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9일 서울 광진구 광장동 유니클로 악스에서 내한공연을 펼친 제임스 블레이크.
블레이크는 지난해 두 번째 앨범 ‘오버그론(Overgrown)’으로 영국 비평가들이 선정하는 머큐리 프라이즈를 수상했고, 1월 26일 열린 그래미 어워드 신인상 후보에도 오른 바 있는 뜨거운 신예다. 최근 일렉트로닉계 트렌드인 덥스텝(변형된 힙합 리듬을 바탕으로 저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장르. 지드래곤을 비롯한 한국 아이돌 댄스음악에서도 자주 사용된다)과 솔을 응용한 음악으로 언더그라운드 시절부터 주목받았다.
2011년 발매한 1집은 덥스텝에서 어느 정도 탈피해 솔 색깔이 한층 강해진 사운드를 선보였고, ‘오버그론’에선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해져 더는 그를 덥스텝 뮤지션으로만 보지 않는 추세다. 지금의 블레이크는 그가 어릴 적부터 공부했던 재즈 기반 위에 강력한 저음을 중심으로 한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추구하는 뮤지션으로 보는 게 적합할 것이다.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그의 노래는 1집에 수록된 ‘리밋 투 유어 러브(Limit To Your Love)’다. 캐나다 뮤지션 파이스트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이 노래는 절제된 피아노 선율과 느릿하게 쪼개지는 리듬, 우울하고 몽환적이며 비틀거리는 보컬, 나직하고 불길하게 깔리는 저음 물결이 어우러져 잊지 못할 청각적 경험을 하게 해준다. 비가 갠 밤 무한히 뻗은 고속도로를 홀로 걷는 듯한 느낌. 이런 정서는 다른 음악들에서도 변주되고 확장된다. 블레이크보다 덥스텝을 훌륭하게 구사하는 뮤지션은 많겠지만, 이토록 새로운 보편성을 만들어낸 뮤지션은 없었다.
그의 첫 내한은 2012년 지산밸리록페스티벌이었다. 어두운 밤 엄청나게 거대한 스피커가 잔디밭을 저음의 안개로 물들였다. 조명이 최소한으로 비춰지는 무대를 굳이 보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바닥에 드러누워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무대인 양 바라봤다. 불길하되 아름다운 저음은 중력처럼 몸을 휘감았고 블레이크는 마지막 인류처럼 처연하게 노래했다. 기억하지 않아도 기억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한국을 찾은 그의 공연 역시 시각에 의존하지 않아도 좋았다. 지난 공연보다 조명 연출은 화려해졌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효과에 불과했다. 블레이크가 키보드와 보컬을 맡았고 다른 멤버 두 명이 각각 드럼을, 그리고 기타와 온갖 저음을 연주했다. 스탠딩으로 2000명을 채울 수 있는 유니클로 악스는 그의 공연 내내 영화 ‘그래비티’ 속 우주 공간이었다. 일반 가정용 스피커에서 재생했다가는 바로 우퍼가 나가버릴 육중한 저음이 드럼의 킥베이스와 신시사이저를 통해 온몸을 고막으로 만들었다.
2시간이 조금 안 되는 공연이 끝났을 때 나는 영화를 본 기분이었다. 스크린은 없고 스피커만 있는 영화였다. 통상에 밀착해 있지 않은 음악의 기쁨이란 바로 이런 것임을 블레이크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떠났다.