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98

..

이젠 소설도 ‘퓨전 바람’

‘팩트+픽션’의 결합 상상력 무한 자극 … 디지털 세대 ‘에듀테인먼트’ 입맛에 제격

  • <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 khhan21@hanmail.net

    입력2005-01-19 11:4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이젠 소설도 ‘퓨전 바람’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삼라만상이 변하더라도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 사랑의 법칙에서는 우주의 질서에 불균형을 일으킨 사람만이 그 균형을 회복시킬 수 있다. 그러나 한번의 생으로는 그 균형을 회복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윤회를 허용한다. 두 사람 사이에 증오가 남아 있다면 증오하는 마음을 풀고 서로를 사랑할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 만나게 된다.

    극한적 대립과 상호간 증오로 편가르기가 날로 심해지는 오늘날의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소설 한 권이 최근 출간되었다. 바로 이사벨 아옌데,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함께 라틴 아메리카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멕시코 작가인 라우라 에스키벨의 ‘사랑의 법칙’이다.

    이 소설의 무대는 23세기 멕시코시티. 텔레비전 속의 영상을 생생하게 현실로 재현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텔레비전, 마음에 드는 육신을 골라 영혼을 이식하는 기술, 육체가 순식간에 해체되었다가 재생됨으로써 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순간 이동장치, 생각을 찍을 수 있는 정신 촬영 카메라 등 과학문명은 놀랄 정도로 발달해 있다. 하지만 거기에 반비례해 더욱 외로운 영혼들은 사랑에 굶주리고 외로움에 몸서리친다.

    이야기 전개는 숨가쁠 정도로 빠르다. 독자들은 16~21세기에 시간과 공간을 마구 넘나드는 소설의 스토리만 따라가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논리적 인과관계의 혼란을 겪는다. 그럴 경우 동원하는 것이 바로 음악과 그림이다. 주인공들이 과거에 경험한 사건과 기억을 더듬는 장면들에서 동원하는 음악은 푸치니의 오페라 음악과 라틴 춤곡이다.

    음악을 즐기면서 함께 볼 수 있는 것은 예술 만화가 미겔란소 프라도(그의 만화 ‘섬’이 번역 출판되었다)가 그린 원색삽화다. 음악이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니듯 삽화 또한 단순한 종속물이 아니다. 음악과 미술은 소설 전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등장인물들이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도록 도와주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문학·음악·미술의 상상력이 결합한 ‘퓨전(fusion)소설’이다. 이렇게 이질적인 상상력의 결합을 통해 상상력의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책들의 출간이 최근 늘어나고 있다.

    ‘구텐베르크의 가면’ ‘미켈란젤로의 복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진실’ ‘파라오의 음모’ 등 국내에 번역 소개된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소설들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팩트’(fact)와 소설적 허구라는 ‘픽션’(fiction)이 결합한 퓨전소설이다.

    이젠 소설도 ‘퓨전 바람’
    15세기 유럽에서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당시의 신기술인 인쇄술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세력이 암투를 벌이는 ‘구텐베르크의 가면’은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원형 그대로 재현한다. 시내 도로와 건축, 운하 등 지형지물이 관광 안내도처럼 그려질 뿐만 아니라 종말로 치닫는 비잔틴 제국의 정치 상황, 교황의 자리를 둘러싼 치열한 세력 다툼, 유럽 최대의 상업 중심지인 베네치아공화국 시민의 풍요로운 삶과 생활습관 등을 마치 그 시대에 들어가 들여다보는 것처럼 리얼하게 그린다. 그러나 작중 주인공들의 실제 행각은 마치 영화 ‘인디아나 존스’를 연상할 정도로 우연적인 사실이 긴박하게 연속 등장하는 허구적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했다. 작가는 금속활자를 발명한 구텐베르크(작품 속 이름은 겐스플라이슈)를 역사의 평가와는 달리 매우 교활하고 부정적 인물로 형상화한다.

    ‘마왕퇴의 귀부인’ ‘구룡배의 전설’ ‘부활하는 군단’ 등이 번역 출간된 웨난의 작품들 또한 팩트와 픽션이 결합한 퓨전소설이다. 남들이 주목하지 않은 2100년 전의 한 여성 시신 발굴을 다룬 ‘마왕퇴의 귀부인’은 독자를 서한의 역사 속으로 안내한다. 서태후의 무덤이 있는 청 동릉의 도굴과정과 그에 얽힌 군벌의 합종연횡을 연결한 ‘구룡배의 전설’은 우리를 청나라 흥망성쇠의 세계로 이끈다. 진시왕릉의 병마용갱 발굴 과정과 발굴품에 대한 설명, 진시왕릉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부활하는 군단’은 진나라의 역사와 유물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준다.

    중국에서 ‘기실(記實)문학’으로 불리는 웨난식의 글쓰기는 문학, 역사서, 고고학적 발굴기 등 어느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발굴과 도난의 과정, 문서가 오간 것 등을 기자의 시각으로 매우 사실적으로 쓴 글은 문학성이 뛰어난 소설로도 읽히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서양사의 흥망성쇠 과정을 한눈에 보는 것처럼 중국 역사의 과정들을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읽을 수 있는 역사서기도 하다. 또 딱딱함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먼 재미가 넘치는 고고학적 발굴기기도 하다. 각각의 발굴기는 시공을 뛰어넘어, 독자가 직접 무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참여하는 듯한 느낌이 들 만큼 사실적으로 그렸다.

    ‘수요공급 살인사건’ ‘효용함수의 치명적 유혹’ 등 ‘소설로 읽는 경제학’ 시리즈에 포함되는 마셜 제번스의 소설들은 오락적 상상력과 교양(정보)적 상상력을 결합한 퓨전소설이다. 이 책의 저자 마셜 제번스는 윌리엄 브라이트와 케네스 G. 엘징거의 필명으로, 두 사람은 각각 트리니티 대학과 버지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수요공급 살인사건’은 추리소설의 형식을 충분히 따르면서 하버드 대학 교수 헨리 스피어맨이 기회비용, 수요의 법칙, 죄수의 딜레마 등 기본적인 경제학 법칙을 적용해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렸다. 우리 생활 주변 인간의 경제 행위를 관찰하고, 그 속에 숨은 비합리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범인을 찾는 것이다. 이 소설처럼 연애소설이나 추리소설과 경제학 교과서를 접목한 소설들은 미국의 대학에서 경제학 교재로도 활용되었다.

    이젠 소설도 ‘퓨전 바람’
    하지만 이상의 작품들은 모두 외국 작품들 일색이다. 외국 작가들이 세상의 변화에 발 빠르게 적응하며 새로운 독자를 창출하는 반면 국내 작가들은 소설이 안 팔리는 세태만 한탄할 뿐 여전히 자기 체험과 가족사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출간된 ‘알도와 떠도는 사원’(김용규)은 완전 초보 신인의 작품이지만 매우 놀라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6세기 과학혁명에서부터 오늘날 유전자 공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철학·사회·종교 사상들을 다룬다 해서 ‘지식소설’로 불리는 ‘알도와 떠도는 사원’ 또한 오락적 상상력과 교양(정보)적 상상력의 결합이다. 이 소설은 15세의 독일소년 알도가 여름방학을 맞아 인도의 바이오닉스 연구소에서 인공두뇌학자로 근무하는 아버지를 찾으러 갔다가 아버지가 태양의 사원이라는 사교집단에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아버지를 구하려는 모험에 나서면서 다양한 지식을 얻는 얼개를 갖고 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만든 인공두뇌 컴퓨터 레나가 사이버 여전사로 많은 활약을 한다. 따라서 이 소설은 추리와 환상소설의 기법을 가진 교양 입문서인 셈이다.

    컴퓨터 게임에 익숙한 멀티 세대는 더 이상 각종 그래프와 차트, 복잡한 공식으로 가득 찬 경제학 교과서를 읽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그동안 딱딱하기만 한 교양 서적들과 경제학 교과서들마저 스릴과 서스펜스를 갖춘 책, 곧 오락과 교양을 접목한 에듀테인먼트를 추구하는 것이다.

    디지털 혁명은 경험과 숙련에서 창의와 속도로 생산요소를 바꿔 버렸다. 하이테크 산업과 달리 하이터치 산업은 상상력을 통한 전방위적인 시각을 필요로 한다. 전방위적인 시각을 가지려면 인간을 이해하는 다양한 ‘기반지식’을 최대한 갖추되 이를 통합해 성찰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광속으로 변하는 비트 속에 서 있는 대중이 경쟁의 대열에서 낙오하지 않으려면 디지털적인 관찰력(미시적인 차가운 머리)과 아날로그적인 통찰력(거시적인 따뜻한 가슴)을 동시에 갖춘 다음 ‘눈부신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상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인간의 상상력은 프로세스나 체험과 지식만으로는 도출되지 않는다. 자신의 체험을 통해 얻은 지식과 다른 사람의 체험을 통해 얻은 지식과의 관계 맺기로 차이를 발견할 때 상상력이 나온다. 또 새롭게 발견한 지식과 옛 지식의 차이를 통해 상상력이 나온다.

    퓨전소설들이 삶의 일상성 속에서 얻은 역사 속의 구체적이고 사소한 정보를 허구적 이야기 구조에 교묘하게 녹아들게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상상력의 실제 방법론을 구현해 보여주는 것이다. 이 방법론을 아직도 여관방의 침대와 어설픈 역사의 언저리, 유아들의 머릿속이나 지난 시대의 미망에만 머물러 있는 우리 작가들이 주목하지 않는다면 아마 우리 소설의 미래란 없지 않겠는가?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