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지간의 난간석을 두른 희릉의 능침.
장경왕후는 영돈령부사 윤여필의 딸로, 성종 22년(1491) 7월 6일 한성 호현방 사제에서 태어나 8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외고(外姑·외조모)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의 손에 컸다. 박씨는 중종반정의 주역이었던 박원종의 누이다. 박원종은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지만 누이가 연산과 부정한 관계라는 소문이 돌자 연산군을 배반하고 반정에 앞장섰다.
이런 연유로 장경왕후는 1506년 중종반정 때 중종의 후궁 숙의에 봉해졌다가 다음 해, 중종반정 시 단경왕후 신씨의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사사되고 역적의 딸인 단경왕후도 폐비되자 왕비로 책봉된 행운의 주인공이다. 장경왕후는 9년간 왕비로 있으면서 어느 누구도 천거하거나 해하려 하지 않아 중종이 어진 장경왕후를 주나라 문왕의 비와 비교해 ‘태사(太)의 덕’ 이상이라 극찬했다.
중종, ‘태사의 덕’ 이상이라 극찬
장경왕후는 중종 10년(1516) 음력 3월 2일 새벽 1시 무렵 세자(인종)를 낳고, 산후병으로 7일 만에 경복궁 동궁 별전에서 승하했다. 25세의 젊은 나이였다. 중종은 훗날 장경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바라며 헌릉 우측 능선 너머 현 서초구 세곡동에 희릉을 조영했다. 건좌손향(乾坐巽向)이었다. 한강을 넘는 데 수백 척의 배가 동원됐다고 한다. 시호는 ‘단정하고 밤낮으로 조심스럽다’ 하여 장경(章敬)이라 하고, 능호는 희릉이라 했다.
중종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세자(인종)를 무척 애달파하며 정성 들여 능역을 조영했다. 20여 년 후 능역 조영의 주력 세력이었던 정광필 등에 반감을 샀던 김안로가 장경왕후의 능침 아래에 큰 암반이 있어 세자에게 흉하다고 고해, 귀가 얇은 중종이 천장을 지시했다. 세자를 위한다는 구실이었지만 사실은 정적을 제거하려고 옥사를 일으킨 것이었다. 결국 희릉은 지금의 고양 서삼릉역 내로 옮겨졌고 당시 국장을 담당했던 실권자(총호사) 정광필 등은 김해로 유배되고, 대신 김안로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장경왕후의 아버지 윤여필과 오빠 윤임은 김안로와 손을 잡고, 장경왕후 승하 후 왕비가 된 문정왕후 윤씨의 동생 윤원형과 대립했다. 김안로는 중종과 장경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효혜공주의 시아버지로 중종과 사돈지간의 실권자였다. 이런 조정의 세력다툼에서 세자 편의 윤임을 ‘대윤’이라 하고,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 윤원형파를 ‘소윤’이라 했다. 처음에는 대윤이 세력을 잡았으나 중종이 승하하자 문정왕후를 등에 업은 한 소윤이 정국을 장악했다.
1 중종반정의 주역으로 충성을 다하려는 듯한 희릉의 무석인. 2 고풍스러운 희릉의 정자각 배위청 전경.
세곡동 구영릉지가 장경왕후 초장지
2007년 10월 문화재청은 서초구 세곡동에 있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초장지인 구영릉지(舊英陵址)를 발굴했다. 발굴 결과 초장지 현궁이 하나의 회격실로 돼 있고, 바닥에 암반이 있는 것이 밝혀졌다. 원래 구영릉은 쌍회격실의 합장릉이어야 하는데 발굴 결과와 맞지 않았다. 발굴단은 실록 등의 기록을 추적해 이곳이 장경왕후의 초장지임을 확인했다. 1970년대 구영릉지로 추정해 발견된 석물들도 희릉의 것임이 확인됐다. 그래서 40여 년 전 청량리 세종기념사업소에 전시됐던 문무석인과 난간석, 여주의 세종대왕유적사업소 세종전 앞에 있던 석호 등은 현재 세곡동 장경왕후의 초장지로 옮겨져 재설치됐다. 잘못된 발굴이 실록 등의 기록으로 원형을 되찾은 쾌거였다. 기록물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대목이다.
조선 왕릉에 대한 기록물은 다양하다. 왕과 왕비의 승하 후 재궁을 만들어 시신을 모시는 예를 갖추었던 기록물인 ‘빈전도감의궤’와 궁궐에서 왕릉까지 운구의 전반적인 일을 기록한 ‘국장도감의궤’, 왕릉의 자리 잡기와 조영 등을 기록한 ‘산릉도감의궤’ 등이 있다. 이들 기록물은 전국의 5대 사고에 보관하고 후대에 왕실의 모범이 되게 했다. 대표적인 것이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 도서이나, 안타깝게도 임란 이전의 것은 왜란 때 대부분 불타 없어지고 일부만이 남았다. 그나마 병인양요 때 외규장각 도서를 프랑스군이 약탈해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반드시 반환돼야 한다.
조선 왕릉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때 이러한 기록문화가 큰 도움이 됐다. 다행히 임란 이후의 각종 의궤와 능지가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장서각과 서울대 규장각 등에 보관돼 있어 세계기록문화로 등재됐으며, 오늘날 능원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붕당 간의 정쟁과 풍수적 논리로 천장된 조선 왕릉은 15개소나 된다. 이들의 초장지 보존과 확인 작업도 필요하다. 희릉의 경우 최초의 초장지 복원으로 그 가치를 높이고 있다.
희릉은 세조의 유시에 따라 병풍석 없이 12지간의 난간만을 두른 단릉으로 조영돼 단아한 느낌이다. 배치나 수법은 조선 전기 양식의 전통을 따르며, 다른 왕비 능침보다 중계·하계의 앞이 넓고 평온하다. 팔각장명등은 영조 때 추봉돼 만든 온릉과 문정왕후의 장명등에 비해 세련되고 웅장해 보인다. 필자는 이를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걸작 장명등이라 평가하고 싶다. 남편 중종이 22년 전 조영한 세곡동 능역이 불길하다 하여, 자신의 권력이 최고조에 달한 때 자신이 함께하기 위해 천장한 능원이다 보니 온갖 정성을 들여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흔적만 남은 방지원도형 연지(蓮池)
희릉의 문무석인은 몸체에 비해 머리가 큰 조선시대 최고의 거물이다. 무석인은 큼직한 이목구비에 당당하고 위엄 있는 자세로 칼을 쥐고 있으며, 갑옷에는 섬세한 여러 문양이 촘촘히 조각돼 있다. 문석인도 큼직한 체구에 맞게 홀이 크게 묘사됐고, 노출된 두 손을 맞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소매 안쪽으로 작은 소매가 한 번 더 돌아가는 이중 소매 형태를 보여준다. 측면의 소매 주름 또한 자연스럽게 흐르다가 끝부분에 가서 반전(反轉)하는 곡선이 재미있다. 문무석인은 폭군 연산을 몰아낸 중종반정의 주인공인 듯하며, 왕실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표정을 연상하게 한다.
‘춘관통고’ 등 문헌에 따르면, 능역 입구에 제법 큰 규모의 희릉 연지(蓮池)가 있었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는데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으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연지다. 방지는 음을 나타내며 땅을 상징하고, 원형의 섬은 양을 나타내며 하늘을 상징한다. 이것은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의 대표적 시설이다. 현재는 사유지화로 훼손의 우려가 있다. 원형 보존을 위해 빠른 조치가 필요하다. 정자각은 원래 현재의 위치에 있었으나, 중종을 동원이강형의 능침으로 모시면서 양 능침 가운데로 옮겨졌다가 중종의 정릉을 삼성동으로 천장하자 다시 이곳으로 옮겨 지은 역사를 갖고 있다.
희릉 등 서삼릉 지역은 없어진 수복방과 수라청을 복원해야 하며, 근래 주변에 승마장과 목장을 만들면서 훼손된 지형과 물길, 금천교 등의 복원이 이뤄져야 한다. 이는 세계문화유산을 지속하기 위한 국가적 약속이다. 아니면 ‘위험유산’이 될 수도 있다.
장경왕후와 중종 사이에서 태어난 인종과 그의 며느리 인성왕후 박씨의 효릉(孝陵)이 희릉 옆 서측 능선 서삼릉 지역에 있어, 인종을 낳고 7일 만에 죽은 장경왕후는 영원토록 효자인 인종과 며느리의 효도를 받고 있다.
희릉의 능침 앞 전경은 넓고 평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