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큐브’ 역시 그런 경향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원작은 단순하고 명쾌했다. 직육면체의 미로 안에 기억을 잃은 일단의 사람들이 갇힌다. 부비 트랩(모략·함정)으로 가득한 미로에서 빠져나오려면 그들은 까다로운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한다. 오리지널 영화 ‘큐브’는 큐브의 정체를 밝히는 짓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핵심적이고 무자비한 설정만을 파고들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정갈한 순수주의는 결코 오래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뒤로 속편이 두 편이나 나왔으니 말이다. 아니, 속편 하나와 그 이전 편이라 부를 만한 프리퀄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큐브 제로’의 시간대는 ‘큐브’ 이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두 속편은 탐구 방향이 다르다. 속편 ‘큐브 2-하이퍼 큐브’는 수학적 영화라는 기본 설정을 지키기 위해 3차원의 큐브를 4차원으로 확장시켰다. 하지만 이번에 나온 또 다른 속편 ‘큐브 제로’는 큐브의 미스터리를 거의 완전히 지워버리고 큐브의 고문실을 위해 일하는 직원과 큐브 속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의 상호 관계를 탐구한다. 어떻게 보면 ‘큐브 제로’의 아이디어는 영화적이라기보다 연극적이며 그만큼 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코끝을 가까이 대보면 사뮈엘 베케트와 프란츠 카프카의 냄새가 슬쩍 난다.

잘만 했으면 ‘큐브 제로’는 괜찮은 영화가 될 수 있었다. 어차피 오리지널의 설정을 망치는 건 각오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래도 새로운 주제와 스토리는 원작과 다른 드라마로 영화를 끌어갈 수 있었다. 문제는 아이디어와 시도만으로 모든 게 되는 것이 아니고, 전작의 각본보다 더 ‘문학적’인 각본이라고 해서 그게 더 좋은 작품이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큐브 제로’는 생각 외로 야심이 큰 영화다. 하지만 그 야심을 처리할 만한 여유와 테크닉이 부족하다. 이야기는 충분히 매듭지어지지 않고, 풍자는 깊이가 약하며, 전체적인 분위기는 베케트식 연극을 흉내 내는 아마추어의 느낌이 난다. 야심을 크게 갖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조금 자제했다면 결과가 더 나았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