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8일 0시 35분에 모스크바를 출발한 시베리아횡단열차는 광활한 시베리아 대평원을 가로질러 우랄산맥을 넘고 바이칼호수를 지나 극동아시아까지 꼬박 7일을 달려 2월 15일 오전 6시 3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166시간 28분이 걸린 대장정이었다.
모스크바발(發) 시베리아횡단열차는 야로슬라브역에서 출발한다. 3번 플랫폼에 0시 35분 모스크바발 블라디보스토크행 100번 열차가 출발한다고 표시돼 있다.
모스크바에서는 기차를 타고 베를린으로, 파리로 갈 수 있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평양으로, 서울로 갈 수 있는 철로가 아직 연결돼 있지 않다. 만약 북한과 러시아를 잇는 나진-하산 철도가 연결되고 경원선이 복원된다면 언젠가 모스크바에서 기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서울로 들어올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이 오면 모스크바로 다시 날아가 기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서울까지 다시 한 번 시베리아를 횡단하리라. 7박 8일간 이어진 시베리아횡단열차 탑승기를 되짚어본다.
설국열차가 따로 없네!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뽀로로마을
모스크바 출발 후 6시간 만에 도착한 코스트로마역. 52분간 정차했기에 역사 주변을 찬찬히 둘러볼 수 있었다.
2월 8일 오전 9시 45분부터 40분간 정차한 갈리히역. 시베리아횡단열차 좌우로 석탄과 나무를 실어 나르는 화물열차가 서 있다. 시베리아에서는 사람이 탑승하는 객차보다 석탄과 석유, 나무 등 자원을 실어 나르는 화물열차가 훨씬 더 많이 철로를 달렸다.
오후 1시 37분부터 15분간 정차한 샤라역. 역사 바로 앞에 석탄을 나르는 화물열차가 서 있다.
모스크바를 출발해 광활한 시베리아 대평원을 달리는 기차는 말 그대로 설국열차다. 달려도 달려도 끝없이 펼쳐진 눈 덮인 광야뿐이다. 이따금 정차하는 간이역 주변에 작은 마을이 나타날 뿐, 하루 종일 차창 밖에 펼쳐진 풍경이라고는 가지마다 한 움큼씩 눈이 쌓여 있는 소나무와 자작나무의 행렬뿐이다.
특히 기차가 시베리아를 달리는 동안에는 인터넷은 물론, 휴대전화 연결도 잘 안 됐다. 이것이 역설적으로 무한한 자유를 줬다. 흔들리는 객차 안에서는 낮이든 밤이든 졸음이 쏟아졌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잤다. 깨어 있을 때는 차창 밖으로 흐르는 시베리아 풍경을 바라보며 멍 때리거나, 준비해간 책을 읽었다. 제한된 공간에서 무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이 시베리아횡단열차였다.
일주일 동안 하루 세끼씩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횡단열차를 탑승할 때는 뜨거운 물을 부어 바로 먹을 수 있는 간편식을 준비해가는 것이 좋다(사진4). 객차마다 뜨거운 물을 충분히 공급하는 장치를 구비해놓고 있다. 이따금 정차하는 간이역 매점에서도 필요한 식료품을 살 수 있다.
시차가 부리는 마법, 7시간 잤는데 시간은 9시간 지나다
시베리아횡단열차 전용컵. 차장에게 얘기하면 빌릴 수 있다. 구매도 가능하다.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있으면 시간이 휙휙 지나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첫째 날 저녁식사를 하고 10시 30분쯤 잠자리에 들어 다음 날 새벽 3시 20분에 일어났다. 그런데 현지시각은 오전 5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섯 시간 사이에 시차가 두 번이나 바뀐 것이다. 전날 저녁 6시 12분에 20분간 정차한 글라조프역은 모스크바와 시차가 같았지만, 약 4시간 뒤 도착한 발레지노역은 모스크바와 1시간 시차가 있어 밤 11시 35분으로 1시간이 더 지나 있었다. 다시 5시간 뒤 도착한 페름역에서는 또 다시 1시간 늘어 오전 5시 20분이 됐다. 9시간을 보냈을 뿐인데, 11시간이 지난 셈. 시차가 부린 마법 탓에 하룻밤새 시간이 엄청 빨리 흘렀다는 느낌을 받았다. 둘째 날 오전 11시 16분, 서시베라아의 대도시 예카테린부르크에 도착했다. 54분간 정차한 덕에 역사 앞 대형마트까지 나가 객차에서 먹을 간식과 물을 사올 수 있었다.
체감기온 영하 35도, 뼛속까지 파고드는 매서운 시베리아 추위
노보시비르스크역과 역사 안에 설치된 멋진 샹들리에.
밤새 또다시 2시간이 휙 하고 지나갔다. 아침에 눈을 뜨니 모스크바와 시차가 4시간으로 벌어졌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하루를 달려오면 중부 시베리아의 대도시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한다. 시베리아 최대 공업도시인 노보시비르스크는 ‘새로운 시베리아의 도시’라는 뜻을 갖고 있다. 본래 지명인 노보니콜라예프스크가 니콜라이 2세에서 유래됐다는 이유로 소비에트 연방 성립 이후 1926년에 현 이름으로 바뀌었다. 역사 안 샹들리에가 고풍스러운 멋을 풍겼다. 살을 에는 시베리아 추위 탓에 이곳 사람들은 모두가 두꺼운 옷으로 몸을 감싸고 예외 없이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매서운 시베리아 추위를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마린스키역.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 중간쯤에 위치해 있다.
이날 저녁 6시 20분쯤 도착한 마린스키역 고가도로 위에 서서 맞은 칼바람은 시베리아 추위를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영하 28도, 체감온도 영하 35도의 시베리아 추위는 살갗으로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땅에 찬물을 부으니 바닥에 닿자마자 조금씩 얼어붙었다. 두툼한 롱패딩을 입고 귀마개에 모자까지 뒤집어써도 엄습해오는 추위를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사진 몇 컷을 찍으려고 장갑을 1~2분간 벗었을 뿐인데, 손가락이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동상에 걸린 듯 살갗이 가렵고 아팠다. 살을 에는 추위란 이런 것인가 보다.
몽골, 중국과 교역 중심지 이르쿠츠크
이르쿠츠크역사 앞에 바이칼호수로 가려는 관광객을 태우고자 택시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찌마역 앞 도로. 눈 덮인 텅 빈 도로를 비추는 햇살마저 차갑게 느껴진다.
기차는 셋째 날 자정쯤 시베리아 대도시 크라스노야르스크를 지나 계속해서 동진한다. 아침에 또다시 1시간 시차가 변해 모스크바와 5시간 차이가 났다. 저녁 8시 31분에는 바이칼호수에 인접한 동시베리아 대도시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이르쿠츠크역 앞은 바이칼호수로 가려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택시기사들의 호객 행위가 이어져 시끌벅적했다. 바이칼호수의 서쪽 안가라강과 이르쿠트강의 합류 지점에 위치한 이르쿠츠크는 동시베리아의 행정, 경제, 문화의 중심 도시다. 러시아와 몽골, 중국과 교역 중심지로도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이르쿠츠크역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외모는 동양인과 서양인이 뒤섞여 있었다. 이르쿠츠크에서 7시간 40분을 동쪽으로 더 달려가면 닿는 울란우데에서는 시베리아횡단열차와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를 거쳐 중국 베이징까지 연결되는 몽골횡단열차가 갈라진다.
시베리아 하늘을 뒤덮은 매연, 그리고 매캐한 연기 냄새
매캐한 연기를 내뿜는 풍경이 하루 종일 펼쳐졌다.
시베리아횡단열차 안에서는 즉석밥과 즉석국, 라면, 고추장으로 훌륭한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다.
오래된 2등칸에는 객실에 콘센트가 설치돼 있지 않고 복도에 드문드문 있다. 이 때문에 긴 멀티탭이 있어야 객실에서 전자기기를 사용할 수 있다.
이르쿠츠크를 지나면서부터 차창 밖으로 흐르는 풍경이 사뭇 달라졌다. 깨끗한 눈으로 덮인 시베리아의 허허벌판 대신 여기저기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풍경이 펼쳐졌다. 난방과 취사를 위해 집집마다 나무와 석탄을 때고 있기 때문이리라. 푸른 하늘을 가릴 만큼 연기가 많이 피어올랐고, 냄새마저 매캐했다. 고비사막이 황사의 발원지라면, 이곳 몽골 위쪽 동시베리아가 미세먼지와 매연의 본고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4시 53분에 도착한 치타역에서는 동양적 외모의 사람들이 더 많이 눈에 띄어 아시아권에 더 가까이 왔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시베리아 중남부에 자리한 치타는 중국과 접경지역인 인고당강과 치타강의 합류 지점에 위치해 있다. 치타강에서 따온 지명 치타는 만주어로 ‘흰 점토, 도자기 흙’이라는 뜻이라고.
연기와 시베리아 아침 햇살이 만들어낸 몽환적 풍경
두 마리 개의 형상이 인상적인 에르 파블로프역.
식당칸에서는 러시아 전통 수프 보르시를 맛볼 수 있다.
울란우데와 치타를 지나 시베리아횡단열차는 다시 위도를 높여 달린다. 러시아와 맞닿은 중국의 동쪽 국경이 닭 볏처럼 올라와 있기 때문에 시베리아횡단열차도 국경을 따라 한동안 다시 위도를 높여 달리는 것이다. 몽골, 중국과 국경을 접한 지역을 지나는 사이 만나게 된 모고차역에서는 아침 햇살과 연기가 몽환적 풍경을 만들어냈다. 도시가스나 석유 대신 석탄과 화목난로로 난방과 취사를 하는 동시베리아 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이 같은 풍경을 빚어낸 것이다. 에르 파블로프역 앞에는 파블로프 개를 연상케 하는 2마리 개의 형상이 설치돼 있다. 장기간 운행하는 시베리아횡단열차에는 식당칸이 따로 있다. 객실에서는 음주를 할 수 없지만, 식당칸에서는 허용된다. 석양을 바라보며 러시아 전통 수프 보르시와 스테이크로 훌륭한 만찬을 즐긴다. 객실에서는 한쪽 창밖에 볼 수 없지만, 식당칸에서는 좌우 창밖을 모두 내다볼 수 있어 더욱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러시아와 중국이 맞닿은 접경도시 하바롭스크
극동지방 최대 도시 하바롭스크의 기차역과 역사 내 샹들리에. 러시아 대도시 역사에는 개성 있는 샹들리에가 설치돼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역에 전시돼 있는
시베리아횡단열차.
시베리아횡단열차의 종착역이 멀지 않았음을 풍경에서부터 느낄 수 있었다. 눈에 띄게 눈이 적어졌다. 위도가 낮아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끝없이 자작나무가 펼쳐진 모습만은 한결같다. 언제 또다시 이토록 많은 자작나무를 볼 수 있을까. 러시아 극동지방 최대 도시인 하바롭스크에 가까워지자 갑자기 휴대전화에 2개의 시간이 뜬다. 로컬과 현지시각. 러시아 유심을 끼웠는데, 현지시각이 하나 더 뜨다니 웬일일까. 우수리강과 헤이룽강이 만나는 지점을 통과하면서 중국과 러시아의 통신전파가 모두 잡힌 것이다. 철교를 지나 하바롭스크역에 도착하니 러시아 시간만 휴대전화에 표시된다. 하바롭스크에서는 1시간 10분간 정차했다. 시베리아횡단열차 앞에 자리 잡은 두 개의 화물열차에서 쉼 없이 짐이 내려왔다. 하바롭스크가 러시아 극동지역 대도시이자 물류 중심지임을 보여주는 풍경이다.
하바롭스크에서 14시간을 더 달려 다음 날 오전 6시 3분 종착역인 블라디보스토크역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으로 불리는 블라디보스토크는 최근 한국인 관광객이 즐겨 찾는 ‘핫’한 도시다. 클레버하우스 지하 1층 대형마트와 시내 중심지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유명 식당, 그리고 루스키섬과 등대 등 주요 관광지에서는 현지인보다 한국인을 더 많이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