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를 부를 때 꼭 뒤에 붙는 말이 있다. ‘선생님’이다. 의사 선생님. 하지만 말뜻을 풀이해보면 의사 선생님은 동의어 반복이다. ‘醫師’, 즉 ‘병을 고치는 선생님’이란 뜻. 그 뒤에 또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이면 ‘병을 고치는 선생님 선생님’이 된다. ‘역전(驛前) 앞’과 같은 경우다. 우리가 보통 고소득이 보장되는 전문직을 ‘士’자 직업이라고 표현하지만, 한자로 스승 사(師)가 붙는 직업은 의사와 약사가 유일하다. 변호사, 회계사, 세무사, 변리사 등의 ‘사’만 선비 사(士)다. 판사, 검사 등은 일 사(事)를 쓴다. 의사, 약사 그들을 스승이라 칭하는 이유는 사람을 살리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름에서부터 ‘스승’으로 인정받는 의사, 약사도 ‘고소득 전문직종’이라 말하기 힘든 시대가 왔다. 사람에 따라 수입 편차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해당 직군 자체를 고소득 전문직종이라 부르긴 어렵다. 약사는 이미 2000년 의약분업이 시작되고 전문의약품의 처방권이 의사에게 넘어가면서 일부 종합병원급 이상 문전약국의 약사를 제외하고는 월 300만 원 넘게 버는 경우가 드물다. 인근에 병·의원이 없는 동네약국은 철퇴를 맞아 씨가 말랐다. 대학병원 봉직 약사나 제약업체 연구직 약사로 취업해도 대기업 직원의 연봉을 넘어서지 못한다. 약국의 폐업이 속출했고 약사 면허증을 가지고도 다른 일을 하는 이가 절반이 넘는다. 이런 세태는 의약분업 시작 후 몇 년 안에 완결됐다.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홍보전
의사, 한의사도 마찬가지다. 약사처럼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먼저 의사를 보자. 매년 인턴, 레지던트를 마친 전문의가 전국 42개 대학병원에서 3000명씩 쏟아져 나오고 의사 면허를 가진 총 숫자만 10만 명이 훌쩍 넘었다. 단순 계산을 하면 국민 500명당 의사 1명꼴이다. 500명 중 하루에 아픈 이가 얼마나 될까. 시쳇말로 ‘돈이 될 리가 없다.’ 그만큼 이미 의사는 포화상태다. 이제 의사들끼리 살아남기 위한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자신들의 치료술을 알리기 위해 홍보전, 광고전을 펼친다. 의원 사이에선 홍보와 광고에 드는 비용을 ‘총알’이라고 표현한다. 칼만 안 들었지, 이것은 전쟁이다.
한국에서 의사가 되려면 6년제 의대를 나와 국가고시를 치면 되지만, 전공의 과정 5년(인턴 1년, 레지던트 4년)을 거쳐 전문의가 되는 이가 대부분이다. 합하면 모두 11년. 남자의 경우는 군대를 갔다 와야 하고, 봉직의로 취직을 잘하려면 전임의(펠로) 생활을 1~3년 해야 한다. 스무 살에 의대에 입학해 제대로 돈벌이를 하기까지 최소 11년, 최대 16년이 걸린다. 의학전문대학원(이하 의전원) 출신은 여기에 2년을 더해야 한다.
전문의가 된 뒤 ‘밥값’을 제대로 할 때까지 평균 14년이 걸린다고 가정하면 서른 중반은 돼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의사들의 결혼 연령이 다른 사람들보다 늦어지는 것도 이 때문. 일찍 결혼하면 의사의 배우자는 상대방을 전문의로 만들어 취직할 때까지 온갖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
이렇게 전문의를 따고 전임의 생활을 마쳤다 해도 한 해 3000명씩 배출되는 전문의를 뽑아주는 병·의원은 한정돼 있다. 극히 일부가 대학병원의 교수로 남고 10% 정도는 병·의원이 아닌 제약사나 보건 관련 기관, 보건소 등 유관기관 업체로 떠난다. 종합병원의 봉직의로 가는 이는 10% 안팎. 나머지 40% 정도는 일반 병·의원의 월급의사로 생활한다. 봉직의를 하면서 명성을 쌓아야 개업했을 때 실패할 확률이 그만큼 줄어든다.
“이민 갔다? 빚에 쪼들려 폐업한 것”
나머지 40%는 광야에서 홀로서기를 준비한다. 구직활동이 여의치 않거나 동업할 선배가 있으면 개업을 하는데, 문제는 비용이다. 서울 강남을 기준으로 하면 건물 보증금과 인테리어 비용, 의료기 등 구입에 최소 3억~5억 원은 잡아야 하고, 다른 곳에서 작은 동네의원을 차린다 해도 1억~2억 원은 필요하다. 병·의원을 알려야 할 실탄, 총알도 필요하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엄친아’거나 ‘열쇠 3개’를 받은 데릴사위가 아닌 한, 유일한 방법은 돈을 빌리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문 닫는 병·의원이 많다 보니 은행권의 의사 상대 대출이 날이 갈수록 한도액은 줄어들고 이자율은 올라가고 있다. 씨티은행은 닥터론 한도를 2년 전 5억 원에서 3억 원, 신한은행은 3억 원에서 2억5000만 원, 하나은행은 3억 원에서 2억 원으로 축소했다. 국민은행은 최고 3억 원의 한도를 유지하는 대신 가산금리를 0.43%포인트 올렸다. 은행권은 닥터론 한도를 더 줄이고 이자율은 높인다는 방침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정확히 수치를 내보지 않았지만 의사와 한의사 중 20~30%는 신용불량자다. 채권추심에 들어간 사람도 적지 않다”고 밝혔다.
실제 2005년 이후 매년 폐업을 한 의원급만 전국적으로 평균 1800곳에 이른다. 병원급도 매년 100여 개씩 망했다. 대부분의 병·의원이 빌린 돈을 갚지 못해 부도를 냈다. 빌린 돈을 못 내 진료비를 압류당한 의료기관도 폭증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최근 5년간 의료기관 건강보험 급여비 압류 현황’에 따르면 2006년에는 200억6900만 원이었던 압류금액이 2009년에는 907억8000만 원으로 4.5배 급증했다. 올해 6월 말 현재는 상반기만 집계했는데도 635억원1400만 원에 달했다. 이 때문일까. 경제위기로 병·의원의 폐업이 극심했던 2008년 서울중앙지법의 경우 고액 채무자로 파산 신청한 사건 57건 중 32건이 의사나 한의사가 한 것이었다. 대전지법에는 2009년 1월부터 11월 25일까지 6명의 의사·한의사가, 부산지법은 지난해 1월부터 11월 중순까지 13명의 의사·한의사가 고액채무자 일반회생 신청을 했다.
대부분 의사는 수입이 좋아도 좋다고 말 안 하고, 나빠도 나쁘다는 소리를 못한다. 좋다고 하면 세무조사가 들어오고 나쁘다고 하면 위신이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나간다”고 허세를 부려도 십중팔구 ‘빛 좋은 개살구’일 경우가 많다. 의사 중에 갑자기 ‘이민을 간다’라고 하면 빚에 쪼들려 폐업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들 사회에선 “이민 갔다”고 하면 “망했다”라는 말이다.
전문의가 매년 폭증하자 이제 의사들은 제 살 깎아먹기 경쟁에 들어갔다. 인턴, 레지던트를 하며 5년간 배운 전공분야를 버리고 이른바 ‘돈 되는 전공’으로 진료과목을 옮겨가는 것. 8시간씩 서서 진료를 해도 적자만 커지는 산부인과, 일반외과, 흉부외과는 물론 가정의학과, 마취과 등 비인기과 전문의들이 의사 면허증만 있으면 진료할 수 있는 질환이나 기계만 있으면 비교적 짧은 시간에 치료법을 배울 수 있는 인기 진료분야를 택해 개원을 하거나 재개원을 하는 것. 간판에 000의원이라 쓰여 있고 진료과목에 성형, 피부, 이비인후과, 소아청소년과 같은 것이 들어갔거나 의원 이름 자체에 전공분야가 표시되지 않았다면 이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의료법상 해당 전문의가 아니면 병·의원 이름에 전공분야를 표시할 수 없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진료과목은 그냥 의사라도 그 어떤 것이든 쓸 수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현재 전문의 자격증이 있지만 의원으로 개업한 의사는 4914명으로 일반외과 전문의가 1036명, 산부인과 555명으로 가장 많았다. 전문의 자격증 소지자가 개설한 의원급 의료기관 수가 2만5000여 곳인 점을 고려하면 전문의 5명 중 1명은 전문의임을 밝히지 않고 있는 셈이다.
전공과목별 개원의협의회 측은 환자들을 대상으로 “원장의 전공과목을 확인하고 전문의에게 진료받는 것이 만일의 의료사고를 막고 더 정확한 치료를 위해 좋다”고 말하지만, 전공과 달리 진료과목을 바꾼 개원의들은 “생명에 지장이 없는 일반적 치료를 주로 하고 전반적인 의학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의료기와 술기가 필요한 것을 진료하기 때문에 문제 될 게 없다”고 밝힌다. 하지만 이렇게 전공을 바꿔 개업을 해도 장사가 안 돼 망하는 경우가 더 많다. 레이저 기기, 진단 기기 등 고가의 의료장비를 구입하는 데 수억 원이 들지만 환자가 그 의원을 찾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의료 1번지’ ‘강남 성형공화국’이라 불리는 강남구와 서초구 일대의 병·의원이 무지막지하게 광고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지 않으면 환자가 병·의원을 찾지 않기 때문이다. 2007년 병·의원 광고가 허용된 후 환자가 바글거리는 병·의원은 대부분 광고나 홍보를 끊임없이 하는 곳이다. 이들의 홈페이지는 인터넷 오버추어 광고에서 늘 맨 위를 차지한다.
문제는 여기에도 막대한 비용이 투입된다는 점이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실력만 있으면 입소문이 났지만 이제는 신문, 방송, 잡지, 인터넷을 통해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병·의원을 알리지 않으면 현상 유지도 힘든 상황. 그래서 서울 강남의 의사 사회에선 “요즘 강남의 병·의원 의사들의 전공과목은 마케팅과”라는 자조 섞인 말도 나온다. 그래서 광고홍보를 통해 많은 환자가 모이고 환자들을 진료하는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명의가 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결국 빌리든 어떻게 하든 광고와 홍보를 쏟아부을 비용이 있는 곳은 살아남고, 그게 안 되는 병·의원은 도태하는 게 서울 강남 의료계에서 벌어지는 살풍경이다.
한 해 평균 4~5명 생활고 못 이겨 자살
한때 의사들의 인기가 하락하면서 상대적으로 결혼 배우자 인기도 1위를 달렸던 한의사 역시 속을 들여다보면 ‘빛 좋은 개살구’인 경우가 많다. 전국의 11개 한의과대학에서 해마다 750∼800명의 한의사가 배출되면서 전체 한의사는 어느덧 적정 정원(대한한의사협회 추산) 5000명의 3배인 1만6000여 명으로 불었다. 그러다 보니 매년 1200곳 넘는 한의원이 문을 닫고 있다. 한 해 개업의 중 15~20%가 빚에 못 견디고 문을 닫는 실정이다.
의원급 한의원 봉직 한의사의 첫 월급은 300만 원을 넘지 않고, 큰 한방병원도 고정급을 정해놓고 인센티브제로 월급을 주는 곳이 많다. 이 때문일까. 서울 서초구청 보건소 계약직 한의사의 경쟁률은 30대 1까지 올라갔고, 지방 보건소도 한의사만큼은 경쟁률이 3대 1을 넘는다.
한의사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인지는 정부가 한방산업특구로 육성 중인 서울 제기동을 가보면 금세 알 수 있다. 5년 전만 해도 한 집 건너 하나꼴로 한의원이 들어섰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건강원과 약재상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심지어 한의사 면허증을 가지고 건강원을 차린 사람도 적지 않다. 무리해 고가의 인테리어를 하고 장비를 들여놓고 한의원을 하다 신용불량자가 된 후 약재상의 직원 형태로 일하는 한의사도 있다. 이들 한의사의 고민은 전국 한의사 1만5000여 명 중 3분의 1인 5000여 명이 회원으로 활동하는 ‘빈의협’(貧醫協, cafe. daum.net/poordoctor) 카페에 가면 한눈에 볼 수 있다.
“평일 오후 8∼9시까지 진료는 기본이고 휴일도 마다 않고 진료했지만 하루 (환자가) 10명도 안 되는 날이 계속됐고, 인근에 4개의 한의원이 더 생겨 빚은 쌓여갑니다. 월세는 밀려 보증금에서 깎인 지 오래고 직원 없이 혼자 환자를 맞이합니다.” “매출이 월 1000만 원이 안 됩니다. 직원 한 명 월급 주고 빌린 돈 3억 원에 원금 갚고 약재 사면 남는 게 없습니다. 이번 달도 저번 달도 적자, 또 적자, 빚만 늘어갑니다.”
하지만 한의원을 몇 개씩 거느리고 명의로 소문나 계속 확장하는 곳도 있다. 이들은 지하철과 거리 광고는 물론 신문, 방송, 잡지, 인터넷에 파상적인 광고와 홍보를 하며 이름을 알린다. 이들 한의원은 환자들로 북적인다. 심지어 버스 옆면에까지 광고를 하는 한의원도 있다. 환자가 많이 오니 돈을 많이 벌고, 돈을 많이 버니 광고를 더 많이 한다. 하지만 한의사 1만5000명 시대에 개원을 한 한의사는 돈이 없어 홍보를 못하니 환자가 없고, 환자가 없으니 빚만 늘어가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요즘 개업 한의계는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따르면 한 해 평균 4~5명의 의사, 한의사가 빚더미와 생활고를 못 이겨 자살한 끝에 부검대에 오른다. 유서가 발견되거나 약물사용 등 사망원인이 명확한 경우는 부검조차 하지 않으니 실제 경영난으로 자살하는 의사는 더 많을 터. 빛이 크면 그림자도 그만큼 큰 법이다. 의사, 한의사만 되면 고소득이 보장된다는 생각으로 의대나 의전원 진학을 꿈꾸는 청소년이 있다면 이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의사, 한의사가 무조건 최고 신랑감, 신부감인 시대는 진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름에서부터 ‘스승’으로 인정받는 의사, 약사도 ‘고소득 전문직종’이라 말하기 힘든 시대가 왔다. 사람에 따라 수입 편차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해당 직군 자체를 고소득 전문직종이라 부르긴 어렵다. 약사는 이미 2000년 의약분업이 시작되고 전문의약품의 처방권이 의사에게 넘어가면서 일부 종합병원급 이상 문전약국의 약사를 제외하고는 월 300만 원 넘게 버는 경우가 드물다. 인근에 병·의원이 없는 동네약국은 철퇴를 맞아 씨가 말랐다. 대학병원 봉직 약사나 제약업체 연구직 약사로 취업해도 대기업 직원의 연봉을 넘어서지 못한다. 약국의 폐업이 속출했고 약사 면허증을 가지고도 다른 일을 하는 이가 절반이 넘는다. 이런 세태는 의약분업 시작 후 몇 년 안에 완결됐다.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홍보전
의사, 한의사도 마찬가지다. 약사처럼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먼저 의사를 보자. 매년 인턴, 레지던트를 마친 전문의가 전국 42개 대학병원에서 3000명씩 쏟아져 나오고 의사 면허를 가진 총 숫자만 10만 명이 훌쩍 넘었다. 단순 계산을 하면 국민 500명당 의사 1명꼴이다. 500명 중 하루에 아픈 이가 얼마나 될까. 시쳇말로 ‘돈이 될 리가 없다.’ 그만큼 이미 의사는 포화상태다. 이제 의사들끼리 살아남기 위한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자신들의 치료술을 알리기 위해 홍보전, 광고전을 펼친다. 의원 사이에선 홍보와 광고에 드는 비용을 ‘총알’이라고 표현한다. 칼만 안 들었지, 이것은 전쟁이다.
한국에서 의사가 되려면 6년제 의대를 나와 국가고시를 치면 되지만, 전공의 과정 5년(인턴 1년, 레지던트 4년)을 거쳐 전문의가 되는 이가 대부분이다. 합하면 모두 11년. 남자의 경우는 군대를 갔다 와야 하고, 봉직의로 취직을 잘하려면 전임의(펠로) 생활을 1~3년 해야 한다. 스무 살에 의대에 입학해 제대로 돈벌이를 하기까지 최소 11년, 최대 16년이 걸린다. 의학전문대학원(이하 의전원) 출신은 여기에 2년을 더해야 한다.
전문의가 된 뒤 ‘밥값’을 제대로 할 때까지 평균 14년이 걸린다고 가정하면 서른 중반은 돼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의사들의 결혼 연령이 다른 사람들보다 늦어지는 것도 이 때문. 일찍 결혼하면 의사의 배우자는 상대방을 전문의로 만들어 취직할 때까지 온갖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
이렇게 전문의를 따고 전임의 생활을 마쳤다 해도 한 해 3000명씩 배출되는 전문의를 뽑아주는 병·의원은 한정돼 있다. 극히 일부가 대학병원의 교수로 남고 10% 정도는 병·의원이 아닌 제약사나 보건 관련 기관, 보건소 등 유관기관 업체로 떠난다. 종합병원의 봉직의로 가는 이는 10% 안팎. 나머지 40% 정도는 일반 병·의원의 월급의사로 생활한다. 봉직의를 하면서 명성을 쌓아야 개업했을 때 실패할 확률이 그만큼 줄어든다.
“이민 갔다? 빚에 쪼들려 폐업한 것”
나머지 40%는 광야에서 홀로서기를 준비한다. 구직활동이 여의치 않거나 동업할 선배가 있으면 개업을 하는데, 문제는 비용이다. 서울 강남을 기준으로 하면 건물 보증금과 인테리어 비용, 의료기 등 구입에 최소 3억~5억 원은 잡아야 하고, 다른 곳에서 작은 동네의원을 차린다 해도 1억~2억 원은 필요하다. 병·의원을 알려야 할 실탄, 총알도 필요하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엄친아’거나 ‘열쇠 3개’를 받은 데릴사위가 아닌 한, 유일한 방법은 돈을 빌리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문 닫는 병·의원이 많다 보니 은행권의 의사 상대 대출이 날이 갈수록 한도액은 줄어들고 이자율은 올라가고 있다. 씨티은행은 닥터론 한도를 2년 전 5억 원에서 3억 원, 신한은행은 3억 원에서 2억5000만 원, 하나은행은 3억 원에서 2억 원으로 축소했다. 국민은행은 최고 3억 원의 한도를 유지하는 대신 가산금리를 0.43%포인트 올렸다. 은행권은 닥터론 한도를 더 줄이고 이자율은 높인다는 방침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정확히 수치를 내보지 않았지만 의사와 한의사 중 20~30%는 신용불량자다. 채권추심에 들어간 사람도 적지 않다”고 밝혔다.
2001년 의약분업 반대를 외치는 의사들. 하지만 정작 ‘철퇴’를 맞은 곳은 ‘동네약국’이었다.
대부분 의사는 수입이 좋아도 좋다고 말 안 하고, 나빠도 나쁘다는 소리를 못한다. 좋다고 하면 세무조사가 들어오고 나쁘다고 하면 위신이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나간다”고 허세를 부려도 십중팔구 ‘빛 좋은 개살구’일 경우가 많다. 의사 중에 갑자기 ‘이민을 간다’라고 하면 빚에 쪼들려 폐업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들 사회에선 “이민 갔다”고 하면 “망했다”라는 말이다.
전문의가 매년 폭증하자 이제 의사들은 제 살 깎아먹기 경쟁에 들어갔다. 인턴, 레지던트를 하며 5년간 배운 전공분야를 버리고 이른바 ‘돈 되는 전공’으로 진료과목을 옮겨가는 것. 8시간씩 서서 진료를 해도 적자만 커지는 산부인과, 일반외과, 흉부외과는 물론 가정의학과, 마취과 등 비인기과 전문의들이 의사 면허증만 있으면 진료할 수 있는 질환이나 기계만 있으면 비교적 짧은 시간에 치료법을 배울 수 있는 인기 진료분야를 택해 개원을 하거나 재개원을 하는 것. 간판에 000의원이라 쓰여 있고 진료과목에 성형, 피부, 이비인후과, 소아청소년과 같은 것이 들어갔거나 의원 이름 자체에 전공분야가 표시되지 않았다면 이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의료법상 해당 전문의가 아니면 병·의원 이름에 전공분야를 표시할 수 없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진료과목은 그냥 의사라도 그 어떤 것이든 쓸 수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현재 전문의 자격증이 있지만 의원으로 개업한 의사는 4914명으로 일반외과 전문의가 1036명, 산부인과 555명으로 가장 많았다. 전문의 자격증 소지자가 개설한 의원급 의료기관 수가 2만5000여 곳인 점을 고려하면 전문의 5명 중 1명은 전문의임을 밝히지 않고 있는 셈이다.
전공과목별 개원의협의회 측은 환자들을 대상으로 “원장의 전공과목을 확인하고 전문의에게 진료받는 것이 만일의 의료사고를 막고 더 정확한 치료를 위해 좋다”고 말하지만, 전공과 달리 진료과목을 바꾼 개원의들은 “생명에 지장이 없는 일반적 치료를 주로 하고 전반적인 의학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의료기와 술기가 필요한 것을 진료하기 때문에 문제 될 게 없다”고 밝힌다. 하지만 이렇게 전공을 바꿔 개업을 해도 장사가 안 돼 망하는 경우가 더 많다. 레이저 기기, 진단 기기 등 고가의 의료장비를 구입하는 데 수억 원이 들지만 환자가 그 의원을 찾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의료 1번지’ ‘강남 성형공화국’이라 불리는 강남구와 서초구 일대의 병·의원이 무지막지하게 광고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지 않으면 환자가 병·의원을 찾지 않기 때문이다. 2007년 병·의원 광고가 허용된 후 환자가 바글거리는 병·의원은 대부분 광고나 홍보를 끊임없이 하는 곳이다. 이들의 홈페이지는 인터넷 오버추어 광고에서 늘 맨 위를 차지한다.
문제는 여기에도 막대한 비용이 투입된다는 점이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실력만 있으면 입소문이 났지만 이제는 신문, 방송, 잡지, 인터넷을 통해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병·의원을 알리지 않으면 현상 유지도 힘든 상황. 그래서 서울 강남의 의사 사회에선 “요즘 강남의 병·의원 의사들의 전공과목은 마케팅과”라는 자조 섞인 말도 나온다. 그래서 광고홍보를 통해 많은 환자가 모이고 환자들을 진료하는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명의가 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결국 빌리든 어떻게 하든 광고와 홍보를 쏟아부을 비용이 있는 곳은 살아남고, 그게 안 되는 병·의원은 도태하는 게 서울 강남 의료계에서 벌어지는 살풍경이다.
한 해 평균 4~5명 생활고 못 이겨 자살
국내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자 해외 진출을 모색하는 한의사들.
의원급 한의원 봉직 한의사의 첫 월급은 300만 원을 넘지 않고, 큰 한방병원도 고정급을 정해놓고 인센티브제로 월급을 주는 곳이 많다. 이 때문일까. 서울 서초구청 보건소 계약직 한의사의 경쟁률은 30대 1까지 올라갔고, 지방 보건소도 한의사만큼은 경쟁률이 3대 1을 넘는다.
한의사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인지는 정부가 한방산업특구로 육성 중인 서울 제기동을 가보면 금세 알 수 있다. 5년 전만 해도 한 집 건너 하나꼴로 한의원이 들어섰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건강원과 약재상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심지어 한의사 면허증을 가지고 건강원을 차린 사람도 적지 않다. 무리해 고가의 인테리어를 하고 장비를 들여놓고 한의원을 하다 신용불량자가 된 후 약재상의 직원 형태로 일하는 한의사도 있다. 이들 한의사의 고민은 전국 한의사 1만5000여 명 중 3분의 1인 5000여 명이 회원으로 활동하는 ‘빈의협’(貧醫協, cafe. daum.net/poordoctor) 카페에 가면 한눈에 볼 수 있다.
“평일 오후 8∼9시까지 진료는 기본이고 휴일도 마다 않고 진료했지만 하루 (환자가) 10명도 안 되는 날이 계속됐고, 인근에 4개의 한의원이 더 생겨 빚은 쌓여갑니다. 월세는 밀려 보증금에서 깎인 지 오래고 직원 없이 혼자 환자를 맞이합니다.” “매출이 월 1000만 원이 안 됩니다. 직원 한 명 월급 주고 빌린 돈 3억 원에 원금 갚고 약재 사면 남는 게 없습니다. 이번 달도 저번 달도 적자, 또 적자, 빚만 늘어갑니다.”
하지만 한의원을 몇 개씩 거느리고 명의로 소문나 계속 확장하는 곳도 있다. 이들은 지하철과 거리 광고는 물론 신문, 방송, 잡지, 인터넷에 파상적인 광고와 홍보를 하며 이름을 알린다. 이들 한의원은 환자들로 북적인다. 심지어 버스 옆면에까지 광고를 하는 한의원도 있다. 환자가 많이 오니 돈을 많이 벌고, 돈을 많이 버니 광고를 더 많이 한다. 하지만 한의사 1만5000명 시대에 개원을 한 한의사는 돈이 없어 홍보를 못하니 환자가 없고, 환자가 없으니 빚만 늘어가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요즘 개업 한의계는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따르면 한 해 평균 4~5명의 의사, 한의사가 빚더미와 생활고를 못 이겨 자살한 끝에 부검대에 오른다. 유서가 발견되거나 약물사용 등 사망원인이 명확한 경우는 부검조차 하지 않으니 실제 경영난으로 자살하는 의사는 더 많을 터. 빛이 크면 그림자도 그만큼 큰 법이다. 의사, 한의사만 되면 고소득이 보장된다는 생각으로 의대나 의전원 진학을 꿈꾸는 청소년이 있다면 이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의사, 한의사가 무조건 최고 신랑감, 신부감인 시대는 진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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