관을 신뢰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세 번째 원칙은 회복력이다. 솔선수범의 원칙에 회복력이라니 의아할 법도 하지만, 미군이 실제 전투의 교훈을 통해 얻은 경험의 정수다. 전쟁은 길고 지휘관은 수많은 전투를 치러야 한다. 군대와 지휘관이 일회용 도구가 아닌 이상 실패와 충격, 부상과 스트레스로부터 얼마나 빨리 회복할 수 있느냐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원래 훈련과 전투가 벌어지는 시공간 외 개인 여가시간에는 최상의 복지를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게 미군의 불문율이었다. 최근에는 교전이 벌어지는 최전방 기지에서도 이러한 방침이 이어지고 있다. 미군이 ‘테러와의 긴 전쟁’ 시대 이후 관심을 갖고 있는 사안 중 하나다. 전투가 야기하는 단기적 긴장감을 완화하고, 전투 종결 후에 찾아오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다.
아이콘, 권한 위임, 복지
기업의 세계로 돌아와보자. 스티브 잡스 전 애플 CEO와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는 겉으로 드러나는 외양까지 리더십과 홍보 전략의 수단으로 삼았다. 특히 이 둘은 같은 옷을 반복해서 입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른바 ‘시그니처 패션(Signature Fashion)’이다. 평소 자신의 철학이나 경영방침을 특이한 패션, 버릇, 반복적인 행위 등과 연결함으로써 CEO 자신이 살아 움직이는 광고판이 되는 것이다.
기업 구성원과 대중은 잡스와 저커버그가 실제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목표를 추구하는지 알기 어렵다. 단지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 등을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잡스와 저커버그의 시그니처 패션은 실제 제품이나 서비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중은 두 CEO의 이미지를 애플과 페이스북에 투영한다. ‘다르게 생각하고 세상을 바꾸자’는 애플의 기업 슬로건과 자신들의 정체성을 해커문화에서 찾는 페이스북의 혁신적 기업 정신은 대중의 아이콘이던 두 사람, 잡스와 저커버그가 없었다면 세상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스티븐 코비는 저서 ‘신뢰의 속도’에서 ‘한정된 자원으로 심화된 경쟁에서 생존하려면 속도를 높이는 방법이 가장 효율적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신뢰가 관계의 핵심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가장 좋은 방법은 역할 분담과 권한 위임이다. 최근 상하 계급구조와 관리자제도를 과감히 없애 화제가 되고 있는 미국 온라인 의류종합쇼핑몰 자포스(Zappos)의 행보는 조금 과감하긴 하지만 지켜볼 만하다. 이들은 직제를 없애고 상하 구분을 제거함으로써 상급자에게 집중되던 의사결정권을 전 직원에게 골고루 분담하고 상대적으로 지시를 받기만 하던 하급자들에게 새로운 권한을 위임하고 있다.
이런 조치가 조직 내 의사소통 속도를 높이고 생산성 향상에 기여하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실험적 시도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기도 하지만, 결정 권한을 과감하게 위임할 때 부담해야 하는 위험이 그로 인해 빨라질 의사소통의 이익보다 훨씬 작을 것이라는 점만큼은 인정하고 있다.
끝으로 업무 공간이 쾌적하고 일한 만큼 휴식과 혜택이 주어진다면 동기부여 효과가 한층 높아질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혁신이라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고, 업무 부담이나 스트레스도 당연히 늘어난다. 잘 설계된 복지환경일수록 조직원이 이러한 스트레스로부터 회복되는 속도를 앞당길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구인·구직과 관련한 온라인 서비스 항목을 보면 얼마 전부터 ‘복지’ 항목의 중요도가 급격히 상승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기업의 사내 복지문화는 미개척 영역으로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얼마 전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미생’의 등장인물들은 밤샘작업으로 과로하고 질책을 받아도 화장실에서 세수 한 번 하고, 옥상에 올라가 자판기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게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다. 그나마 자리를 비운다고 욕 먹을까 봐 몇 분 안 돼 황급히 제자리로 돌아가는 게 일상이다.
물론 모든 회사가 전부 같은 것은 아니다. CEO의 경영철학 자체가 구성원의 복지 향상을 핵심으로 꼽는 곳도 많다. 해외여행, 도서구매권, 커피음료권, 유급 안식년, 학업 지원 같은 꿈같은 보장책을 갖춘 회사도 적잖다. 이러한 복지 요소들이 실제 업무 성과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수많은 연구가 증명하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