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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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많고 탈 많은 毛, 힘과 자아의 상징

동서양 역사 속 머리 이야기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입력2009-03-27 1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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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로 사람을 보내고 유전자 지도를 손에 넣는 과학시대를 열었지만, 안타깝게도 현대의학은 탈모의 진행을 막아줄 뿐 사라진 머리를 돌려주지는 못한다. 인류는 유구한 탈모 역사만큼 발모의 길을 찾아 나섰고 지금도 ‘길 찾기’는 계속되고 있다.

    대머리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4만 년 전 현생인류가 등장한 이래 탈모도 진행됐겠지만 선사시대 얘기는 괄호 안에 묶어두자. 가발이 등장한 게 기원전 3000년경이라고 하니 적어도 단군시대부터 탈모인이 존재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신원이 확인된 최고(最古)의 탈모인은 기원전 12세기 무렵 이집트 파라오인 메르넵타(Merneptah·재위기간 B.C. 1234~B.C. 1220). 기원전 4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모인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을 남겼다.

    “모든 동물 중 인간이 유일하게 대머리가 된다. 그리고 성교 시기 이전에는 절대 대머리가 되지 않는다. 성교를 하려는 남자는 머리가 빠진다. 여자는 대머리가 되지 않는다. 정액을 분비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현대의학으로 최근에야 확인된 남성 탈모와 호르몬의 관계를 2500년 전 이미 관찰한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과학적 탈모 연구는 1940년대에 시작된다.

    탈모의 역사만큼이나 머리카락 사수전(死守戰)도 치열했다. 기원전 400년경 히포크라테스는 탈모증을 치료하기 위해 아편과 고추냉이, 비둘기 배설물을 혼합한 약제를 사용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뱀 하마 악어 사자 고양이 기름으로 만든 발모제가, 로마시대에는 양파즙 발모제가 치료약으로 쓰였다. 근대에는 광천수, 다시마 등이 각광받았다.



    기원전 3000년경 가발 등장

    말 많고 탈 많은 毛, 힘과 자아의 상징

    신윤복의 ‘유곽쟁웅(遊廓爭雄)’. 기생집(유곽) 앞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이긴 사람(가운데)은 득의양양 옷을 입고 있다. 붉은 옷의 별감은 진 사람(왼쪽 흐트러진 상투 머리)을 다독인다. 다리(가체)머리를 한 기생은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담뱃대를 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머리숱이 적은 여인들이 다리(月子·다래·머리숱이 많아 보이라고 덧넣었던 딴머리)를 달아 쪽을 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신라 성덕왕 때 당나라에 보내는 사신 편에 다리를 예물로 가져가게 한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는 여인도(女人圖)의 머리 모양이 다리를 이용한 얹은머리라고 고증된 바 있다. 조선시대 영·정조 때는 머리 모양을 크게 꾸미는 것이 유행하면서 다리 값이 금값처럼 비싸져 다리의 사용을 국법으로 제한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구약성서의 ‘삼손과 데릴라’ 얘기처럼 머리카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힘과 자아의 상징이었다. 우리 옛 병사들은 적에게 상투를 잘리면 일생일대 수치요, 가문에 누를 끼쳤다 하여 자결하는 것이 법도였다. 머리는 남녀 할 것 없이 평생 잘라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며, 빠진 머리카락도 1년 내내 모아뒀다가 섣달 그믐날 밤 예식을 갖춰 소발(燒髮)했다. 개화기에 단발령이 내렸을 때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저항한 것은 머리카락에 대한 한국인의 집념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비구, 비구니가 삭발을 하는 것은 생명을 던지는 것에 버금가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삭발할 때는 속세와의 250가지 연을 끊는다는 서약, 즉 구족계(具足戒)를 받아야 한다. 삭발은 그렇게 속세와 결별하는 상징이다.

    그렇다면 탈모인은 상투를 틀 수 있었을까. 상투는 전체 머리를 단정히 ‘긁어모아’ 정수리 부분으로 올려 뾰족하게 돌려 말아 동곳(상투를 튼 뒤 그것이 다시 풀어지지 않도록 꽂는 물건)을 꽂는다. 그러기에 탈모인들도 주변머리와 뒷머리로 웬만큼 ‘커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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