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수송공원 내 이종일 보성사 사장 동상(왼쪽)과 보성사 터 표지석. 그러나 실제 보성사는 수송공원이 아니라 현 조계사 경내에 자리했다. [남경훈]
그리고 이튿날 아침부터 인쇄물은 전국 요소요소에 몸을 감추고 있는, 역사적 거사(擧事)에 동참할 책임자들에게 은밀히 전달됐다. 이 문건에는 ‘선언서(宣言書)’ ‘공약삼장(公約三章)’ ‘조선건국 4252년 3월 일(朝鮮建國 四千二百五十二年 三月 日)’ ‘조선민족대표(朝鮮民族代表)’ 등의 글자가 찍혀 있었다. 일제강점으로부터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1919년 기미년 3월 1일에 봉기한 조선민족의 거족적 투쟁에 물적 촉발탄이 된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가 바로 이 문건이다.
해 저물자 남몰래 2만1000장 찍어
기미년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의 위치는 보성학교 출판물, 천도교 및 불교계 출판물, 그리고 연구자들의 논문이나 책, 신문과 잡지 기사, 그리고 인터넷 게시물 등에 대략적으로 밝혀져 있다. ‘옛 보성학교 교정 안, 현재로는 조계사의 대웅전 앞마당 극락전 앞, 대웅전 앞마당 회화나무 옆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글로 된 자료’다. 여기에 사진과 지형도 등 시각적 자료를 보충해 검토하면 옛 보성사의 위치를 좀 더 정확히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게 필자 생각이다.
‘도면’은 ‘보성’지 개교 60주년 기념호 회보란에 나와 있는 ‘역대교사’ 도면이다. 1910년대 후반 보성학교 교정의 대체적인 윤곽과 주요 교사 건물, 지금도 남아 있는 백송과 회화나무 등의 상대적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보성사 터를 시각적으로 확인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자료로는 사진도 있다. ‘사진1’은 보성학원 초창기인 1910년대 후반의 모습이다. 교정의 중요 부분인 신축교사 전체와 보성사 건물의 모퉁이가 일부 보인다. ‘사진2’는 교정 안에서 정문 쪽을 찍은 것인데, 각황사(覺皇寺) 건물 전체가 나와 있다.
‘도면’과 ‘사진1’ ‘사진2’를 동서남북 방위에 맞게 배치해본 것이 ‘작업1’이다. 주요 건물의 상대적 위치를 알아볼 수 있고, 이를 통해 우리의 관심사인 보성사 위치를 좀 더 정확히 추정해낼 수 있다.
‘작업1’을 보자. 교문을 들어서면 운동장 건너 맞은편에 신축교사가 있고, 교문을 나서면 바로 앞 맞은편에 각황사가 있다. ‘도면’과 ‘사진1·2’에 나와 있듯 보성사는 신축교사 남쪽 날개 앞쪽에서 좀 떨어진 자리, 교문을 기준점으로 보면 보성학교 교문에 들어서서 오른편에 있다.
‘작업2’는 보성학교 교지에 나와 있는 ‘도면’을 1927년 지형도(①), 2018년 포털사이트 다음 지도(②), 그리고 2018년 서울시 GIS(지리정보시스템) 지도 항공사진(③)에 차례로 투영해 옛 보성사 위치를 추정해본 것이다.
먼저 ‘도면’을 참작해 ① 위에 2019년 현재도 우뚝 서 있는 백송과 회화나무 위치, 지금은 사라진 정문의 위치를 추정해 넣었다. 이 세 기준점을 바탕으로 교사와 보성사 위치도 추정해봤다. 그다음으로 ② 위에 교사, 보성사 위치를 그려 넣었다. 이어 ②를 ③ 위에 옮겨 넣어봤다.
종로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 2층 벽돌집
이상의 몇 단계를 거쳐 ③ 위에 1919년 당시 보성학교 교정에 있던 보성사의 위치를 시각적으로 나타내 봤다.③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조계사 중앙에 대웅전이 있고 △그 바로 동쪽에 백송이 자리하며 △그 남쪽의 사찰 종무 관련 부서들이 위치한 곳의 서쪽 부분이 옛 보성학교 신축교사가 있던 자리다. 그리고 △신축교사 남쪽 날개 앞쪽으로 좀 떨어진 곳이자 △대웅전 앞 회화나무 옆자리, 회화나무 남쪽 ‘범종루’ 바로 앞자리에 보성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는 보성사 건물 모습을 추정해본다.
보성사 건물 모습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은 아직 발굴된바 없다. ‘보성사 복원도’는 이 건물 한쪽 모퉁이만 보여주는 사진 몇 컷(사진3·4·5)과 3·1운동 직후 일제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보성사가 전소된 사진(‘매일신문’ 게재), 그리고 보성사가 ‘30평 2층 벽돌집이었다’는 문헌 자료를 근거로 보성사 건물 전체 모습을 건축설계 전문가가 도면으로 나타낸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자주 국민인 것을 선언하노라(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기미독립선언서 첫 구절
기미독립선언서는 100년 전 우리 민족이 일제에 항거해 거족적으로 궐기하며 해방투쟁의 길을 걸은 물적 기폭제였다. 그러한 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의 옛터를 3·10운동 100주년을 맞아 좀 더 명확히 알아봤다. 온 국민이 우리의 민족적 역량을 결집해 참된 의미에서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나라’를 이루겠다는 굳건한 다짐을 새롭게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