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잉넛과 노브레인.
두 밴드는 지난봄 ‘EBS 스페이스 공감’ 10주년 기획 무대에 함께 섰다. 느낌이 좋았다. 공연 한 번으로 끝내기엔 아쉬웠다. 결국 크라잉넛과 노브레인은 합동 앨범을 내기로 의기투합한다. ‘96’이 그 결실이다.
이 앨범은 특이하다. 그저 신곡을 모아 앨범을 낸 게 아니다. 두 팀이 각각 상대 팀 노래 세 곡을 골라 자기 스타일로 재해석했다. 노브레인이 고른 크라잉넛의 노래는 ‘말달리자’ ‘룩셈부르크’ ‘비둘기’다. ‘말달리자’는 크라잉넛의 초기 버전을 연상케 한다. 지금에야 리듬이 다채로워지고 사운드도 풍성해졌지만, 1996년을 기억하는 노브레인은 이 노래를 그때처럼 단순하게 해석했다. ‘Our Nation’에 담겨 있던 혹은 그 시절 드럭에 울려 퍼지던 날것의 에너지를 2014년에 고스란히 환기시킨다. ‘룩셈부르크’는 올드스쿨 하드코어 스타일로, ‘비둘기’는 그레고리오 성가라는 기발한 인트로를 입혀 편곡했다.
노브레인이 크라잉넛 초기부터 지금까지의 노래를 골랐다면, 크라잉넛은 노브레인의 초기 곡인 ‘바다 사나이’와 ‘아름다운 세상’, 그리고 그들의 가장 큰 히트곡인 ‘넌 내게 반했어’를 재해석했다. 인디 사상 처음으로 ‘가요톱10’ 순위에도 올랐던 ‘바다 사나이’는 김인수의 아코디언과 함께 스카에서 폴카로 재탄생했다. 파티 펑크인 ‘넌 내게 반했어’는 랜시드 스타일의 질주감 넘치는 펑크 스타일로, 그때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현실을 직설적으로 담아낸 ‘아름다운 세상’은 원곡의 에너지를 살리되 아코디언과 기타 멜로디를 덧입혀 좀 더 풍성한 소리를 들려주는 쪽으로 발전했다.
앨범의 백미는 단연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며 만든 신곡 ‘1996’일 것이다. ‘우린 마치 시한폭탄 같았어’라는 가사는 과장도 허세도 아닌, 정확히 그때 그들의 모습이다. 발라드로 시작해 펑크의 기본에 충실한 사운드 전개. 한때 펑크의 상징적 구호였던, 이제는 어디서도 듣기 힘든 ‘오이!’의 연발. 무엇보다 박윤식과 이성우가 주고받는 보컬. 이 모든 것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1996년의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했으며 오늘만 있었던 시간들을 떠올리게 하기에 일말의 부족함이 없다.
그 시간들은 정말 뜨거웠다. 모든 게 새로 만들어지는 나날이었다. 이전까지 한국 공연장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슬램과 모싱이 탄생했고 스테이지 다이빙이 난무했다. 그 중심에 크라잉넛이 있었다. 그리고 음악을 하고자 마산에서 혈혈단신 상경한 이성우가 있었다. 그해 여름 옐로우 키친과의 조인트 앨범이자 음반 사전심의제도 폐지와 맞물려 발매된 최초의 인디 앨범 ‘Our Nation’으로 크라잉넛은 인디 신(scene)의 중심에 섰다. 이성우는 차승우, 황현성, 정재환을 만나 노브레인을 결성했다. 주말마다 그들은 드럭이란 퀴퀴한 지하실에서 화산 같은 열기를 뿜어내곤 했다.
그들이 공연할 때면 드럭은 관객이 내뿜는 수증기로 가득 찼다. 때로는 산소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이 무아지경의 시간에서 크라잉넛은 ‘말달리자’ ‘펑크걸’로, 노브레인은 ‘바다 사나이’ ‘아름다운 세상’으로 관객에게 남은 최후의 넋까지 빼놓곤 했다. 밴드와 관객 모두 완전 연소되고 또 그것으로 자신의 청춘을 확인하는 나날이었다. 방송에서는 볼 수 없는, 한 시대의 에너지가 용틀임처럼 꿈틀대던 해, 바로 1996년이다. ‘96’은 그해가 병에 담아 보낸, 너무 늦게 도착한 편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