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그로스 지음/ 전행선 옮김/ 나무의철학/ 344쪽/ 1만4000원
정신분석가인 저자는 지난 25년 동안 문제적 인간들의 행동에 감춰진 욕망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조용한 방에서 저자와 마주한 상담자들은 속에 꼭꼭 감춰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물론 신뢰가 쌓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살을 기도했던 27세 남자 피터는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거나 절교를 선언함으로써 상대방이 감당해야 할 괴로움을 즐기는 환자다. 그는 상담 기간에도 자살을 가장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떠보는 등 기이한 행동을 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의 기저에는 자신이 약하게 느껴지는 상황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하는 마음이 자리했다. 어린 시절 양아버지에게 당한 폭력의 상처가 너무 컸던 것이다. 평범한 사람처럼 자기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자기 삶을 이해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표현할 만한 단어를 찾을 수 없어 다른 수단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가끔 우리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감추려 애쓴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감정을 무시하다 보면 왜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왜 그런 상처를 받았는지 알아낼 수단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경찰관에게 장전하지 않은 초보자용 권총을 겨눈 맷은 두 돌이 지났을 때 지금의 양부모에게 입양돼 성장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다른 사람이 자신을 걱정하도록 관심을 끄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감정을 죽이는 법을 배웠고,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을 불신했다. 그는 ‘심리적 나병’으로 고통 받았으며, 감정적으로 고통을 느낄 수 없어 자신에게 영구적이고 치명적인 손상을 계속 입힐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사람은 대부분 변화의 목전에서 주저한다. 변화는 곧 상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어느 정도의 상실감은 과감히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9·11테러 현장에서 살아난 마리사는 세계무역센터 남쪽 타워 98층에 있었다. 강렬한 폭발 진동과 함께 뜨거운 공기가 그녀의 얼굴로 훅 끼쳐왔다. 마리사는 컴퓨터를 끈다거나 지갑을 챙기려 하지 않았다. 곧장 비상구로 걸어가 건물을 떠났다. 하지만 몇몇은 비상경보 소리가 울렸는데도 태연하게 회의실로 들어가거나 전화통화를 하느라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왜 떠나지 않았을까. 많은 사람은 이들처럼 연기냄새나 누군가의 조언 등 더 많은 단서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더 많은 단서가 주어진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머뭇거릴 것이다.
자신에게 맞는 사람을 만나 결혼해 아이를 낳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어느 정도의 고통은 감수해야 한다. 아무리 끔찍한 현실이라도 그것을 직시하는 것이 회피하는 것보다 현명하다. 고속도로에서 아버지를 잃은 제니퍼는 장례식 이후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사귀던 남자친구와 결혼을 앞두고 아이를 갖는 문제로 의견 충돌이 있었지만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미래에 너무 단단히 사로잡혀 지금의 삶, 현재 벌어지는 상황에 전혀 화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모든 일을 마치 남의 일처럼 생각한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은 자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감춘다. 자신의 상처는 곧 경쟁력 저하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만큼 자신이 누구인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찾기 어려워한다.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31편은 우리 주변, 일상에 관한 내용이다. 비슷한 사연을 읽다 보면 내 마음에 숨겨진 진짜 내 마음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