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5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의회 연두교서 발표 때 모두 흰옷을 입고 참석한 민주당 상하원 여성의원들이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OC·가운데 키 큰 여성) 의원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 [AP=뉴시스]
이날 민주당 여성의원의 드레스코드가 흰색이었던 것은 여성참정권 운동가(suffragettes)에 대한 오마주(경의)였다. 여성참정권 운동은 영국에서 비롯했는데 그 깃발은 자주, 흰색, 녹색의 3가지 색으로 이뤄졌다. 미국 여성참정권 운동은 그 전통을 계승하면서 살짝 차별을 둬 자주, 흰색, 금색을 상징색으로 삼았다. 그중 흰색만 살아남은 것은 당시 신문에 흑백사진만 실려 흰색이 가장 눈에 띈다는 사실을 깨달은 여성들이 전략적으로 흰색 의상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모든 민주당 여성의원에게 흰옷을 입히다
1월 19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여성 혐오·인권 차별 발언에 반대하는 ‘여성행진(Women’s March)’ 뉴욕 행사에서 연설을 마친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의원이 지지자들의 환호에 화답하고 있다. [AP=뉴시스]
그런데 왜 갑자기? 1월 3일 하원의원 취임식에 여성참정권 운동을 환기케 하겠다며 홀로 흰옷을 입고 참석한 여성 초선 하원의원의 영향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6일 미국 중간선거에서 역대 최연소(29) 하원의원에 당선한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다.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2세인 그의 성이 둘인 것은 아버지 성(오카시오)과 어머니 성(코르테스)을 붙여 쓰는 스페인식 명명법의 산물이다. 그래서 이니셜을 딴 AOC라는 애칭으로 불릴 때가 많다.
11월 총선 결과가 발표될 때까지 무명의 정치신인이던 그는 3개월 사이 미국 정계의 신데렐라가 됐다. ‘트럼프 이후 가장 흥미로운 정치인’이란 평가와 함께 미국 밀레니얼 세대(1980년 초반~2000년대 초반 태어난 세대)의 대변인으로 급부상 중인 ‘AOC 현상’을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봤다.
反트럼프의 선봉장
트럼프는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뉴욕 출신의 금발머리 부자다. 앵글로색슨계 백인 신교도(WASP)의 대명사다. 트럼프보다 43세 어린 AOC는 그 대척점에 서 있다. 같은 뉴욕 태생이지만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그는 자신의 이런 혈통을 타이노족(카리브해 일대에 거주하던 아메리칸 인디언) 언어에서 파생된 단어인 ‘보리쿠아’라 부르며 “우리는 흑인이고 원주민이며 스페인 사람이자 유럽인”이라고 즐겨 말한다. 심지어 그의 혈통에는 유대인(이베리아반도 출신 유대인인 세파르디)의 피도 흐르고 있다. 종교도 가톨릭이다.
당연히 AOC는 불법이민과 난민 문제를 적대시하고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려는 트럼프의 정책에 반대한다. 이 정도는 약과다. 아예 이민세관단속국(ICE)의 폐지와 국민건강보험 적용 대상 확대, 공립대학 등록금 무상화를 주장한다. 법인세를 감면한 트럼프와 정반대로 연소득 1000만 달러(약 112억 원) 이상일 경우 최고 70%까지 부유세를 부과하고 이를 바탕으로 10년 내 전력 수요의 100%를 자연 에너지로 충당하자는 ‘그린 뉴딜 정책’까지 추진 중이다. 그러다 보니 꿩 잡는 데 매가 제격인 것처럼 트럼프 잡는 데 AOC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언더도그 & 여자 다윗
AOC의 정치적 자산은 서민을 대변하는 언더도그(사회적 약자) 이미지다. 하원의원 당선 이후 ‘뉴욕타임스(NYT)’와 인터뷰에서 “첫 의원 월급을 받으면 월세부터 내야 한다”고 한 발언이 인구에 회자된 것이 대표적이다.그는 미국에서도 학비 비싸기로 소문 난 보스턴대를 장학금을 받고 졸업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청소부와 버스운전사로 일하며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를 돕고자 대학 졸업 후에도 바텐더와 웨이트리스로 돈을 벌어야 했다. 결국 어머니는 집세와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 플로리다주로 터전을 옮겼다.
집 없고 가난한 히스패닉의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뉴욕에 남아 히스패닉 시민단체에서 일하다 2016년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버니 샌더스의 선거운동원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11월 중간선거 전 개봉한 마이클 무어 감독의 ‘화씨 11/9 : 트럼프의 시대’를 보면 민주당 주류 정치인에게 맹공을 퍼붓는 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지난해 1월 자신이 살던 뉴욕 브롱크스와 퀸스 일대 지역구(뉴욕 14 선거구) 민주당 경선에 출사표를 던질 때만 해도 ‘달걀로 바위 치기’라는 평가가 많았다. 상대는 ‘퀸스의 왕’으로 불린 10선 의원 조 크롤리였기 때문. 지역 정치인과 기업체, 노동조합으로부터 압도적 지지를 받은 크롤리의 선거운동 모금액은 340만 달러(약 38억 원)나 됐다. 그런데 75%를 개인후원금으로 충당해 19만4000달러를 쓴 AOC가 그해 6월 민주당 경선에서 15%p 차로 당선하는 대역전극을 펼쳐냈다. 언더도그의 승리이자 ‘여자 다윗’의 탄생이었다.
댄싱 퀸 & 케이뷰티 전도사 & 예쁜꼬마선충
보스턴대 티셔츠를 입고 학교 옥상에서 친구들과 함께 찍은 댄스 동영상 속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미국 보스턴대 홈페이지]
그의 하원의원 취임 날 ‘세상 다 아는 것처럼 굴지만 행동은 멍청한 미국 최애 공산주의자’라는 메시지와 함께 AOC가 대학생 시절 학교 옥상에서 맨발로 격렬히 춤추는 영상이 공개됐다. 그러자 그는 바로 그날 자신의 집무실 앞에서 가볍게 춤추는 영상과 함께 ‘공화당은 여자가 춤추는 걸 추문으로 여기나 봐요. 여기 춤추는 국회의원도 있습니다’라고 맞받아치는 트위터 메시지로 거꾸로 인기가 치솟았다.
이후 ‘댄싱 퀸’이란 별명을 얻은 그는 일거수일투족이 뉴스가 되고 있다. 남다른 피부가 화제에 오르자 한국 화장품 사용이 그 비결이라며 자세한 화장법을 인스타그램에 올려 ‘케이뷰티(K-beauty) 전도사’라는 호칭까지 얻었다.
AOC는 예쁜꼬마선충과도 인연이 있다. 고등학생이던 2007년 인텔 국제 과학기술경진대회에서 방부제가 예쁜꼬마선충의 수명 연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로 2위를 차지했다. 국제천문연맹은 이를 기념해 화성과 목성 사이를 도는 소행성 중 하나의 이름을 ‘23238 오카시오-코르테스’로 명명했다.
‘좌파 트럼프’ or ‘여자 트럼프’
짧은 기간 폭발적 인기를 누리곤 있지만 오래가지 못할 것이란 비판적 시각도 많다. 풀뿌리 민심을 반영한다면서 선동적 정책만 앞세운다는 점에서 ‘좌파 트럼프’ 내지 ‘여자 트럼프’라는 비판도 나온다. 미국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의식적이든 아니든 뉴스 콘텐츠 제작자들이 트럼프를 소비했던 것처럼 AOC 관련 이야기를 시청률이나 웹 트래픽 올리는 데 이용하고 있다’고 꼬집었다.특히 시애틀에 본사를 둔 아마존이 뉴욕 퀸스에 제2본사를 설립하려던 계획이 지역구 의원인 AOC의 반대로 무산될지 모른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철없는 정치인’이란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AOC는 “아마존 제2본사가 들어서면 집값이 치솟아 현재 주민들은 외곽지역으로 쫓겨날 수 있으며, 페트병에 오줌을 눠가며 일해야 할 만큼 살인적 근무여건의 기업을 유치할 필요가 없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아마존이 약속한 2만5000개의 신규 일자리만 날리는 자충수라는 비판이 민주당에서도 나오고 있다. 억만장자이면서도 부유세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해온 빌 게이츠도 제동을 걸고 나섰다. 게이츠는 “현재 39.6%인 소득세의 최고세율을 70%까지 올리자는 건 실효성이 떨어진다”며 “최대 20%로 묶여 있는 자본이득세율을 일반소득세율 수준으로 올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AOC의 그린 딜 정책을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